이 논문은 여성사 연구 동향에 관한 역사적 고찰이다. 1960년대 후반 이후 여성 역사가들은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여성의 삶과 그들의 체험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연구해왔다. 그들은 또한 과거로부터 여성들의 역사적 저술들을 발굴했고,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기까지 여성 역사의 전통을 수립했다. 그러나 매우 중요한 인상이 남는데, 그것은 여성들이 역사의 주류 밖에 위치한다는 것이다. 여성사는 근본적으로 역사로부터의 여성의 부재를 수정하는 데 관심을 두었다. 그러므로 여성사 기술의 목적은 여성을 역사에로 회복시키고, 역사를 여성에게로 회복시키는 것이다.
한편 1980년대 중반에 젠더 개념이 부각되었고, 젠더가 역사 내에서 분석의 비판적 범주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그리고 분리된 여성의 역사는 있을 수 없다고 주장되었다. 새로운 역사는 근본적으로 성(性)들 간의 변화하는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전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젠더 역사의 적합성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만일 전통적인 방식의 역사 기술이 ‘그의 이야기’에 중심을 두고 있다면 이제 ‘그녀의 이야기’를 찾아내어 들을 필요가 있다. 여성사를 연구하고 기술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자료와 증거가 희박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때로 행간(行間)을 읽는 역사적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남성과 여성을 모두 포함하는 균형 잡힌 역사를 기술하는 것은 역사가의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본 논문은 루터의 여성관을 살펴보기 위해서 우선 그의 글에서 발견되는 여성혐오증에 대한 거부에 주목한다. 그리고 여성혐오증의 근저에 깔려있는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영-육 이원론과 남-녀 이원론의 사고를 고찰한다. 루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해서 의롭게 된다는 신학적 토대 위에, 영-육 이원론과 남-녀 이원론의 논법이 아닌 믿음과 사랑의 논법을 사용한다. 그는 우선 믿음을 척도 삼아 “영”/영적인 것과 “육”/육적인 것을 구분함으로써 남성은 영에 여성은 육에, 그럼으로써 남성은 영적인 것에, 여성은 육적인 것에 연계하는 구분법을 거부하고, 여남을 막론하고 모두 영적인 존재가 되고 영적인 삶을 살거나 혹은 육적인 존재가 되고 육적인 삶을 살거나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믿음의 열매인 사랑의 삶을 사는 것 자체가 고행이요 금욕생활로서, 이것이 바로 “육”을 죽이고 “영”을 살리는 삶이라고 강조한다.
이러한 믿음과 사랑의 논법에 근거하여 루터는 여성들 안에서도 수녀원 생활과 결혼/가정생활 그리고 수녀와 아내/엄마의 신분에 고착되어 있던 영적 신분과 세속 신분이라는 또 다른 이원론적 사고방식을 용납하지 않는다. 루터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전자와 후자의 관계를 뒤바꾸어 놓는다. 믿음과 사랑의 논법에 의하면 아내/엄마의 신분은 세속 영역에 속한 가정 안에서의 신분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자신을 온전히 맡기고, 사랑의 실천을 마다하지 않는 아내/엄마는 어느 누구보다도 영적 신분의 사람들이다. 무엇보다도 루터의 눈에 아내라는 여성은 하나님이 각 남편에게 특별히 허락해 주신 배필이요, 가장 가까운 이웃으로서 사랑의 법에 따라 섬겨야 할 존재다. 그리고 엄마라는 여성은 루터가 인간 제도들 중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정의 여주인일 뿐만 아니라, 소명의 차원에서 자녀들의 사도, 감독, 그리고 제사장이다.
밀턴은 청교도 혁명이 진행되던 1643년부터 45년에 걸쳐 작성한 이혼론 산문 4편과 실낙원 등을 통해 결혼과 이혼과 성의 문제를 다루었다. 『이혼론』 초판과 재판은 의회와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를 대상으로 저술하면서 교회법 개정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이혼에 관한 법률제도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당시 영국에서 교회법과 의회법 모두에서 결혼을 성사로 인정하여 합법적인 이혼을 인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음행 등의 이유로 이혼한 경우에 과실이 없는 사람도 재혼을 허용하지 않고 있었다. 자신의 불행한 결혼생활과 함께 영국의 이러한 이혼제도의 문제점을 파악한 밀턴은 불합리한 이혼제도를 개혁하려고 공적 논쟁에 뛰어 들었다.
밀턴은 이혼론 산문들을 통해 결혼의 목표에 대해 새로운 견해를 내세우게 되었다. 당시까지 자녀출산과 음행 방지가 결혼의 가장 중요한 목적으로 이해되고 있었는데, 밀턴은 창세기 2장 18절의 새로운 해석을 통해 부부간의 고독을 해결하기 위한 영적인 성숙과 정신적인 사랑이 결혼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라고 주장하였으며, 자녀출산은 결혼의 목적이라기보다는 사랑의 결과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부부간의 정신적인 대화와 사랑이 불가능한 경우에도 이혼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음행만이 이혼의 근거가 된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바리새인들의 과도한 이혼에 대한 책망이므로 문자적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며, 신명기 24장 1절에서 이혼 사유로 인정한 수치스러운 것에는 육체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문제까지 포함된다고 해석하였다. 따라서 밀턴은 부부간의 정신적인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경우에도 이혼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밀턴의 이혼론은 남성의 입장에서 제기되어 가부장적인 가치관을 반영하여 여성의 위치를 비하하는 측면이 있다. 그렇지만 밀턴은 결혼에서 여성을 대화의 동등한 반려자로 인정하고 행복의 동반자로 인정하는 측면도 있다. 더 나아가 당시 밀턴의 관심은 영국의 국교회와 왕정 하에서 종교와 개인과 정치의 개혁을 통한 인간의 자유의 확보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이혼론 산문들은 인간의 개인적인 자유의 확보를 위한 차원에서 저술되었다.
그의 이혼론 산문들은 부부간의 사랑이 결혼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라고 밝힌 것은 중요한 공헌이었고, 당시 그의 이혼에 관한 입장은 수용되지 못하였으나, 20세기에 들어와 성격차이가 이혼의 요소로 인정되기에 이르렀다. 앞으로 이혼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밀턴이 말한 바와 같이 부부간의 건전한 사랑의 관계가 잘 형성되도록 노력해야할 것이다.
슈페너와 프랑케로 이어지는 교회내적인 온건한 경건주의는 결혼은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제도로 수용되며, 부부간의 성은 비록 타락한 인간의 특징이긴 하지만 죄의 심판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는 루터의 입장을 견지하였다. 슈페너는 부부간의 성은 유일하게 하나님에 의해 죄의 오명으로부터 순화된 정욕의 형식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그에게 부부의 성은 “길들여지긴 악마”이긴 하지만,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악마였다. 인간의 육체성에 대한 긍정은 경건주의자들에게 이르러 루터보다 훨씬 약화되었다. 성과 결혼에 대한 문제는 급진적인 경건주의자들에게는 더욱 예민하였다. 그들은 야콥 뵈메에 의해 영향을 받았던 크리스토프 호흐만 폰 호헨나우가 제시한 결혼의 5가지 유형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특별히 네 번째 결혼 유형인 동정(童貞) 결혼과 다섯 번째 유형인 순결한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와의 결혼을 지향하였다. 이들은 단순한 결혼의 유형이 아니라, 영적인 상승적인 발전 단계로 인식하였다. 경건주의의 흐름 중에서 독특한 특징을 보여주었던 친첸도르프와 헤른후트 형제단은 경건주의의 영향을 받아 성의 쾌락적인 측면을 경계하면서도 급진적 경건주의자들과 달리 성과 결혼을 긍정하는 독특한 관점과 실천을 보여주었다. 친첸도르프는 그리스도와 교회, 신랑 그리스도와 신부 그리스도인의 성서비유를 근거로 성과 결혼에 관한 신학적 형이상학을 전개하였다. 그의 ‘신부-신비주의’와 ‘성례전으로서의 결혼 이해’가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친첸도르프가 말하는 ‘복음적인 결혼’과 하나님 나라를 위한 ‘동지(투사)들의 결혼’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신학, 과학, 형이상학의 범주들은 서로 양립할 수 있는가? 인격적 경험의 요소를 주요 구성 내용으로 삼는 신학은 이러한 요소와 무관한 듯, 물리적 실재에 대한 진술만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는 자연과학과 어떠한 관련성을 갖고 있는가? 본 연구는 이같은 물음에 대한 대답을 시도하는 작업으로 자연과학의 신학적 형이상학의 토대를 탐구한다.
근대 과학혁명 이후 신학과 과학의 영역은 서로 양립할 수 있는 관계라기보다 상호배타적이며 대립적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리하여 종교와 과학은 각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은 채 갈등과 반목을 되풀이하며 서로의 주장만을 강조하여 왔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비판적 실재론자들’로 불리는 이안 바버(Ian G. Barbour), 아더 피코크(Arthur Peacocke), 존 폴킹혼(John Polkinghorne)등은 신학, 자연과학, 형이상학의 통섭을 지향하여 종교와 과학의 불필요한 대립과 갈등을 해소하려고 노력하였다.
이 글은 두 가지 목적을 갖는다. 첫째 근대과학의 기계론적인 세계관은 기독교적 신념체계 및 가치와 얼마만큼 친화성을 갖는지를 밝히는 것이고, 둘째 신학과 자연과학의 매개체로서 형이상학적 추론들이 얼마만큼 설득력을 지니고 있는지를 판단해 보는 것이다. 결국 이 글은 ‘기계론적인 세계관’으로 대변되는 근대 과학혁명은 과학의 탐구에서 신학의 형이상학적 요소를 배제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그것은 무신론적인 자연주의 혹은 과학적 결정론으로 귀결될 수 없고 오히려 심오한 합리성의 틀 속에서 과학과 신학의 영역을 조화로운 관계로 설정했음을 밝히고자 한다.
한국 기독교 선교의 기원에 관해 관심을 갖고 있는 몇몇 개신교 단체들은 최근 올해 2014년을 한국기독교 130주년으로 정하고, 이를 기념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중대한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기 전에, 우리는 1) 용어 사용의 문제, 2) 역사관의 중요성, 그리고 3) 첫 번째 선교사에 대한 논쟁 등과 같은 문제들을 주의 깊게 연구해 보아야 한다.
가장먼저 우리는 ‘기독교(Christianity)’의 의미를 고려한 후,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가 과연 적절한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기독교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나 그 상태’를 의미한다. 그래서 기독교는 로마 카톨릭 교회, 동방정교회, 성공회, 그리고 개신교회를 모두 다 포함하는 매우 포괄적인 용어이다. 만일 한국에서 가장먼저 선교역사가 시작된 천주교의 역사의 시작점인 1784년을 한국기독교의 시작점으로 본다면, 올해는 한국기독교 130주년이 아니라 230주년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올해 2014년도를 한국 기독교 전체가 아닌 개신교 차원에서만 기념하려 한다면, ‘한국기독교 130주년’이 아닌, ‘한국개신교 130주년’이라는 슬로건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들은 역사를 이해함에 있어서 역사관의 중요성에 관해서 반드시 인지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한국에서는 한국교회사 혹은 한국선교역사를 연구함에 있어서 크게 ‘선교사 중심의 역사이해’와 ‘한국인 중심의 역사이해’라는 두 개의 역사관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인 중심의 역사이해를 하려는 사람들은 1884년 이전에 주로 중국이나 일본에서 초기 선교사들과의 만남을 통해 개신교 신앙을 접한 초기 한국인들(예를들어, 백홍준의 아버지, 이응찬, 김진기, 서상륜, 서경조, 이수정)에게 관심을 많이 갖고 있다. 물론 이들 한국인들은 한국 개신교 신앙의 개척자들로서 한국개신교 선교를 위해 다방면에서 공헌을 한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이 진정한 기독교인 이었는지, 그리고 한국에 교회를 설립한 것이 맞는지는 의심의 여지가 있다. 바로 이런 점들 때문에 어떤 이들은 한국개신교 역사의 시작은 외국 선교사들의 한국입국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국에 온 첫 번째 개신교 선교사가 누구인가에 관해서는 여전히 논쟁점들이 존재한다.
찰스 귀츨라프는 1832년에 그리고 로버트 토마스는 1866년에 한국에 처음 도착한 것은 역사적으로 분명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과연 진정한 선교사였는가에 대해서는 명확한 입장이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이 한국에 올 때, 서구 제국주의 혹은 식민주의자들과 함께, 그리고 그들의 조력자로 한국에 왔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한국 교회사학계와 교회들에서는 1880년대에 한국에 온 선교사들 가운데에서 그 첫번째 선교사를 찾으려고 한다. 한국감리교의 초대 총리사였던 양주삼은 1880년대 한국에 온 선교사들 중에 로버트 매클레이를 첫 번째 개신교선교사로 보고 있다. 왜냐하면 매클레이가 1884년에 고종으로부터 감리교를 포함한 모든 개신교 선교사들의 선교(의료, 교육)에 관해 공식적으로 허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특히 매클레이가 보여준 한국정부와 한국 사람들을 대하는 정중한 태도는 오늘날 한국 개신교회들에게 매우 긍정적인 교훈을 주기 때문에, 우리는 매클레이를 한국에 온 첫 번째 개신교 선교사라고 고려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본 논문은 중국기독교 역사 속에서 정통과 이단의 문제를 성경 God의 중문번역명에서 발생한 논쟁들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 문제는 명말청초의 천주교에서도 조상숭배와 공자숭배와 더불어 “전례논쟁(礼仪之争)”의 한 축으로 당시 천주교선교사들의 중국선교 현장에서 문화적응적 입장 또는 중국문화를 이교문화로 규정하고 이를 배척 또는 개화하려는 입장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본문은 이 논쟁의 연장선에서 특히 개신교 중국선교 중 많은 서방선교사들이 참여한 영문저널 The Chinese Recorder 를 중심으로 이 논쟁을 전개했다. 이 속에서 우리는 선교사들의 서방전통 또는 성서전통으로 구분되는 의식의 차이와 중국문화 특히 ‘상제’, ‘신’ 이 단어들이 갖는 의미의 차이, 그리고 중국종교 등에 대한 관점차이와 선교대상인 중국신도에 대한 이해, 서로 다른 선교지역 이해 등의 원인 때문에 좀처럼 종식되지 않는 논쟁을 전개했음을 고찰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충돌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들이 논쟁을 통해 얻어진 경험과 중문번역명의 직접적 사용자인 중국신도들의 성장을 주목하면서 전대와는 다른 새로운 입장을 찾아나가며 이를 통해 상호 이해와 일치의 길로 나아가려고 노력했음을 살펴볼 수 있다.
분명 용어문제(Term Question)는 단순한 명사논쟁이 아니라 사상간의 실제적인 교류를 의미하는 논쟁이다. 이 때문에 각각의 역명(용어) 안에 내재되어 있는 다양한 함의들을 파악하고 중국언어가 가지고 있는 복잡성과 지역적 차이성 그리고 역사적 변천 등을 심도 있게 연구한다면 충돌처럼 보일 수 있는 논쟁의 현장에서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으며 더욱 자신의 관점을 수정할 수 있는 넓은 시야를 얻을 것이다. 우리가 The Chinese Recorder 를 통해 얻은 관점은 바로 이를 실천하는 첫걸음일 것이다. 자신의 입장을 고집해 성서의 God을 전달할 방법이 한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방법에 의해 전달할 수 있음을 즉 번역 속에 수많은 타협과 다원성이 공존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