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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敎會史學會誌 KCI 등재 한국교회사학회지 JCHS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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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집 (2017년 12월) 9

1.
2017.12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한국개신교의 종교개혁 500주년과 관련된 최근의 경향을 살펴볼 때, 주 목할 만한 현상이 나타난다. 그것은 대부분의 연구가 500년 전 유럽의 종 교개혁과 현재 한국의 종교개혁을 살펴보면서 양자를 직접적으로 연결시 킨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두 가지 질문이 제기된다. 하나는 500년 전 유럽의 상황과 오늘날의 한국의 상황 사이에는 500년이란 시간적 간격과 서구와 비서구라는 공간적 간격이 있는데, 이것을 충분히 고려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다른 하나는 한국에 이미 100여 년 전 개신교가 전달되었 기에 종교개혁과 관련된 역사가 1세기에 가까운데, 이런 전(前) 역사에 대 하여 충분한 관심을 보이는가 하는 질문이다. 본 논문은 바로 이런 문제점 에 대해서 답하고자 한다. 이것은 방대한 연구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따라 서 본 논문은 범위를 제한하여, 한국개신교 초기부터 해방 전까지 종교개 혁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문헌 특히 단행본을 분석하는데 집중하고자 한다. 본 논문이 다루고자 하는 것은 해방 전에 나온 일곱 권의 단행본이다. 이것들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인다. 첫째, 저자의 관점에서 보면, 처음 네 권은 선교사가 집필했고, 다섯 번째는 한국인이 번역했고, 마지막 두 권 은 한국인이 집필했다. 이것만 봐도 점차 한국인 주도적인 연구가 이뤄진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내용의 관점에서 보면, 종교개혁의 역사서가 네 권 이었고, 인물사가 세 권이었다. 루터교, 종교개혁 전반, 종교개혁 이후 등 구체적이고도 광범위한 역사가 다뤄졌다. 또한 종교개혁의 핵심인물인 루 터, 녹스, 칼뱅이 소개되었다. 셋째, 출판년도의 관점에서 보면, 종교개혁 400주년인 1917년을 전후하여 1900년대에 1권, 1910년대에 2권, 1920년대 에 2권, 1930년대에 1권, 1940년대에 1권이 출간되었다. 이를 미루어볼 때, 종교개혁에 관한 관심이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본 논문은 해방 전 종교개혁 관련 저서들을 통하여 다음 몇 가지 사실을 발견하였다. 첫째, 종교개혁에 대한—가톨릭교회를 포함하여— 상당한 지 식이 제공되었다. 둘째, 종교개혁에 대한 개념, 용어 등이 개발되었지만 추 후 연구에 성실하게 반영되지 않았다. 셋째, 이 저서들의 출간이 바로 한국 개신교의 자기신학화의 발전 과정을 보여주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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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양심에 대한 루터의 가르침을 살펴보았다. 연구 결과로서 루 터의 양심 개념이 가지고 있는 특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볼 수 있다. 첫 째, 루터는 양심의 문제를 단순히 도덕·윤리적 차원이 아닌, 근본적으로 인 간과 하나님의 관계, 특히 구원론의 틀 안에서 다룬다. 둘째, 양심의 판단 대상이 되는 것은 개별적 행위이기 전에 한 인간 전체다. 셋째, 양심은 하 나님의 판단을 따를 때 제대로 기능한다. 넷째, 양심에 대한 루터의 가르침 은 법과 복음, 믿음과 사랑, 그리고 ‘~으로부터의 자유’와 ‘~을 향한 자유’ 라는 신학적 주제들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여섯째, 루터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양심의 문제를 정립하고 나서, 이 토대 위에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양심 문제를 다룬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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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중국 지 식계층에 의해 처음 소개된 내용부터 그 이후의 변화된 루터의 이해를 고 찰하는 것이다. 중국 지식인들에 의해 소개된 루터는 중국의 사회적, 정치 적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극단을 오고 가는 다양한 형상으로 부각되었다. 1840년 아편전쟁 이후 중국에 처음 소개되는 루터의 형상은 천주교에서 개신교를 분립시킨 종교적 “창시자”이었다. 이 시기는 중국 개명 지식인들 이 나라의 부패와 무능에 대해 통한하던 시기였다. “중화”라는 폐쇄적인 자기중심에서 벗어나 세계무대에서 강력한 대국을 꿈꾸는 청나라 지식인 들에게는 루터는 단지 천주교라는 독제적인 종교 구도에서 개신교를 분립 해낸 “종교적 창시가”일 뿐이었다. 그러나 중국 근대 계몽운동 및 정치개혁의 시작을 알리는 19시기 말 유 신운동과 20세기 초 신문화운동의 과정에서는 중국 지식인들에 의해서는 “혁명적 개혁자”로 칭송받았다. 유신운동가들은 중국의 부패와 무능을 해 결하기 위해서는 서방의 우수한 체계를 유입하고 개혁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 구체적인 개혁의 일환으로 개신교를 모방한 공교를 회복하고 부흥시키 는 것으로 보았다. 때문에 유신 지식인들은 유신운동이 실패한 이후 자신들이 이룩하지 못한 개혁의 욕망, 실패에 따른 심리적 방어로 루터를 “혁 명적 개혁가”로 이해하였다. 신문화운동 거장들은 공교를 미신하는 유신운동가들과 정반대로 종교를 국민을 세뇌시키는 아편과 같은 존재로 혐오하였기에 천주교 교황의 전횡 에 대항한 루터를 혁명가로 높게 평가하였다. 이 과정에서 루터의 종교개 혁가의 색채는 제쳐놓고 오로지 혁명가의 측면만 강조한 것 역시 신문화운 동자들의 주관적이고 편집 취사적인 이해이기도 하다. 하지만 20세기 초부터 60년대까지 실질적으로 무력으로 혁명을 강행하 는 신해혁명 및 공산주의 혁명에서는 오히려 혁명가들에 의해 혁명을 반대 하는 “반혁명 배신자”로 낙인이 찍히고 강렬한 성토를 받게 되었다. 특히 1949년 중국 공산당이 집권한 이후 끊임없는 정치 이데올로기운동 속에서 루터는 꾸준히 혹평의 대상이 되었다. 이는 “마르크스-레닌주의 계급 분석 방법”이라는 틀 속에서 엥겔스의 루터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지배적인 작용을 한 것이다. 종교개혁을 계급투쟁의 차원에서 자리배김하고 독일 농 민전쟁을 계급혁명의 차원에서 평가할 때 루터의 사상과 행적은 “반혁명 배신자”로 이해하기에 충분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20세기말 개혁개방을 맞이한 새로운 역사적 상황부터는 “인문적 사상 가”로 루터의 형상이 새롭게 수립되고 있다. “계급”과 “혁명”이라는 주제 가 사라지고, 더불어 아직도 공산주의사상이 지도사상인 중국 공산당 집권 속에서 “종교”에 대한 부정적인 판단이 지속되는 중국 당대의 시대 환경에 서 필연적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루터에게서 “혁명”과 “종 교”라는 주제를 제외하면 남는 것은 오로지 “인문”이 아닐까? 개혁개방 이 후 현재까지 “인문적 사상가”로 새롭게 수립되는 루터의 형상은 현재진행 형이라고 할 수 있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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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웨슬리의 설교에 집중하여 중년 이전의 웨슬리의 생각을 추 적하여, 특별히 그가 메소디스트 운동을 시작한 옥스퍼드에서 공개적으로 행한 설교에 집중한다. 1738년 올더스게이트 사건을 전후해서 그가 옥스퍼 드에서 한 9편의 설교를 통해 볼 때, 대학에서 시작된 메소디스트 운동의 중심 사상이 무엇이었는지, 그는 무슨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결국 대학 강단에서 어떤 변화를 기대했는지를 읽을 수 있다. 이것은 당시 영국 사회의 지성을 대표하는 곳에서 교육을 담당한 교수 들이, 그리고 이후에 목회를 담당할 학생들이 과연 어떤 각오와 결단을 해 야 한다고 웨슬리가 생각했는지를 밝히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웨슬리 자신은 교회개혁을 어떤 방향으로 수행하려고 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기대를 안고 입학하여 공부한 곳, 그곳에서 자신을 가르친 교수 와 동료와 후배, 그리고 제자들 앞에서, 그들이 어떤 각오로 공부를 하고, 앞으로의 사역을 준비해야 하는지를 밝힌 웨슬리의 간절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아울러 웨슬리의 옥스퍼드 설교는 당시의 교수나, 목사나, 신학도 가 교회문제의 중심에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기에, 2017년 종교개 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한국의 신학대학과 교회에서 활동하는 교수와 목 사들에게, 예언자로서 그리고 종교개혁자로서 선포하는 메시지를 파악할 수 있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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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한국 장로교 여성 가운데 최초로 목사안수를 받은 최덕지 (1901-1956)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하여 무너진 한국교회를 회복 하기 위해 해방 직후에 전개한 교회재건 운동을 살펴보고, 그의 교회론에 대한 신학적 해석을 시도한다. 그의 교회론에 대한 교회사가들의 평가는 지금까지 대체로 매우 부정적 이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의 교회론을 ‘극단적 분리주의’ 혹은 ‘극단적 분파주의’ 혹은 ‘도나투스주의’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이들의 평가는 최덕 지의 재건운동에 대한 자세한 분석과 교회론에 대한 깊은 신학적 해석에 기초한 것이 아니다. 본고는 이런 연구의 공백을 메꾸기 위한 하나의 시도 이다. 최덕지의 교회론을 정확하게 평가하기 위해 그의 교회재건 운동을 해방 직후의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 위치시키고 ‘도나투스파 교회론’을 해석학 적 도구로 사용하여 그의 설교를 분석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최덕지의 교회론을 ‘극단적 분리주의, 혹은 분파주의’ 혹은 ‘도나투스주의’라고 단순하게 말하기는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재건운동과 재건교회 설립은 그가 의도하지 않았던 교회의 분열을 낳았고, 그의 교회 론에 도나투스주의와 매우 유사한 성격-장점과 한계 두 측면 모두에 있어 서-이 많은 것도 부인할 수 없음을 확인했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최덕지의 교회재건 운동은 교회의 거룩성 회복을 위 해서는 큰 공헌을 하였으나, 교회의 일치 유지를 위한 노력은 부족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역사적 상황에서 교회의 거룩성 회복이야말 로 보다 중요한 시대적 과제였던 점을 감안하면, 그의 공헌이 한계보다 훨 씬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최덕지의 교회론이 지금 주님의 몸을 수없이 많은 조각으로 찢어놓고 만신창이로 만든 한국교회에 주는 교훈은 실로 무겁다. 참된 교회의 회복 을 위해서는 ‘일치를 해치지 않는 거룩성’과 ‘거룩성을 해치지 않는 일치’ 를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연구가 최덕지의 교회재건 운동에 대한 재평가를 위해 그리고 오늘 한국교회의 분열된 현실의 뿌리 이해와 일치의 길 모색 그리고 더 나아가 통일 이후 북한교회가 직면하게 될 해방직후와 유사한 배교자 치리 문제를 예견하고 미리 준비하는 데 기여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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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그리스도교와 헬레니즘의 관계란 관점에서 유대교의 한 종파 인 예수 운동이 이방인 선교를 통해 세계 종교로 발전하는 제1차 유다이아 전쟁까지의 원시 그리스도교의 발전 과정을 역사적으로 규명하였다. 이를 위해 우선 유대교와 헬레니즘의 관계를 팔레스티나와 디아스포라를 나누 어 간략하게 고찰하였고(II), 그 다음에는 언어, 유대계 그리스도교와 이방 계 그리스도교의 구분, 유대교 율법과 이방인 선교의 관계를 중점적으로 다루었다(III). 결론적으로 이 연구는 첫째, 예수와 그 제자들은 아람어를 사용하고 헬 레니즘을 수용하는데 소극적이었지만, 헬레니즘 유대계 그리스도인(“헬라 파”)들은 예수 전승을 그리스어로 번역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그리스 세 계에 맞게 변용시키고 사마리아인과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리스도 교가 그리스 문화를 매개로 지중해 세계 전역으로 전파되는데 핵심적인 역 할을 수행했으며, 둘째,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율법에서 자유로운 이방 인 선교를 주도하고 처음에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율법이 필요하지 않다고 보았지만, 후기에는 온 이스라엘의 구원을 확신하고 다른 형제자매를 위해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강조하여 율법 이해에서 변화를 보여주었고, 셋째,바울은 주체와 인격의 구별, 개인의 결단과 보편적인 사회의 전망을 강조 했다는 점에서 헬레니즘 정신에 부합되는 새로운 종교를 제시했으며, 마지 막으로 가정 교회가 이러한 새로운 현실을 실현하고 경험하는 모판이 되었 다는 것을 밝혔다. 예수 운동이 이방인 선교를 통해 세계 종교로 발전하는 과정을 추적함 으로써, 본고는 그리스도교와 헬레니즘의 관계를 규명하며, 유대교와 그리 스 문화 사이에서 원시 그리스도교가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이 해하는데 도움을 주었고, 앞으로 역사적 차원뿐만 아니라 신학적 차원에서 이 주제를 다룬 연구가 진척되기를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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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국내 개신교 중 성경의 절대 권위를 강조하는 교단 중 하나인 한국그리스도의교회(유악기)에 주목하였다. 한국그리스도의교회는 1937년 미국그리스도의교회 선교사 존 T. 채이스(John Trawrick Chase, 1905-1987) 에 의해 시작되어 현재 350개 교회를 가진 소규모 교회로, 분열된 교회들 의 연합을 목표로 성경과 관련하여 7가지 핵심가치를 추구한다. 동 교회의 성경관은 미국그리스도의교회 지도자 알렉산더 캠벨(Alexander Campbell, 1788-1866)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본 연구는 서론에 이어 2장에서 알렉 산더 캠벨의 성경관을 다루고, 3장에서 한국그리스도의교회가 주장하는 성 경의 절대 권위와 성서 권위의 신학적 근거를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동 교회의 성경관이 한국 기독교에 주는 의미를 전망할 것이다. 본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미국그리스도의교회 지도자 알렉산더 캠벨은 17-18세기 서구의 이성주 의로 성경의 권위가 약화되고 개인주의의 영향으로 교회 분열이 가속화되 는 시기에, 교회연합에 주목하고 성경을 교회연합의 기초로 삼았다. 그는 종교개혁자 루터나 칼빈처럼 신앙과 실천의 표준으로 성경의 권위를 재확 인하고, 성경 권위의 신학적 근거를 성경의 내용(단계별 ‘인류구원사’)과 성경저자의 영감에서 찾았다. 1930년대 이후 미국그리스도의교회의 환원 정신을 계승한 한국그리스도의교회 지도자들은 한국 기독교계의 교파주의 에 반대하고, 교회연합을 위해 “성경으로 돌아갈 것(Back to the Bible)”을 호소하였다. 그리고, 알렉산더 캠벨처럼 성경 권위의 신학적 근거를 성경 에 나타난 ‘인류구원사’와 성경의 영감에서 찾았다. 한국그리스도의교회의 성경관 특히 성경 중심적 교회연합의 원칙은 한 국 기독교 연합에 큰 호소력을 갖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세속화와 개인주 의가 사회 전반에 확산되고 한국 기독교 내 교파 분열이 지속되고 있는 한, 동 교회의 성경 중심적 교회연합의 원칙은 한국 기독교에 교회연합의 단초 를 제공하고 동시에 한국의 정황에 맞는 토착 기독교를 향한 해석학적 출 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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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소고는 그레고리오스가 완전의 개념을 플라톤주의의 이해인 정적인 것으로서가 아니라 지속적인 변화의 과정으로 이해했을 뿐만 아니라 기독 론을 기초로 한 구원론적 삶의 과정(soteriological life as epektasis)이라고 해석함으로서 기독교화 했다는 것을 검증한다. 그레고리오스 이전까지 완 전이란 단어는 주로 신에게 적용되는 개념이었다. 완전이란 개념에 대한 고전적 이해는 플라톤주의에서 선 그자체로 볼 수 있는데, 플라톤주의는 선 그자체로서 완전을 신에게 적용하며 신은 변화될 수 없기에 완전도 변 화될 수 없는 정적인 것으로 이해했다. 이와 같은 고전적 개념이 4세기 후 반에 들어서면서 고전적 이해로부터 한 발자국 더 나아가게 되고, 이 개념 의 고전이해에 변형이 일어나게 된다. 이런 변화는 닛사의 그레고리오스 (Gregory of Nyssa)가 완전에 대한 철학적인 분석과 함께 자신의 인간 이 해에 완전개념을 적용하면서 나타난다. 뿐만 아니라, 인간이 지속적인 변 화로서 완전한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인간 스스로가 충족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기초로 해야 지속적인 덕을 추구하는 완전한 삶이 가능하다고 보았고, 이와 같이 완전을 성서와 기독론을 중심으로 이해하며 기독교화 했다. 그레고리오스의 완전에 대한 인류학적 그리고 기독론적 접근은 완전 개념에 대한 고전적 이해에 변형을 가져왔고, 이런 변형은 그의 새로운 영 성신학 형성과 후대 영성신학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레고리오스는 완전 을 단지 철학적으로만 이해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적 개념으로 특히 기독 론과 구원론적 입장에서 재해석했다. 그에게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그리스 도 안에서 지속적인 성장과정이고, 이것은 그리스도를 기반으로 가능한 구 원론적 성격을 띠고 있다. 그의 완전에 대한 이해는 고전문화의 변형과 기 독교화된 개념인 것이다.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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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루터가 종교개혁 시기에 이미지에 관한 어떤 신학과 입장을 갖 고 있었는지를 그가 했던 설교와 강연 그리고 이를 시각화한 예술작품의 분석을 통해 고찰하였다. 이를 위해 먼저 2장에서는 중세말의 이미지와 연 관된 여러 폐단 속에서 루터의 이미지에 대한 입장이 어떻게 나타나기 시 작했는지 살펴보았다. 3장에서는 급진적 우상파괴주의자들과의 논쟁을 통 해 루터가 그의 이미지에 대한 신학을 어떻게 더욱 진전시켰는지 고찰해 보았다. 마지막으로 루터가 루카스 크라나흐라는 화가의 도움으로 어떻게 예술을 통해 자신의 종교개혁의 중심적인 신학과 교리를 신도들에게 알리 고 교육하였는지 고찰하였다. 루터는 중세말의 전례와 미사 혹은 면벌부 등과 관련된 이미지의 폐단 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지만 기본적으로 중세의 이미지에 대한 내재적 신 학에 동의하였다. 또한 중세의 이미지에 대한 긍정적인 견해 중 하나였던 신앙고양과 종교 교육적 측면을 수용하였다. 또한 급진적인 종교개혁자들 의 우상파괴주의 정책에 대해서는 이미지의 중립적인 성격을 강조하면서 물질 안에는 영적인 것이 깃들일 수 없다는 급진적 우상파괴주의자들의 초월주의적 관점에 반대하고 내재적인 이미지관을 고수하였다. 또한 이미지 자체는 중립적이나 이미지가 만일 우상이 되었을 경우는 파괴할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이때에도 신도들이 우상파괴를 직접 행해서는 안 되고 행 정당국이 우상을 제거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종교개혁과 관련된 이미지에 관한 당대의 논쟁들에 직면하여 종교개혁의 리더로서 그의 중심적인 신학과 성경의 해석을 중심 으로 자신의 입장을 밝힌 것이었다. 즉 칭의론을 주장하면서 그는 이미지 에 경배하고 이미지를 그리고 만들도록 후원하고 경배하는 것은 구원을 위 한 사역으로 간주될 수 없다고 보았다. 다만 내재적인 관점에서 물질의 하 나로서의 이미지가 신성이 깃들어 구원을 위한 도구로 사용될 수 있는 가 능성을 열어두었다. 이러한 그의 이미지에 대한 신학과 태도는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대다수 의 종교개혁가들이 이미지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던 것과 달리 이미 지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을 우리에게 들려줌으로써 오늘날 개신교의 이미 지에 대한 신학적인 관점을 확립하고 현대의 다양하고 복잡한 문화현상에 대해 유연한 태도로 소통하고 적용하는데 있어 시사하는 바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