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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敎會史學會誌 KCI 등재 한국교회사학회지 JCHS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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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호

제43집 (2016년 4월) 7

1.
2016.04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사형제도”를 다루는 방식은 법률적이고, 민속학적이며 사회학적인 분 야이지만 우리는 이 문제를 종교사적으로 고찰하려고 한다. 즉, 기독교의 관점에서 볼 때 “사형제도” 역시 매우 중대한 사안이었음에 분명하며 이를 둘러싼 입장 역시 첨예하게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신약성서에 따르면 사형제도는 불가능하다고 말하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복종과 불복 종의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이 정부에 사형제도라는 권한을 부여해주셨다 고 주장한다. 무엇보다 사형제도를 거부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법의 이반 (離反)이라는 전제 아래 주장하였다. 반면 신정통주의 신학자인 에밀 부룬 너는 “검, 즉 사형제도는 깨어진 하나님의 질서에 대한 신의 거룩한 진노 의 표현이며 표현이어야만 한다”고 기술했는데, 이는 완고한 이단, 어린이 들을 미혹하는 유혹자, 살인이나 신성모독자 같은 범법자들에 대해서 불과 검으로 근절시켜야 한다는 프란체스코회 설교자인 시에나의 베르나르딘 (Bernardin von Siena, 1380-1444)을 연상시킨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종교 사적으로 다룬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원-사료에 대한 언어학적이고 역사적인 해석을 바탕으로 국가와 정치에 대한 종교적인 관계를 묻는 것인 데, 이때 본문과 사실에 대한 종교사적인 접근이란 종교적인 언어로 환원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아우구스티누스는 북아프리카 교회가 겪고 있는 도나투스파 논쟁에 깊이 관여하면서, 그 지도자였던 “파르메니아누스 서신 논박”(Contra epistulam Parmeniani)을 남겼다. 그는 이 작품에서 근본적으로는 살인과 같은 사형제 를 인정하지 않지만, 경우에 따라서 하나님의 권위와 국가의 권위를 모독 함으로써 질서와 규정을 깨는 행위들에 대해서는 “사형제”라는 강경한 입 장을 천명하였던 것이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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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루터의 성령이해를 다루었다. 루터는 고대교회의 삼위일체 이 해를 계승하고 있고, 삼위의 관계나 본질에 대한 다른 견해를 갖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성령의 활동에 대한 이해는 그에게 매우 중요했다. 왜냐하 면 종교개혁 진영 내부에서 개혁의 정당성을 성령의 직접적인 지시나 내적 명령에 두는 사례들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 주된 논의의 유발자는 칼슈 타트와 토마스 뮌처 그리고 소위 츠비카우 예언자들이었다. 이들은 행동의 근거를 성령의 직접적인 역사와 내적 지시에 두며, 개혁의 방향을 주관적 으로 선회하려고 했다. 평신도들에게 성령의 소유를 촉구하며, 성령의 지 시를 받는 자신들만이 참된 하나님의 종이라고 주장했다. 이들로 인하여 루터는 성령의 역사에 대해 다시 한 번 깊이 숙고했으며, 성서를 토대로 상세히 반박했다. 루터에게는 내적인 깨달음보다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 이 더 중요했다. 그는 성령의 역사를 말씀보다 앞세우지 않았다. 성령의 역 사에 대한 루터의 사유는 대체로 1520년대 초기와 중반에 열광주의자들과 의 대립 속에서 계속 형성되며, 1520년대 후반에 집중적으로 발간된 󰡔고백󰡕, 󰡔대교리문답서󰡕, 󰡔소교리문답서󰡕 그리고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에 표명되어 있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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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에 의해 만주에 파송된 선교사 존 로스 (1842-1915)는 1877년부터 한글복음서를 번역하기 시작하였으며, 1882년 부터 1887년까지는 복음서와 신약성서를 최초로 발행하고 보급하기 시작 하였다. 그는 󰡔예수셩교요안복음젼셔󰡕 초판(1882)에서 소위 ‘간음한 여 인 이야기’(Adulteress Pericope)로 불리는 7:53-8:11 부분을 의도적으로 삭 제하였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그는 󰡔예수셩교요안복음젼셔󰡕 초판 을 발행할 때에, 단순하게 기존에 번역되었던 중국어 문리역본이나 북경관 화역본, 영어 역본들, 또는 역사적인 그리스어성서 개정역본 가운데 바로 전(前)해에 옥스퍼드대학교 (University of Oxford)에서 발행되었던 역본을 그대로 번역하지 않았다. 이 연구가 살펴본 문헌적 증거들은 로스가 성서 사본비평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옥스퍼드 판 그리스어성서 개 정역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시내산 사본(Codex Sainaiticus)의 요한복음 본문 취급을 따랐음을 암시한다. 1881년에 발행된 옥스퍼드 판에서는 요한 복음 7:53-8:11의 소위 ‘간음한 여인 이야기’가 그 앞뒤의 꺽쇠괄호 표시와 함께 여전히 본문에 포함되어 있으며, 대부분의 고대사본들이 이 부분을 생략했음을 표시하는 각주가 첨부되어 있다. 로스는 옥스퍼드 판의 이러한 소극적인 편집을 넘어서서 해당 구절의 과감한 삭제를 감행하였다. 기왕에성서번역의 원칙으로서 그리스어 용어들을 음역하는 등 그리스어 성서원 문을 최대한으로 존중하는 원칙을 보여주었던 로스는 요한복음 초판에서 시내산 사본(the Codex Sinaiticus)의 본문을 따라 ‘간음한 여인 이야기’를 삭제하였으며, 이는 주해를 첨가한 옥스퍼드 판의 원판인 웨스트코트(B. F. Westcott)와 호트(F. J. A. Hort)의 The New Testament in the Original Greek (1881)과 그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삭제의 결정은 특별히 이제 복음을 향하여 ‘새로운’ 선교지인 한국을 위하여 당대 최선의 성서번 역본을 제공하겠다는 로스의 학문적 노력과 선교사적 열정의 반영이라고 보여진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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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아펜젤러의 일기인 󰡔자유와 빛을 주소서󰡕, 필라델피아 전도 자모임 연설문인 “한국: 우리의 사역과 기회의 현장”, 󰡔H. G. 아펜젤러의 보고서󰡕, “설교집”, 그리고 사적인 기도문 등을 통하여 그의 교육선교를 고 찰하려는 데 목적을 둔다. 이 연구에서는 이 문헌들을 분석함으로써 아펜 젤러의 교육선교 정신과 구령사역(救靈使役)의 열정을 고찰할 것이다. 미국감리교선교회 소속 선교사 아펜젤러는 1885년 4월 5일에 제물포항 에 입항했다. 그러나 전도사역을 금하는 조선의 엄격한 국법 때문에 1885 년 내한한 이래로 복음전파를 통한 직접적인 전도방법을 모색하지 않았으 며, 대신 교육선교에 최선을 다해 투신했다. 아펜젤러가 자신의 교육선교 사역을 기반으로 보여준 중요한 논점들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그의 교육선교 사역 정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진실한 신앙고 백과 교육을 통해 복음을 전파하려는 순수한 열정 위에 전개되었다. 둘째, 그가 교육선교 사역에 임하게 된 동기는 다양했다. 그는 기독교를 불교와 유교, 샤머니즘과는 본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종교로 소개했으며, 복음에 입각하여 교육선교 사역을 수행함으로써 비기독교적인 윤리와 전 통들을 일소(一掃)하고자 했다. 셋째, 교육선교 방안을 깊이 숙고하여 매서인 공동체, 일본인 성경공부반, 벧엘예배소, 주일학교, 감리교 교리연구반, 속회활동, 신학반, 금요공부, 매일학교, 속회 등을 운영함으로써 다양한 체제의 교육을 실천했다. 넷째, 그는 소수의 소년들로 시작하여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취 지로 배재학당을 설립했으며 교육선교 사역을 기반으로 정동제일교회를 건립했다. 또한 초기의 여러 기독교서적들을 저술함으로써 문서선교를 확 립하는 일에 지대한 공헌을 남겼다. 그가 남긴 이러한 공적들은 교육선교 와 실천을 바탕으로 결실했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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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봉은 신자가 회개의 십자가와 체험의 십자가, 그리고 율법을 극복한 십자가와 자신과 세상을 매장한 십자가를 발견할 것을 늘 강조하였다. 그 리스도인의 신앙은 바로 십자가의 이런 단계적 체험을 통해 성장한다는 것 이다. 본고는 이성봉의 생애와 설교, 사역을 통해 나타난 그리스도의 십자 가의 도의 여러 단계들을 논하였다. 십자가 신앙은 이성봉의 설교사역에서 뿐만 아니라 생애 전 과정에서 적용되고 구현되었다. 그에게 십자가는 실 제였고 전체였다. 오늘날 십자가의 도가 “죄 용서”라는 기초적 수준에서 취급되는 하락한 교회 상황에서 이성봉은 십자가가 모든 것임을 말로써 삶 으로써 죽음으로써 보여주었다. 십자가는 인간 예수의 나약한 죽음만이 아 니었다. ‘사람의 아들’ 예수는 구속을 위한 심판의 제물로서 자신의 목숨을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드렸고 성령은 그분의 보혈을 취하여 살아 있는 피가 되게 하여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의의 증표가 되게 하셨다. ‘마지막 아담’으로서 예수는 십자가에서 자신의 육체로써 아담 안에 있는 모든 부 정적인 것들을 다 처리하셨다. 십자가는 우리의 육신도 끝냈고 자아도 종 결시켰고 세상도 종식시켰다. 이성봉의 사역이 진실로 가치 있고 회상 되 어야할 이유는 부흥사역의 횟수와 결과라는 단순한 외적 성취가 아니다. 십자가의 도로써 승리한 사역자였기 때문이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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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헌법 제20조는 “①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 ②국교 는 인정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한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그래 서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하지만 한국에 서 정치와 종교의 관계는 매우 복잡하며 심지어 모호하다. 기본적으로, 그 런 조항은 미국헌법의 절대적 영향 하에 만들어졌다. 그러나 1945년 이후 전개된 한국근대사의 혼돈 속에서, 그런 헌법조항에 근거한 정치와 종교의 관계는 지속적으로 불안정하고 문제가 많았다. 특히, 한국의 보수적 복음 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유동적인 정치적·종교적 환경에 따라 이 문제를 전략 적으로 다루어왔다. 이 논문은 1945년부터 2013년까지 보수적 복음주의자 들이 정교분리의 의미를 이해하고 재구성하며 그것에 적응해 온 복잡한 역 사를 추적하는데 목적을 둔다. 1945년부터 1960년까지, 한국교회는 정교분리에 대한 헌법의 규정과 상 관없이 기독교에 특혜를 베풀어준 정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예를 들어, 그 기간 동안 미군정은 미국선교사들의 조언에 따라서 한국개신교인 들이 다양한 정치영역에 참여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했다. 종교정책 면에서, 미군정은 다른 종교들을 배제한 채, 한국교회에게 많은 특혜를 베풀었다. 그런 특혜에 대한 자연스런 반응으로, 한국교회는 정부정책에 열정적으로 협조했다. 특히, 제1공화국에서 대통령선거 기간 동안, 한국교회는 감리교 장로이자 한국개신교에 대단히 우호적이었던 이승만을 거의 맹목 적으로 지지했다. 그 기간 동안, 한국교회는 정교분리의 의미를 정확히 이 해하지 못했다. 1961년부터 1986년까지, 한국은 군사독재기간을 통과했다. 그 동안, 한 국교회는 두 부분으로 분리되었다. 즉, 군사정부를 신실하게 지지했던 보 수주의자들과 그 정부에 저항했던 진보주의자들로 말이다. 그 결과, 독재 자들은 두 진영을 정부에 대한 그들의 태도에 따라 다르게 취급했다. 예를 들어, 군사정부는 보수교회들이 ‘액스플로 74’ 같은 일련의 대규모 집회들을 개최하고 ‘전군신자화운동’ 같은 전도활동을 전개할 수 있도록 후원함으로써, 이들이 빠르게 성장하는데 결정적 도움을 주었다. 이런 종교적 특 혜에 대한 반응으로, 보수적 기독교인들은 진보진영을 맹렬히 비난하면서 그 정권의 충실한 동맹자가 되었다. 하지만, 진보주의자들의 경우, 군사정 권에 저항한 것에 대해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1997년부터 2007년까지, 한국교회는 처음으로 정부와 부정적 관계를 맺게 되었다. 진보적 정부가 남북간의 적대적 관계를 개선하기 시작하고, 사립학교법 개정을 통해 기독교사립학교들의 부정을 개선하려고 노력하자, 한국교회는 반정부세력으로 돌변했다. 그들은 진보적 정부를 종북좌파세력 으로 규정하고 이 정부의 거의 모든 정책에 반대했다. 이 기간 동안, 교회 들은 정교분리에 대한 자신들의 해석을 수정했다. 그들은 이전에 종교가 정치에 참여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제는 종교가 자신의 정치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정치적 저항이 헌법 에 저촉되지 않는다고 믿으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들은 다음 정부를 위한 새로운 대통령 후보로 보다 보수적이고 친기독교적인 후보를 선출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최근에는 보수적 기독교인들이 이런 주제와 관련해서 정부와 이중적 태 도를 유지하는 것처럼 보였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여전히 친기독교적인 이명박 정부의 강력하고 신실한 후원자들이었다. 같은 정치적·경제적 신념 에 기초해서, 그들은 이 정부를 지속적으로 지지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적극적 정치참여가 정교분리라는 헌법조항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 했다. 그러나 때때로 그들은 동일한 정부가 타종교들, 특히 불교와 이슬람 에 대해 우호적 조치를 취하자 강력하게 저항하고 비판했다. 그들은 정부 의 그런 태도가 기독교를 배제한 채 다른 종교들에게 특혜를 베풀어 정교 분리의 원칙을 위반했다며 불법으로 규정한 것이다. 이처럼, 한국의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은 정부와 자신들의 관계에 따라 “정교분리”란 개념을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해왔다. 그들과 정부의 관계가 우호적이었을 때, 그들은 “정교분리”를 “종교가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 것” 으로 해석했다. 하지만 그들과 정부의 관계가 불편했을 때, 그들은 그런 이 해를 뒤집고 강력한 반정부세력이 되었다. 한편, 그들이 정부로부터 우호 적 지원을 받았을 때, 그들은 그런 특혜가 정교분리의 헌법적 조항을 위반 한 것이라고 해석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정부에 의해 차별을 받는다 고 느꼈을 때는 정부가 헌법을 위반한다고 주장하며 반정부적 투쟁에 나섰 다. 이토록, 한국에서 보수적 복음주의자들과 정교분리의 관계는 복잡했다.
7.
2016.04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연구는 후기 근대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이 혼재되어 있는 지금의 시 대에 어떻게 기독교가 사회 전반과 성도들의 삶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 을까에 대한 물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필자는 세속주의, 종교 다원주의, 상대주의, 개인주의, 물질만능주의,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의 도전과 물음 앞에서 현대 기독교가 무기력한 이유들 중에 하나가 신학과 실천, 학문과 사역, 그리고 교회와 세계 사이에서 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와 대화의 부족 에 있다고 확신한다. 근대 이전의 문화와 가치와 함께 근대의 문화와 가치가 혼재 되어 있었 던 영국의 계몽주의 시기에 존 웨슬리는 자신의 신학 방법론을 통해 기독 교의 핵심 가치인 ‘성결과 행복’을 추구 했다. 그는 당시의 세속화 되어가 는 문화와 사회에 함몰되지도 않았고 또한 당시의 문화와 사회를 배척하지 도 않았다. 웨슬리의 신학 방법론은 변화하는 시기였던 그 자신의 시대의 다양한 쟁점들에 대해 적절하게 대응하기 위한 그의 노력의 결과들 중에 하나였다. 그러한 까닭에 필자는 웨슬리의 경우를 통해서 후기 근대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양측의 도전들 속에 있는 현대 기독교의 문제들에 대한 해 결책을 발견하는데 중요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고 확신한다.이를 위해서 본 연구는 당시 세속 사회의 문화와 가치체계를 주도했던 영국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대표자 존 로크의 인식론과 그에 대한 대응으로 서의 존 웨슬리 신학의 연구 방법론에 대해 고찰한다. 또한 이 고찰은 행 복에 대한 관점으로 인간의 삶의 궁극적 목적을 설명하고 있는 행복론 (eudemonism)적 측면에서 그들의 인식론 체계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행복의 본질에 대한 그들 각자의 관점의 조사도 병행한다. 여기서 특별히 필자는 존 웨슬리의 신학 방법론 속에 있는 공동체 내에서뿐만이 아니라 기독교의 타 전통 그리고 세속 사회와의 대화에 대한 개방성에 독자들이 관심을 가져 줄 것을 요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