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받은 신자는 창조세계를 선물로 받는다”라는 말은, 루터 학자 게르하르트 포드(Gerhard Forde)가 루터가 종교개혁적 혁파에서 얻은 새로운 신학적, 윤리적 인식을 훌륭하게 응축한 것이다. 하나님 은혜에 의한 구원은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보는 긍정적 관점을 제공하고, 그 속에서의 삶을 은총의 선물이자 책임적 소명으로 환원시킬 동기와 동력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루터는 하나님의 창조세계 속에서 신자의 삶이란,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으로 피조물로서의 일상적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보았다. 창조세계 자체와 그 속에서의 신자의 일상생활을 긍정적으로 본 것이다. 중세 가톨릭 교회가 창조세계 속 일상적 삶을 경시한 데 비해, 루터는 이 땅에서 신앙으로 하는 모든 일을 영적인 일로 여겼다. 창조세계 속에서의 세 가지 삶의 형태인 교회, 가정, 국가에서의 직분을 신앙으로 감당하는 것을 하나님께 대한 예배이자 신자의 소명으로 보았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두 왕국에서 개인 윤리와 공적 윤리를 바르게 구분하고 적절히 적용하면서, 자신의 직분을 통해 소명을 다할 때 사회는 더 나은 방향으로 개선될 수 있음을 가르쳤다.
본 연구는 1521-22년 비텐베르크에서 일어난 칼슈타트와 루터의 논쟁을 분석하고, 이러한 갈등을 어떤 관점에서 해석해야 하는지, 그리고 이 논쟁의 근본적 원인이 무엇인지를 고찰하는 시도이다. 이를 위해 필자는 먼저 1521-22년 비텐베르크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 간략하게 소개한 후, 칼슈타트의 「성상의 제거에 관하여」(1522년 1월)와 루터의 「사순절 설교」(1522년 3월)를 중심으로 두 사람의 논쟁의 핵심 내용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얼마 후 또 다시 이어진 칼슈타트의「개혁을 천천히 진행해야 하는가?」(1524년 11월)에 나타난 루터에 대한 비판과 루터의 「천상의 예언자들 에 반대하여」(1525년)에 드러난 칼슈타트에 대한 논박을 검토하였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루터가 이 논쟁에서 보수적인 입장으로 선회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질문하고 개연성 있는 대답들을 제안하였다.
지금까지 두 사람의 갈등의 핵심적 원인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었다. 개혁의 속도와 방법을 둘러싼 전략적 차이였다는 주장, 칭의를 강조하는 루터와 중생을 강조하는 칼슈타트의 신학적 차이였다는 주장, 그리스도인의 영성형성의 방식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 등이 두 사람의 불일치의 원인으로 제시되었다. 그렇지만 필자는 그런 여러 가지 차이점도 중요하지만 더 기본적으로는 종교개혁의 대의를 지키기 위해 작센 선제후의 입장에 맞추려는 루터의 보수적 입장으로의 변화가 두 사람의 논쟁의 밑바닥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칼슈타트가 이상주의자였다면, 루터는 현실주의자였다. 칼슈타트가 원칙을 지키고자 했다면, 루터는 정치적 판단을 내리고자 하였다. 종교개혁 초기 루터와 칼슈타트의 논쟁은 오늘의 교회개혁을 위한 통찰력을 제시해 줄뿐만 아니라 개혁을 위한 논리의 근거와 자료를 풍부하게 제공해 줄 것이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와 마찬가지로 존 웨슬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의 기준이 된 것은 양심과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그 양심은 자연적인 양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행적 은총으로서의 양심이다. 존 웨슬리는 이 모든 양심의 기능에 ‘성령의 기름부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것이 없다면 우리 자신의 삶과 기질을 분간할 수 없고, 우리가 행할 기준도 알 수 없으며, 양심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도 없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는 인간이 궁극적으로 자신의 정당함을 인정받는 것은 인간의 법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최후 심판임을 잊지 않았다. 영국 국교회의 아들이며, 완고한 고교회주의자였던 존 웨슬리는 올더스게잇(Aldersgate)과 송구영신 철야예배에서의 성령의 집단적인 체험을 한 이후 영국 국교회의 무기력과 타락에 대한 각성과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는 자신이 속한 국교회에 대해서 이론적으론 이상적인 교회로 생각했지만, 현실적으론 다른 교회와 마찬가지로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후로 관영한 ‘불의의 신비’의 지배하에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이중적인 상황이 존웨슬리가 자신의 신앙 양심과 현실적인 교회의 법 사이에서 갈등하며 딜레마를 겪게 한 주 요인이었다. 그는 자신의 메소디스트 신도회가 불법적인 비밀집회로 간주되어 공격을 받는 것에 개의치 않고 계속적으로 신도회를 확대해 나갔지만, 결국은 신도회 회원들을 보호하고 더 많은 회심자들을 얻기 위해 자신의 채플을 마치 비국교도의 모임처럼 법적으로 등록하여 허가를 받음으로, 양심의 자유가 침해되는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목사(사제) 안수 문제에서는 다른 결단을 내렸다. 미국 독립이라는 외적인 상황의 변화로 그는 목자 없이 유리하는 아메리카의 양들을 위해 미국 선교를 위한 목사(사제) 안수를 감행한 것이다. 존 웨슬리로 하여금 이러한 경계선을 넘게 한 원동력은 그의 신앙 양심과 하나님의 말씀이었으며, 무엇보다 자신의 진실을 드러내는곳은 세상의 법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최후 심판대라는 그의 확고한 믿음이었다.
중국의 “예수가정”은 1921년에 시작해 1952년에 해체된 농촌사회의 기독교 공동체이다. 설립자 징디엔잉(敬奠瀛, 1890-1957)은 농민출신으로 감리교 학교를 다니다가 오순절 성령운동의 영향을 받고 샨둥(山东)성 타이안(泰安)마좡(马庄)농촌마을에서 기독교 공동체를 시작했다. “예수가정”은 비록 1952년에 해체된 공동체이기는 하지만, 중국사회의 토양 위에 기독교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예수가정”은 1920년대 토착교회의 흐름에 잘 적응해 농촌사회에서 기독교 공동체의 모습을 발전시켜 나갔다. 전쟁과 자연재해의 황폐함 속에서 사람들에게 피난처로서의 안식을 제공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런 외부적인 환경은 “예수가정”이 발전할 수 있는 원인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 “예수가정”이 유지하려는 정신적 유산을 결정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예수가정”은 경제적으로 전 재산의 기부를 통해 사유재산을 없애고 공유재산과 평균주의 원칙을 실시했다. 그리고 이런 경제적 요인에 따라 전통적 혈연중심의 가정을 해체하고 집단거주에 의한 “예수가정”만의 새로운 비혈연중심의 가정제도를 만들어 갔다. “예수가정”은 또한 가장제를 통해 그 질서를 세워나갔는데, 이것은 동아시아 문화의 특성을 반영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예수가정”은 성령운동의 영향을 받은 공동체로 성령충만을 강조했으며 금욕주의적 삶을 생활 속에 실천했다. 특별히 농촌문화를 적극적으로 기독교적 관점에서 수용해 기독교 공동체의 문화로 만드는 모습을 보여줬다. 신비주의적인 영적 특성뿐만 아니라 찬송가 등이 이런 영향 하에서 만들어졌다. 농촌사회에 적응하려는 모습으로 서구인에 의해 이식된 기독교가 아니라 중국인 스스로에 의한 기독교 공동체 건설이라는 특성을 지닌다. “예수가정”연구를 통해 우리는 피안의 세계를 지향하는 종교와 차안의 현실세계가 어떻게 결합해 나가며 더욱이 외래종교로서 기독교가 중국인의 삶 속에 어떻게 결합될 수 있는지를 이들 “예수가정”의 공동체의 생활 속에서 그 의의를 발견한다.
본 연구는 1905년에 발행된 「부활쥬일례」를 고찰함으로써 ‘찬송’, ‘성경본문’, ‘문답’을 중심으로 예전전통과 교훈을 살펴보는 데 목적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은 기독교의 핵심적 복음이며, 그리스도인들은 매년 부활주일에 주님의 부활을 기념한다. 이 부활절 예배에 관한 독특한 사료는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절에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가장 고전적인 지침서이다. 한국교회는 이 소중한 문헌이 담고 있는 예전적 유산과 교훈을 후세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전수해주어야 할 필요가 있다.
제2장에서는 ‘찬송’, ‘성경본문’, ‘문답’ 사이의 상호 유기적(有機的)인 밀접한 관련성에 대해 다루었다.
제3장에서는 ‘문답’을 중심으로 문답의 각 항목에 내재된 함축적인 의미들을 분석하였으며 이 분석 작업을 위해 ‘히스토리에’와 ‘게시히테’의 양면적 관점에 초점을 맞추어 다양한 교훈들을 고찰하였다.
제4장에서는 의미심장한 예전적 개념들을 고찰함으로써 오늘날 부활절 예배를 위한 네 가지의 유익한 방안들을 제시하였다.
부연하여, 이 연구가 향후 ‘신앙교육을 위한 문답식 토론회’, ‘공동체 신앙의 회복’, ‘주일성수’, ‘예배갱신의 방향’, ‘절기예배의 개혁적 패러다임’, 교파별 부활절 예배 비교연구‘ 등과 같은 예전적 실천분야 탐구로 확장되어지기를 기대해본다.
이 논문은 한국장로교회 동사목사의 기원과 제도적 확립 및 확장과정, 폐지에 이르는 역사적인 과정을 연구한 것이다.
동사목사라는 직제는 미국장로교회의 영향으로 1909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3회 노회에서 8명의 한국인 목사를 선교사와 함께 일하는 동사목사로 임명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후 이 직제는 제도적 확립과 확장 과정을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확대 시행되어 1914년 제3회 총회에서 목사를 위임목사, 임시목사, 위임동사목사, 임시동사목사로 구분했으며, 1917년 제6회 총회에서는 목사를 칭호에 따라 다양하게 구분하고, 1929년 제18회 총회에서 헌법 중 정치 제4장 4조에 목사칭호 조항을 추가함으로서 동사목사의 제도적 확립을 완결했다. 목회 현장에서는 선교사와 한국인 동사목사 뿐만 아니라 1920년대를 전후해서는 한국인 위임목사와 한국인 동사목사가 함께 목회하는 형태로 발전했다. 이후에는 한국인 위임목사와 위임동사목사, 한국인 위임목사와 임시동사목사가 목회하는 형태로 세분화 되었다.
동사목사 직제는 한국장로교회 안에서 공동목회를 통한 협동적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을 했는데, 이와 같은 직제가 해방 이후에도 긍정적인 역할을 하면서 지속된 것을 보여주는 사례가 영락교회에서 한경직과 강신명이 위임목사와 동사목사로 공동목회를 한 경우다.
그러나 동사목사 직제는 1955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0회 총회에서 부목사 직제를 신설하면서 폐지되었다. 이런 결정은 동사목사 직제의 역사적 공헌을 간과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결국 동사목사의 폐지와 부목사의 신설은 공동목회를 통한 협동적 지도력 대신에 위임목사 중심의 단일지도체제로의 변화를 가속화시키는 전환점이 되었다.
일본의 개신교회가 식민지 조선에 존재했었다는 사실은 한국이나 일본의 기독교 사학자들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았거나 혹은 무시되어 왔다. 조선에 살았던 일본인 기독교인들의 활동과 행동, 사상, 조선인 기독교인들과 어떤 관계를 맺었는가 하는 문제는 일본의 기독교, 일본의 종교 정책,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기독교를 이해하는 데에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점을 드러낸다. 그들 스스로의 인식 여부와 상관없이 일본인 기독교인들은 식민지주의 및 기독교의 행위자였던 것이다. 이러한 문제에 답을 찾기 위해서 본고는 '일본기독교회'(日本基督教会)의 활동에 의해 식민지 조선에 세워진 교회를 특정하였다. 일본기독교회가 발간한 신문 및 출판물,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다른 문헌과 정황을 검토하여 필자는 조선에서의 일본기독교회가 어떻게 시작되고 진행되었으며, 또한 그 대부분이 일본인 식민자들의 교회였을 뿐, 함께 사는 조선인들의 '이웃'이 되지는 못했음을 드러내고자 한다. 황민화 정책이 강화되었을 때 조선과 일본의 기독교는 연합하고 이후로 통합이 되어 일본의 패전까지 지속되었다. 한편 일본인 기독교인들이 남긴 재산의 일부는 몇몇 조선의 교회가 설립되는데 토대가 되었다.
이 논문은 1930년 이전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이 개혁신학이 아니라 복음주의신학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되었다. 이 논문에서 복음주의의 특징을 세 가지로 핵심요소로 규정한다. 그것은 성서, 회심체험, 영적인 생활의 변화이다. 1930년 이전으로 시대를 한정한 이유는 1930년 이후 신학이 분화되기 때문이다.
장로교와 감리교는 선교초기부터 예배공동체, 성경번역, 순회전도를 함께 했는데, 이런 연합사역이 가능했던 것은 복음주의신학이라는 공유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1907년 대부흥운동은 성서를 통한 사경회를 기초로, 기도를 통한 체험,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은혜 받은 자의 새로운 생활을 통한 도덕성이라는 복음주의신학의 모습이 나타난다. 이런 성서, 회심체험, 영적인 생활의 변화는 한국교회신학을 복음주의 전통으로 견고하게 뿌리 내리게 한다.
1907년 한국장로교회는 4개 선교부가 하나의 장로교 치리회인 독노회를 조직한다. 이때 채택한 대한장로교회신경은 장로교회와 감리교의 연합정신과 복음주의신학의 산물임을 통해서 초기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이 개혁신학이 아니라 복음주의신학임을 다시 한 번 규명하게 된다.
한국장로교회 신학이 개혁신학이라면 신학교와 학계에서 칼뱅에 대한 교과과정이나 연구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교과과정과 칼뱅연구를 보면 교과과정은 성경중심이며, 칼뱅연구사에서 1930년 이전까지는 이에 대한 깊은 연구는 없음을 알 수 있다. 한국장로교회의 복음주의 영성은 개인구원과 체험을 강조한다. 즉 부흥적 특성으로 인간의 감정을 강조한다. 그러나 개혁신학은 그렇지 않다. 복음주의는 개인구원, 개인윤리, 사회관심으로 자연스럽게 발전되어간다.
이 글은 마삼락(馬三樂, Samuel Hugh Moffett)의 역사 이해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마삼락은 마포삼열(Samuel A. Moffett)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평양외국인학교, 휘튼 대학교,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1945년 예일 대학교에서 라투레트(Kenneth Latourette)의 지도로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그는 복음적 에큐메니즘의 입장에서 복음전도, 교회연합, 사회참여를 융합하여 우선주의와 축소주의에 빠지지 않는 구조를 만든다. 교회가 자기봉쇄의 경향을 강화하면 세상에서 게토화 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그는 은둔주의자 타티안(Tatian)과 혼합주의자 바르다이산(Bardaisan)을 대조하며 초기 아시아 역사를 연구한다. 문화의 접근 모델로는 산 위의 은자, 도시의 감독, 학교의 교사, 기독교 게토의 족장을 제시하고, 본보기로는 땅 끝으로 나가는 선교사를 제안한다. 그의 선교신학은 선교의 중심과 변두리, 교회와 세상, 연합과 선교, 내부와 외부, 서양과 동양이 구분되는 경계를 강조하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을 강조한다. 그는 아시아 교회의 성공과 실패의 요인들을 역사적으로 분석하고, 네스토리안 선교 또는 경교(景敎)를 연구하면서 교회는 이념과 권력과의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회는 연합하고 선교하는 사명을 회복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그는 서양에서 기독교가 시작되었다는 역사의 왜곡을 지적하고 아시아 중심의 교회역사를 서술하면서 동양과 서양의 교회역사는 서로 배워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배은희 목사는 대한제국 말기에 기독교로 개종하여 숭덕학교를 운영하다 한일합병당시에 투옥되는 경험을 하였다. 이 투옥의 경험이 그의 독립운동의 씨앗이 되었다. 그는 3.1운동에 가담하였고 1919년 10월에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장로교 목회자 중심의 독립운동 조직인 대한국민회에 평의원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1921년부터 전주 서문외교회에서 사역을 하면서 유치원, 숭덕학교, 여성야학을 운영하였고 1927년 전주 신간회 회장을 하였으며, 1929년부터는 독신자선교회와 협동조합운동을 통해 농촌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할 때 반대하다 투옥당하기도 하였다.
해방 후 그는 전주에서 임시시국대책위원회와 전주청년단을 조직하여 치안유지활동을 하였다. 그는 12월 28일 이후 반탁운동이 벌어지자 전주를 중심으로 이승만이 조직했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지부들을 조직하여 반탁운동에 참여하였고, 1946년 1월 13일에 전북지부를 조직하였다. 전북대표로 활동하며 2월 8일에 독촉국민회가 조직될 때 5명의 고문 아래 있는 18명으로 구성된 참여의 구성원이 되었다. 그는 독촉국민회에 가담한 이후에 이승만의 반탁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고 1947년 10월에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1947년 7월에는 이승만의 승인을 받아 민족대표자대회를 조직하였고 김구의 비상국민회의와 통합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비상국민회의는 임정의 법통론을 주장하였던 반면에 민족대표자회의는 총선거를 통한 정부수립을 주장하여 통합에 실패하였다. 통합에 난항을 겪자 민족대표자대회와 독촉국민회가 연합하여 총선거를 통한 정부수립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나섰고, 배은희는 총선거 실시를 위한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다. 배은희는 총선거를 통한 정부수립운동을 추진했던 이승만의 정책에 독촉국민회와 민족대표자대회를 통해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목회자였다.
본 논문은 해방 후 남한의 정치·경제·사회적인 시대상황에 따라, 다양한 통일론에 대한 조사와 개관 그리고 평가를 그 내용으로 하며, 그 가운데서 기독교인들의 참여를 추적한다. 특히 죽산 조봉암을 중심으로 한 평화통일론의 배경과 의의를 살피고 있다. 한국 기독교는 대체로 38선 철폐운동, 미군철수반대운동, 그리고 한국전쟁 중에 휴전반대운동과 북진통일론을 전개하여 왔다. 이러한 통일론은 한국사회의 전쟁경험으로 인한 것이었지만, 이로 인해 이승만의 독재를 용인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한편 기독교에는 또 다른 통일담론 즉 평화통일론의 흐름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조봉암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시기적으로 너무 앞서고, 아직은 무르익지 않은 섣부름도 있었지만, 그가 간첩으로 오인 받고, 목숨을 잃으면서까지 소리높인 평화통일이라는 구호는 이후 진보적인 기독교인들과 정치인들의 목소리로 발전하였다.
해방 후 기독교가 남한에서의 통일담론 발전에 있어서 다양한 구조와 논의를 전개하였고, 그 결과 일정한 사회 통합의 역할을 하였음을 밝히기 위하여 본 논문은 각 종 신문과 전기 및 선언서 등을 참조할 것이다. 아울러 신학적인 입장이 아니라, 교회의 사회적인 활동을 중심으로 살피는 종교사회학의 방법을 차용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현대 한국사회에서 기독교의 역할을 특별하게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본 논문은 남·북한의 평화노력에 대한 그 근원적이고 역사적인 배경을 찾는 과정이다. 아무쪼록 "서로를 이해하는 노력이 왜 필요한지? 그리고 잘못되었을 때의 폐해는 무엇인지? 아울러 어떻게 그 노력을 성취할지?"를 묻는 첫 걸음이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