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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색결과 6

        1.
        2020.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에른스트 파베르(Ernst Faber, 1839-1899, 중국명: 花之安)는 독일 선교 사로서 중국선교에 일생을 바친 인물이다. 그의 대표적 중문 저서인 󰡔자서 조동󰡕(1884)과 󰡔경학불염정󰡕(1898)은 19세기 동양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준 서적으로 당시 유교 사회의 형식주의를 지적하며 기독교 선교의 길을 제시했다. 본 연구는 그의 이 두 저서에 기초해 어떻게 격물치지를 이해해 나가는지 고찰했다. 특히 그는 격물치지에서 사물마다 궁리하는 과정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이런 궁리가 인식 주체인 인간의 마음을 추구하는 길로 나가야 한다고 보았다. 즉 격물은 마음을 정미하게 해 자세히 살피는 것으로, 이런 마음을 찾아 나가는 길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길이라고 보았 다. 오직 하나님만이 천하의 참 주인으로 이를 섬길 때 인간 마음의 지혜 가 격물의 길로 나갈 수 있다. 본 연구는 파베르가 격물치지에 대한 기독 교적 해석을 통해 중국 전통의 태극, 리를 하나님의 종처럼 그 창조와 주 재 시에 사용하는 도구로 보고자 함을 고찰했다. 분명, 파베르는 선교적 관점에서 하나님의 절대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런 태극, 리를 폐기하기보다 이를 하나님의 창조물로 보는 기독교적 관점을 견지했다고 볼 수 있다. 이 를 통해 19세기 기독교와 유교의 또 다른 대화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2.
        2020.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존 프라이어(John Fryer, 1839-1928, 중국명 傅兰雅)는 평신도 선교사로 중국에 와 홍콩 성바울서원, 경사동문관 그리고 상하이 영화서원을 거치면서 교육 선교에 전념했다. 그러나 영국성공회 선교부와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일반 선교사의 길과는 다르게 과학 전파에 전념하게 된다. 주로 강남제 조국, 『격치휘편』, 격치서원 그리고 익지서회를 통한 과학교과서 출간 등 서방 과학문명의 전파를 통한 중국의 근대화를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과학 전파만이 아니라 종교와 과학의 적절한 결합을 통해 종교로서 기독교가 중국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할 지 궁구했다. 비록 과학지식의 보급 현장에선 종교와 과학의 철저한 분리를 견지했지만, 종교는 정신적이며 도덕적인 영역에서 위기의 중국을 구원할 역량의 원천으로 삼고자 했다. 이에 프라이어는 독특한 자신의 길을 모색해 종교와 과학의 균형을 통 한 중국사회의 변천과정에서 기독교가 미칠 영향을 늘 기대했다. 그는 선교사이며 동시에 과학 전파자였다.
        3.
        2018.08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중국의 “예수가정”은 1921년에 시작해 1952년에 해체된 농촌사회의 기독교 공동체이다. 설립자 징디엔잉(敬奠瀛, 1890-1957)은 농민출신으로 감리교 학교를 다니다가 오순절 성령운동의 영향을 받고 샨둥(山东)성 타이안(泰安)마좡(马庄)농촌마을에서 기독교 공동체를 시작했다. “예수가정”은 비록 1952년에 해체된 공동체이기는 하지만, 중국사회의 토양 위에 기독교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예수가정”은 1920년대 토착교회의 흐름에 잘 적응해 농촌사회에서 기독교 공동체의 모습을 발전시켜 나갔다. 전쟁과 자연재해의 황폐함 속에서 사람들에게 피난처로서의 안식을 제공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런 외부적인 환경은 “예수가정”이 발전할 수 있는 원인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 “예수가정”이 유지하려는 정신적 유산을 결정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예수가정”은 경제적으로 전 재산의 기부를 통해 사유재산을 없애고 공유재산과 평균주의 원칙을 실시했다. 그리고 이런 경제적 요인에 따라 전통적 혈연중심의 가정을 해체하고 집단거주에 의한 “예수가정”만의 새로운 비혈연중심의 가정제도를 만들어 갔다. “예수가정”은 또한 가장제를 통해 그 질서를 세워나갔는데, 이것은 동아시아 문화의 특성을 반영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예수가정”은 성령운동의 영향을 받은 공동체로 성령충만을 강조했으며 금욕주의적 삶을 생활 속에 실천했다. 특별히 농촌문화를 적극적으로 기독교적 관점에서 수용해 기독교 공동체의 문화로 만드는 모습을 보여줬다. 신비주의적인 영적 특성뿐만 아니라 찬송가 등이 이런 영향 하에서 만들어졌다. 농촌사회에 적응하려는 모습으로 서구인에 의해 이식된 기독교가 아니라 중국인 스스로에 의한 기독교 공동체 건설이라는 특성을 지닌다. “예수가정”연구를 통해 우리는 피안의 세계를 지향하는 종교와 차안의 현실세계가 어떻게 결합해 나가며 더욱이 외래종교로서 기독교가 중국인의 삶 속에 어떻게 결합될 수 있는지를 이들 “예수가정”의 공동체의 생활 속에서 그 의의를 발견한다.
        4.
        2016.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프랭클린 올링거(Franklin Ohlinger,중국명:武林吉)는 미북감리교 (Methodist Episcopal Mission, 여기서 M.E.M의 중국식 표현으로 미이미회 (美以美會)라 지칭했다.) 소속 선교사로서 한국선교의 초기 북감리교 선교 정책에 영향을 미칠 뿐 만 아니라 문서선교로도 평가되는 인물이다. 그의 짧은 한국선교(1887-1893), 5년8개월의 시기에 비추어 그의 사역을 평가하 는 면도 있겠지만 그의 생애 대부분을 차지했던 중국선교(1870-1887, 1895-1911)에 대한 연구는 한국기독교사연구에 올링거를 통전적으로 이해 하는 기초라고 볼 수 있다. 이에 필자는 그가 한국선교를 시작하기 전 18 년동안 중국 복주(福州,Fuzhou)에서 활동한 사역에 초점을 맞추어 그를 다 시 평가하고자 한다. 북감리교의 복주선교를 통해 직접적인 선교뿐만 아니 라 출판과 교육에 중점을 두고자 한 선교정책을 이해해 보며, 올링거와 뗄 수 없는 영화서원의 성립 등을 통해 그의 교육선교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 를 풀어가고자 한다. 특히, 영화서원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중∙영문 이중언 어교육 논쟁을 통해 당시 선교와 교육의 문제에 대한 북감리교 선교사들의 목소리를 경청해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선교사들은 전문적인 영어교육이 중국신도의 자존감을 고양시킬 뿐만 아니라 현지기독교인과 함께 만들어 가는 선교이양의 문제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길이라고 여겼다. 반면 이와 다르게 영어교육이 선교의 세속화를 촉진할 뿐만 아니라 물질주 의적인 취향이 농후한 중국신도가 신앙문제보다 영어를 통한 직업적 성공 에 더 몰두할 수 있다고 여겨 영어교육을 선교의 장애물로 보고 염려했다. 이점은 분명 올링거의 영화서원 이중언어교육에서 발단이 된 것으로 올링 거 이해의 중요한 기초가 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5.
        2014.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논문은 중국기독교 역사 속에서 정통과 이단의 문제를 성경 God의 중문번역명에서 발생한 논쟁들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 문제는 명말청초의 천주교에서도 조상숭배와 공자숭배와 더불어 “전례논쟁(礼仪之争)”의 한 축으로 당시 천주교선교사들의 중국선교 현장에서 문화적응적 입장 또는 중국문화를 이교문화로 규정하고 이를 배척 또는 개화하려는 입장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본문은 이 논쟁의 연장선에서 특히 개신교 중국선교 중 많은 서방선교사들이 참여한 영문저널 The Chinese Recorder 를 중심으로 이 논쟁을 전개했다. 이 속에서 우리는 선교사들의 서방전통 또는 성서전통으로 구분되는 의식의 차이와 중국문화 특히 ‘상제’, ‘신’ 이 단어들이 갖는 의미의 차이, 그리고 중국종교 등에 대한 관점차이와 선교대상인 중국신도에 대한 이해, 서로 다른 선교지역 이해 등의 원인 때문에 좀처럼 종식되지 않는 논쟁을 전개했음을 고찰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충돌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들이 논쟁을 통해 얻어진 경험과 중문번역명의 직접적 사용자인 중국신도들의 성장을 주목하면서 전대와는 다른 새로운 입장을 찾아나가며 이를 통해 상호 이해와 일치의 길로 나아가려고 노력했음을 살펴볼 수 있다. 분명 용어문제(Term Question)는 단순한 명사논쟁이 아니라 사상간의 실제적인 교류를 의미하는 논쟁이다. 이 때문에 각각의 역명(용어) 안에 내재되어 있는 다양한 함의들을 파악하고 중국언어가 가지고 있는 복잡성과 지역적 차이성 그리고 역사적 변천 등을 심도 있게 연구한다면 충돌처럼 보일 수 있는 논쟁의 현장에서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으며 더욱 자신의 관점을 수정할 수 있는 넓은 시야를 얻을 것이다. 우리가 The Chinese Recorder 를 통해 얻은 관점은 바로 이를 실천하는 첫걸음일 것이다. 자신의 입장을 고집해 성서의 God을 전달할 방법이 한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방법에 의해 전달할 수 있음을 즉 번역 속에 수많은 타협과 다원성이 공존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6.
        2014.05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19세기 중국개신교의 중국종교에 대한 이해는 사실 그 제국주의적인 선교관점에서 시작되었다. 서방선교사들은 중국종교를 이교문화로 규정하고 중국인을 개화시켜야할 선교적 대상으로 바라다보았다. 그러나 중국문화의 강렬한 반기독교적 정서를 체감하면서 선교사들은 본질적인 면에서 다시금 중국종교를 이해하게 되었다. 이런 이해는 중국인의 종교정서 등을 발견하게 했고 보다 복음이 중국문화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이와 더불어 중국신도는 자신의 고유한 토대문화 위에서 기독교를 수용하려고 노력하면서 좀더 적극적인 중국종교에 대한 이해를 개진시켜 나갔다. 우리는 19세기 중국개신교의 노력을 통해 오늘날 단편적인 자신의 이해를 넘어 복음전도를 위해 폭넓은 자신의 이해의 지평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