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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敎會史學會誌 KCI 등재 한국교회사학회지 JCHS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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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호

제57집 (2020년 12월) 8

1.
2020.12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의 목적은 동서교류문헌으로서 교리교육서(catechism)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동아시아 선교 상황에서 새롭게 작성된 예수회 순찰사 발리냐노 (Alessandro Valignano 范禮安)의 《그리스도교 신앙 교리교육서》(Catechismus Christianae Fidei, 1586)를 분석하는 것이다. 이 연구는 먼저 교리교육서라 는 장르의 시대적 배경을 연구하고(II), 발리냐노의 교리교육서의 그리스도 교 변증 신학을 규명하고(III), 중국 선교사 루제리(Michele Ruggieri 羅明 堅)의 《신적인 일들의 설명》(Vera et Brevis Divinarum Rerum Expositio, 1582)와 비교하여 특징을 밝힌다. 발리냐노의 일본 종교와 문화 비판과 그 리스도교 변증은 이성적 논증과 신앙적 진술로 이루어지며, 그의 변증신학 은 만물의 창조자와 통치자, 구원자인 하나의 근원자 개념과 영혼의 영적 실체, 불사불멸, 내세의 보상과 형벌을 강조했으며, 작용인, 영적 형상, 실 체적 형상, 네 원소, 질료와 형상 등 철학 개념을 활용하여 그리스도교를 변증했다. 이러한 점에서 발리냐노의 교리교육서는 동서교류의 상황에서 교리교육서가 새롭게 발전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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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로마 사두체제(주후 303년〜311년)가 기독교를 박해하게 된 원인을 통해 로마 제국과 기독교의 관계를 연구한 것이다. 본 논문에서는 지금까지 연구된 박해의 원인을 기초로 하여 로마의 전통적인 종교관과 사 두체제의 기독교 박해의 관계를 찾을 수 있었다. 그 결과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도출할 수 있었다. 사두체제에서의 박해는 첫째로, 전통 종교에 대한 로마 사회의 절대적인 믿음이 기독교를 박해하는데 다양한 원인의 기초였다는 점이다. 둘째로, 로마의 황제들도 종교를 정치의 정책으로 이용했고, 통치의 방법으로 활용 했다. 그러나 그들이 종교를 단순히 통치의 방법으로서 활용한 것에 그치 지 않았고, 그들에게 종교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었다는 점을 찾을 수 있었다. 셋째로, 로마 사두체제의 기독교 박해는 종교관에서 뿐 아니라 사 상적, 철학적인 지지를 받아 실행했다는 점도 발견할 수 있었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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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중세의 분파들에 대한 이해가 과거의 판단과 평가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고 그들에 대한 새로운 역사적 평가가 여전히 미흡하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특히 기독교의 초기 역사로 거슬러 올라가 정통과 이단의 개념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살펴본 다음 중세 분파 운동을 크게 두 가지 전통(이원론적 전통과 교회개혁 전통)으로 나누어서 그 사상적 기 원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더 나아가 이러한 비주류 전통에 대한 교회의 대응에 대해 성찰하고 그들이 기독교 역사에 끼친 영향(impact)을 살펴봄 으로써 중세 분파들에 대한 연구가 중세교회사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한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다름’의 문제는 있어서는 안 되는 문제가 아니라 받아들여야 할 현실이라 는 사실과 그것이 오히려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해를 더 깊게 하고 그것을 통해 ‘우리’를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임을 말하고자 한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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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파베르(Ernst Faber, 1839-1899, 중국명: 花之安)는 독일 선교 사로서 중국선교에 일생을 바친 인물이다. 그의 대표적 중문 저서인 󰡔자서 조동󰡕(1884)과 󰡔경학불염정󰡕(1898)은 19세기 동양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준 서적으로 당시 유교 사회의 형식주의를 지적하며 기독교 선교의 길을 제시했다. 본 연구는 그의 이 두 저서에 기초해 어떻게 격물치지를 이해해 나가는지 고찰했다. 특히 그는 격물치지에서 사물마다 궁리하는 과정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이런 궁리가 인식 주체인 인간의 마음을 추구하는 길로 나가야 한다고 보았다. 즉 격물은 마음을 정미하게 해 자세히 살피는 것으로, 이런 마음을 찾아 나가는 길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길이라고 보았 다. 오직 하나님만이 천하의 참 주인으로 이를 섬길 때 인간 마음의 지혜 가 격물의 길로 나갈 수 있다. 본 연구는 파베르가 격물치지에 대한 기독 교적 해석을 통해 중국 전통의 태극, 리를 하나님의 종처럼 그 창조와 주 재 시에 사용하는 도구로 보고자 함을 고찰했다. 분명, 파베르는 선교적 관점에서 하나님의 절대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런 태극, 리를 폐기하기보다 이를 하나님의 창조물로 보는 기독교적 관점을 견지했다고 볼 수 있다. 이 를 통해 19세기 기독교와 유교의 또 다른 대화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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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컨택트의 문제는 결국 공간의 문제와 연결된다. 코로나19로 성큼 다 가온 언컨택트 시대에 교회는 공간의 문제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 이 논문 에서는 플라톤의 코라(chora)로서의 공간 개념을 통해 알렉산드리아의 감 독 아타나시오스의 공간이해를 탐구하고자 한다. 특히 아타나시오스가 쓴 󰡔성안토니의 생애󰡕는 초기 교회의 공간이해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 다. 따라서 이 논문은 플라톤의 코라(공간) 개념을 바탕으로 아타나시오스 가 쓴 󰡔성안토니의 생애󰡕에 나타난 공간의 본질과 기능을 논구할 것이다. 플라톤의 코라는 사물과 형상 사이에 있고, 데미우르고스가 형상에 따라 사물을 만드는 공간이다. 플라톤의 코라로서 공간은 텅 빈 공간이 아니라 아직 형태나 성질이 확정되지 않은 혼돈의 상태로 물질들이 미래에 형성될 힘(dynamis)인 가능성이다. 이러한 코라로서 공간은 공간적 측면과 구성적 측면을 함께 지니고 있다. 그런데 아타나시오스는 On the Incarnation에서 플라톤 의 코라의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다. 󰡔성안토니의 생애󰡕에 나타난 사막 공간은 안토니오스 자신이 자신의 깊 은 내면을 직시하는 공간이었고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는 순수한 공간이 었다. 안토니오스의 생애에 나타난 공간의 역할과 기능은 첫째, 자아와 욕망이 드러나는 공간이었다. 안토니오스의 공간은 자기의 기억, 욕망의 실 체를 만나는 자리였다. 그리고 외부의 힘이었던 사탄의 실체가 무엇인지 여실히 드러나는 곳이었다. 코라의 공간은 자기 폭로의 공간, 완전한 타자 를 경험하는 공간, 진정한 자신으로 다시 태어나는 공간이다. 둘째, 안토니 오스는 이 공간에서 자아를 통합하고, 자기 변화를 경험했다. 안토니오스 는 코라의 공간에서 슬픔, 쾌락, 기쁨, 낙담의 마음이 어떻게 순화되고 변 화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셋째, 안토니오스의 코라로서 공간은 거룩한 실 체들을 관상하는 곳이었다. 코라(chora)로서 공간은 장소의 개념이 아니다. 코라는 인간이나 사물의 활동 공간을 말하는 것이다. 플라톤의 코라는 생성되는 모든 것에 장소(위 치)를 마련해주면서도 장소에 그치지 않고 존재를 향하고, 수용자로서 생 성의 터가 된다. 공간은 생성하는 곳이면서 생성 그 자체에 관여한다. 아타 나시오스가 이해한 공간 역시 장소적 의미를 배제하지 않지만, 그 공간은 하나님이 역사하는 공간, 인간의 자기 변화를 경험하는 공간, 하나님을 받 아들이는 수용의 공간이다. 이와 같은 공간 이해를 통해 기독교는 코로나 이후의 시대를 대비해야 할 것이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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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해방 이전과 이후로 시기를 나누어 군산지역의 화교 기독교 공동체의 역사에 대해 살펴보았다. 해방 이전에는, 1928년에 조선과 중국 선교사들의 지원으로 3달에 걸쳐 이루어진 중국인 전도대 전국 순회집회 의 결과, 1929년에 호남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전주와 군산에 화교 기독교 공동체가 조직되었다. 특히 전주의 남장로회 윈 선교사가 화교에 지속적으 로 관심을 쏟으면서 신앙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었는데, 다만 중일전쟁, 태 평양전쟁,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단절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미북장로회에서 중국인사역 전담 선교사를 다시금 초빙 하였는데, 그때 내한한 매클레인 선교사와 군산화교 2세인 조계지 권사의 노력으로 1959년부터 다시금 군산에 화교 기독교 공동체가 조직되었고, 1963년에 정식으로 교회가 설립되었다. 이후 군산중화교회는 중국인 인구 구성의 변화에 따라, 구 화교 중심의 지역교회에서 점차 신 이민자들의 정착을 돕는 ‘이민자 교회’의 모습으로 역 변이되어 나갔다. 또한 중국어 교실을 운영한다든지 중국선교단체를 돕 는다든지 하는 방법으로 한국인 및 현지 한국교회와도 협력관계를 맺어왔 다. 하지만 중국인 수의 감소 및 목회자의 부재 등의 연유로, 현재는 단 두 명의 교인이 교회를 지키고 있으며, 교회는 이제 새 시대의 역할을 모색하고 있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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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목적은 인명진 목사의 정치참여 활동을 11번으로 구분해서 분 석했고 끝으로 그 정치참여의 신학적 근거를 검토했다. 인명진은 1970년대 산업선교를 통해 노동자 인권과 권익을 대변했고 네차례 감옥 생활을 했 다. 1980년대 인명진은 강제 추방되고 외국에서 다양한 혁명 사례를 분석 했고, 정치 혁명이 아닌 신앙에 근거한 인간 변화의 공동체 운동을 대안으 로 생각하게 됐다. 1982~84년 한국사회의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은 극좌로 이념화되어 인명진의 사상은 개량주의로 비판받는다. 1986 그는 민주화운 동 국민운동 본부 대변인으로 활동하면서 정치지도자 김영삼과 가까운 관 계를 맺고 그를 대통령 후보로 지지했다. 이것이 훗날 보수 정당과 친분을 맺게 되는 계기가 됐다. 김영삼 정권하에서 그는 목사의 정체성을 지키면 서 행정개혁과 KBS 이사직에 참여했다. 2006년 보수 정당 한나라당이 부 정부패로 위기에 처했을 때 윤리위원장직을 맡아 부패한 정치인을 징계하 는 개혁에 참여했으나 정치구조를 바꿀 수 없는 한계를 경험했다. 2016년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 된 이후 새누리당에서 97일 동안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아 탄핵을 수용하고 대국민 사과를 했고, 헌정질서를 따라 당에서 대통 령 후보를 배출하고 그 직을 사임했다. 그는 진보와 보수 양쪽에서 큰 비 난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활동을 기독교 목회의 사회적 책임으로 여겼고, 죄인의 친구가 되어야 하며, 교회는 보수 진보를 떠나 소금 역할을 해야 한다는 신학적 주장을 했다. 한국교회사와 정치사에서 진보적 사회운 동을 했던 목사가 보수 정당을 대표해서 비상대책활동을 한 것은 아주 특 이한 정치참여 경험이다.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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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16세기 종교개혁 과정에서 ‘유대인’ 또는 ‘유대주의자’라고 불렸던 칼뱅에 대한 연구이다. 칼뱅은 유대인 랍비들을 통해 성서해석에 관한 도움을 받았다. 종교개혁자들과 로마가톨릭교회는 이런 점에 대해 칼 뱅을 ‘유대인’ 또는 ‘유대주의자’라고 비판하였다. 칼뱅은 유대주의자였는 가를 살펴보기 위해 본 논문의 2장은 칼뱅과 유대인에 관해 연구한 학자들 의 입장을 정리한다. 3장에서는 르네상스 시대와 종교개혁 시기에 유대인 들의 역할이 종교개혁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살펴본다. 4장에서는 칼뱅이 전통적인 성서해석 입장을 가진 기독교인들과 랍비 유대인의 성서 해석을 어떻게 수용해서 자신만의 성서해석의 길을 걸었는지에 대해 연구 한다. 5장에서는 칼뱅과 유대인 논쟁에 대해 다루면서, 기독교인-유대인 간 의 논쟁의 역사도 제시한다. 6장에서는 칼뱅과 반유대주의의 문제를 논한 다. 끝으로 지금까지 논의를 정리하고, 그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