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은 세계사적인 의미를 가진 사건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1517년 비텐베르크에서 95개 논제를 게시함으로 시작되었고, 2017년 비텐베르크에서 종교개혁 500주년이 세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축하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떻게 축하되어야 하고,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 이를 위한 좋은 토대가 되는 것이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 전망”인데, 이 논문에서 이것이 자세히 분석되며 이를 근거로 종교개혁의 역사적 의미와 16세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영향력이 서술된다.
종교개혁은 여기서 네 가지 범주로 고찰된다. 먼저 세계사적인 사건으로, 그리고 종교적, 신학적 사건으로, 그리스도인의 성숙을 가져다주며 정치, 경제, 문화를 변혁시킨 사건으로 서술된다.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 전망”에는 교회, 사회, 정치, 교육 등에서 변화시키는 영향력이 잘 요약되어 23개 명제로 서술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은 특별히 기독교 교회 일치를 위한 기회이자 동시에 도전이다. 종교개혁은 근원적으로 교회의 분열을 의도한 것이 아니라 교회를 갱신하고자 한 것이었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종교개혁에 대한 바른 숙고는 오히려 교회 일치를 강화시킨다.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대회는 루터교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개신교인, 아니 모든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축하되어야 할 것이다.
본 논문에서 필자는 루터가 두 형태의 두 왕국, 즉 하나님의 왕국과 사탄의 왕국, 그리고 하나님의 왕국과 세상왕국을 이야기 하고 있으며, 이 왕국들에 대한 루터의 사고를 오해하고 오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이 두 형태는 신중하게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 논지를 토대로 하여 필자는 하나님의 사중통치, 세 가지의 외적 통치들, 그것들에 상응하는 세 가지의 외적 통치 수단들, 그리고 하나님의 사중통치에 대적하는 사탄의 사중통치에 대한 루터의 사고들이 하나님의 왕국과 세상왕국 간에 구별되기는 하지만, 동시에 상호 내적으로 연결된 관계를 보여주고 있음을 주장한다. 이와 함께 본 논문은 이 내적 연계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특히 한 쌍의 신학적 주제인 믿음과 사랑, 자유의 두 양상(∼으로부터의 자유와∼을 향한 자유), 그리고 소명의 두 양상(구원 질서에로의 부르심과 창조질서에로의 부르심)에 대한 루터의 사상들을 부각한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본 논문은 믿음과 사랑, 자유의 두 양상, 그리고 소명의 두 양상을 각각 연결하면서, 그 각각의 신학적 주제들의 핵심에 놓여 있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강조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왕국과 무관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루터의 답변을 제시한다. 그것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종교개혁 이후 근대교회에는 새로운 신학과 철학 사상들이 많이 등장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소시니안주의는 근대교회의 시기에 가장 크게 유행했던 신학 사상 중의 하나였다. 특히, 이들의 기독론과 반(反)삼위일체론과 같은 이단적 사상들은 기존 정통교파, 특히 개혁파와의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정통주의로 크게 양분되어 있던 유럽의 신학 판도를 뒤흔들었다. 무엇보다 소시니안주의자들이 남긴 저작들은 후대의 새로운 이단적 사상의 형성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소시니안주의는 그 영향력에 비해 현대의 학자들로부터 적절한 관심과 조명을 받지 못했다. 특히 기독론과 반삼위일체론을 제외한 소시니안주의의 주요 사상들에 대한 연구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실정이다. 당시 개혁파와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하나님의 예지에 대한 교리도 그러한 예들 중의 하나인데, 기존의 정통 신학과 많은 차이를 보였던 하나님의 예지에 대한 소시니안주의의 교리는 이들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기존의 정통교파와 소시니안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좋은 실례가 된다.
이러한 이유들로 본 논문은 근대교회의 시대에 많은 논란을 가져왔던 소시니안주의의 예지론 사상을 연구하고자 한다. 특별히 본 논문은 신의 예지에 관한 소시니안주의자들의 사상을 깊이 있게 분석하기 위해 이들의 예지론을 개혁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그것과 비교하고자 한다. 이러한 비교 연구는 미래의 우발적 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예지를 부정한 소시니안주의자들의 견해가,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지 않고도 중간지식을 통해 하나님의 예지의 가능성을 입증하고자 했던 알미니안주의나, 제일원인과 제이원인의 구분, 그리고 서로 다른 필연성의 구분 등을 통해서 하나님의 절대 예지가 인간의 자유와 양립할 수 있다고 설명하였던 개혁주의의 입장과는 매우 다른 것임을 보여줄 것이다.
이 논문은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회의 교육선교를 이끌어 나간 인돈(William A. Linton)의 교육선교를 연구하고, 인돈을 중심으로 남장로교 교육선교의 특징을 역사적으로 조명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인돈은 1912년에 한국에 입국하여 1960년에 건강이 악화되어 미국으로 돌아가 사망할 때까지, 일제에 의해 강제로 추방당하였던 기간(1940-1946)을 제외하고, 오랜 기간 한국의 전라·충청지역에서 줄곧 교육사역에 헌신하였다. 입국 후 선교초기에는 군산 영명학교에서 성경과 영어교사로 시작하여 곧이어 교장이 되었고, 이후 일제 식민주의 교육정책과 제도 속에서 남장로교가 선교학교의 생존과 교육선교의 맥을 이어가기 위하여 지정학교로 인가를 추진할 때 주력학교인 전주 신흥학교로 이임하여 교장으로 일하며 지정학교 인가의 책임을 맡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반대하며 남장로교가 자진폐교를 결정할 때, 전권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선교회 모든 학교들의 폐교를 진두지휘하였다.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되었지만, 해방 이후 복귀하여 새롭게 설립되는 대전선교지부의 설립을 주도하였으며, 남장로교가 한국교회 지도자 양성과 고등교육을 통한 한국사회의 기여를 위해 대전에 대학을 설립하고자 하였을 때, 대학설립위원장과 초대 학장으로서 대학의 설립과 교육과 운영의 책임을 감당하였다. 이로써 인돈은 중등교육에서 고등교육에 이르기까지 남장로교 교육선교 전반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며 발전에 기여하였다.
선교초기부터 끝까지 인돈의 교육선교에서 이어지는 강조점은 교육의 목적이 한국교회를 이끌어 나갈 지도자 양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그것은 불신자에게는 전도하고 신자에게는 교육해야 한다는 남장로교 교육선교의 핵심을 반영하였다. 기독교인 자녀들을 기독교적 교육 환경에서 어릴 때부터 고등교육에 이르기까지 단계적으로 가르쳐서 한국교회를 이끌어 나가는 지도자가 되게 하고 각자 놓인 자리에서 이웃을 돌보고 사회에 봉사하는 책임 있는 신앙인이 되도록 하는 것이 교육선교의 사명이었다. 교회지도자 양성이라는 측면에서 남장로교와 북장로교를 비롯한 보수적인 장로교 선교회들의 교육선교의 목적이 대동소이하였지만, 북장로교가 복음전도자 양성에 보다 집중하였다면, 남장로교는 교회와 사회에 기여하는 기독교 지도자 양성이라는 점에서 통전적, 실용적 성격이 강하였다. 이러한 특징은 인돈 자신도 공학도였던 만큼 과학교육을 강조하고, 또한 모든 학생들에게 직업교육을 강조한 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대전대학에서 볼 수 있듯이, 인문학과 과학과 신학의 조화와 융합, 신앙과 학문과 실용적 삶의 연결은 독특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기독교적 교육환경을 위해, 모든 교사가 진실한 기독교인이어야 하고, 학생들의 다수가 기독교인이어야 하고, 교육의 내용과 삶이 기독교적이어야 한다는 원칙은 인돈의 교육선교의 마지막까지 강조되었다. 교육선교의 목적과 정체성에 대한 신념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반대하여 자진폐교를 결정하고 교육선교에서 물러난 것에서도 잘 드러났다. 이 원칙은, 작지만 기독교적 정체성과 목적이 유지되는 순수한 대학을 만들고자 하였던 모습에서도 나타났다.
이 논문은 근대의 세례를 받은 기독교 신지식인들이 3.1운동 이후 새롭게 형성된 ‘제한된’ 담론공간 안에서 젠더에 대한 사회적 논의에 어떤 방식으로 참여했는지 고찰한다. 젠더 이슈는 정치적 자유가 허용되지 않았던 일제 식민체제 하에서 근대사회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본격화시킨 촉매제 역할을 했다. 기독교 신지식인들은 새로운 변화에 ‘기대’와 ‘불안’을 동시에 표출하며 ‘근대’와 ‘전통’의 충돌에서 발생되는 파열음을 도덕적 균형으로 최소화하려는 전략을 보여주었다. 개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일체의 관습과 전통을 거부하는 자유주의 여성들에 대해서는 소비주의와 결합된 도덕적 일탈과 가정으로부터의 이탈을 경계하며 ‘가정’이야말로 남녀평등의 근간이 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 반면에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문제제기와 이에 대한 근본적 변화를 요구한 사회주의 여성들과는 이념적 급진성에도 불구하고 연대의 틀을 모색하고 ‘남녀평등’이 실현된 문명사회에 대한 이상을 공유하고자 시도했다. 이를 기반으로 여성해방논의가 더욱 확장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탈정치화된 문화지형의 틀 안에서 생존을 모색했던 만큼 기독교 신지식인들의 젠더 논의는 근본적인 인식의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다. 우선 ‘문명사회의 실현’을 근대의 이상으로 제시하는 과정에서 서구적 근대의 사상적 종속을 인식하지 못한 채 서구 중산층의 근대적 욕구를 근대사회의 이상적 가치로 수용했다. 이는 서구사회에 대한 동경으로 이어졌다. 즉 그 어떤 정치적 자유도 결코 허용되지 않았던 식민지 현실에서 ‘남녀평등’과 ‘여성해방’을 중립적 근대가치로 치환시킴으로써 평등사회에 대한 갈망과 정치적 해방의 욕구를 서구문화에 대한 동경으로 해소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식민지 조선에 대한 현실 인식에 있어서도 일본과 미국을 포함한 세계열강들의 식민주의 확장과 식민체제로부터 파생된 억압적 현실을 간과한 채, 그 근본원인을 조선의 ‘근대적 결핍’에서 찾았다. 이들은 조선여성들의 의지부족이나 미성숙한 정신 또는 교육환경의 낙후성 등을 조선여성운동의 저해요인으로 지목했다. 하지만 자신들 스스로가 식민지 조선에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던 ‘식민화된 근대’의 주요채널이 되고 있음을 인식하지는 못했다.
이 논문의 논점은 동방 로마제국의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408-450)를 통해 과연 동방 로마제국에서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일반적으로 이야기 되는 것처럼 caesaro-papism 으로 정의 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슈멤만의 항변이 옳은지를 고찰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서방 로마제국은 교회가 국가로부터 어느 정도의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에 비해, 동방 로마제국은 “비잔틴 제국 황제-교황주의” ‘Byzantine caesaro-papism’로 국가가 교회를 조정한다는 견해가 널리 퍼져있다. 동방정교회 학자인 알렉산더 슈멤만은 이러한 견해에 반대하면서 ‘교회와 국가 사이의 관계는, 어떤 조약 혹은 법률상의 제한에 의해서 연결되어진 것이 아니라, 그러나 교회 신앙에 의해 말해진 진리(truth)에 의해서 연결되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교회의 신앙은 먼저 황제가 그리고 나서 그를 통해 제국 그 자체가 교회 신앙의 진리로서 그리고 황제나 제국의 우위에 있는 진리로서 인정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일단 슈멤만의 주장을 전제하면서, 테오도시우스 2세가 그렇다면 종교와 정치 사이에 언제나 연결되어 있던 특별한 관계 속에서 황제는 과연 진정으로 교회 분쟁의 중재자인가 혹은 결정자인가를 검토하려고 한다. 필자는 네스토리오스 논쟁(428-431), 즉, 네스토리우스가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로 재임했던 428-431년, 특별히 테오토코스 논쟁에 휘말리면서 그의 실각까지의 역사적인 재구성을 통해 이러한 쟁점을 분석하고자 한다. 따라서 이 논문이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테오도시우스 2세의 입장을 논의하지만, 방법상 교리논쟁을 중심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테오도시우스 2세가 전체 역사적 정황 속에서 평가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자 한다.
테오도시우스 2세는 로마제국을 최초로 기독교제국으로 명명한 테오도시우스 1세의 손자이다. 테오도시우스 1세의 죽음 이후 장남인 아르카디우스(395-408)는 콘스탄티노플을 통치하였고 차남인 호노리우스(395-)는 이태리 지역을 통치하였다. 테오도시우스 2세는(408-450) 아르카디우스의 장남으로 40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아르카디우스는 31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그는 408년부터 450년까지 42년 동안 콘스탄티노플에서 태어나 그 곳에서 전 생애동안 통치한 최초의 왕이 되었다.
테오도시우스 2세가 네스토리오스의 논쟁에 관여하게 된 때는 그의 아버지 알카디우스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였던 크리소스토모스를 실각시킨 지 불과 사반세기가 겨우 지난 때였다. 따라서 콘스탄티노플, 즉 동방 로마 제국이 지향하는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입장이 크게 변화 되었으리라고는 생각되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소스토모스와 네스토리오스의 실각 사건은 전혀 다른 성격의 것이기에, 두 사건을 함께 고찰하는 것은 동방 로마제국의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폭 넓은 이해를 얻을 것이다.
본고는 콘스탄티누스 이후 그리스도인 황제들이 변화시키려고 했던 로마제국의 공적 영역을 율리아누스가 어떻게 개혁하려고 했는지를 규명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율리아누스 집권 이전의 로마제국의 국가와 종교의 상황을 서술하고(II), 그 다음에 이러한 맥락에 비추어 율리아누스의 종교 정책의 내용을 분석하고(III), 마지막으로는 그의 종교정책의 성격을 제시하고자 한다(IV). 결론적으로 본고는 율리아누스의 종교 정책을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있지만, 기본적인 정책 기조는 동일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정책의 전환은 페르시아 정벌과 다신교의 부흥이 기대보다 저조하다는 인식에 따라 이루어졌으며, 후기에는 다신교의 재조직과 함께 교육법, 그리스도인의 공직·군대 배제, 교회 재산 몰수, 교회 지도자 추방에서 나타나듯 보다 강력한 조치가 취해졌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다신교를 부흥시키고 신들에 대한 제의의 회복을 통해 국가의 번영과 안정을 도모하고 이를 위해서는 그리스도교를 실제적으로 약화 내지 제거해야 한다는 인식은 전기나 후기나 동일했다. 율리아누스는 “거룩한 행위”에 대한 강렬한 체험을 지니고 있었고, 스스로 제사를 드리며 신들의 뜻을 분별할 정도로 강한 신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정책은 이러한 “거룩한 행위”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지는 않는 듯하다. 다신교의 재조직은 기존의 다신교를 강화하는 틀 안에서 이루어졌다. 다만 가난한 자의 자애에 대한 요청은 분명히 그리스도교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그는 페르시아 정벌을 준비하면서는 신들의 호의를 얻기 위해 더욱 강력한 정책을 추구했고, 그의 신심과 열정으로 볼 때, 상황의 변화에 따라 정책의 강도가 조정될 수 있겠지만, 근본 목표는 동일했다. 율리아누스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로마 제국에서 그리스도교화의 흐름은 막을 수 없는 추세가 되었다. 그는 후기 로마제국의 그리스도교와 다신교의 공존과 대립과 갈등의 역사에서 큰 분수령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 등장과 성장은 후기 로마제국의 그리스도교와 다신교의 관계가 얼마나 복잡하고 다면적인지, 그리스-로마 세계의 그리스도교화가 얼마나 길고 어려운 과정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