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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인돈(William A. Linton)의 교육선교 KCI 등재

The Educational Work of William A. Linton, American Southern Presbyterian (Presbyterian Church U. S.) Missionary in Korea

  • 언어KOR
  • URLhttps://db.koreascholar.com/Article/Detail/303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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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敎會史學會誌 (한국교회사학회지)
한국교회사학회 (The Church History Society in Korea)
초록

이 논문은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회의 교육선교를 이끌어 나간 인돈(William A. Linton)의 교육선교를 연구하고, 인돈을 중심으로 남장로교 교육선교의 특징을 역사적으로 조명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인돈은 1912년에 한국에 입국하여 1960년에 건강이 악화되어 미국으로 돌아가 사망할 때까지, 일제에 의해 강제로 추방당하였던 기간(1940-1946)을 제외하고, 오랜 기간 한국의 전라·충청지역에서 줄곧 교육사역에 헌신하였다. 입국 후 선교초기에는 군산 영명학교에서 성경과 영어교사로 시작하여 곧이어 교장이 되었고, 이후 일제 식민주의 교육정책과 제도 속에서 남장로교가 선교학교의 생존과 교육선교의 맥을 이어가기 위하여 지정학교로 인가를 추진할 때 주력학교인 전주 신흥학교로 이임하여 교장으로 일하며 지정학교 인가의 책임을 맡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반대하며 남장로교가 자진폐교를 결정할 때, 전권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선교회 모든 학교들의 폐교를 진두지휘하였다.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되었지만, 해방 이후 복귀하여 새롭게 설립되는 대전선교지부의 설립을 주도하였으며, 남장로교가 한국교회 지도자 양성과 고등교육을 통한 한국사회의 기여를 위해 대전에 대학을 설립하고자 하였을 때, 대학설립위원장과 초대 학장으로서 대학의 설립과 교육과 운영의 책임을 감당하였다. 이로써 인돈은 중등교육에서 고등교육에 이르기까지 남장로교 교육선교 전반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며 발전에 기여하였다.
선교초기부터 끝까지 인돈의 교육선교에서 이어지는 강조점은 교육의 목적이 한국교회를 이끌어 나갈 지도자 양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그것은 불신자에게는 전도하고 신자에게는 교육해야 한다는 남장로교 교육선교의 핵심을 반영하였다. 기독교인 자녀들을 기독교적 교육 환경에서 어릴 때부터 고등교육에 이르기까지 단계적으로 가르쳐서 한국교회를 이끌어 나가는 지도자가 되게 하고 각자 놓인 자리에서 이웃을 돌보고 사회에 봉사하는 책임 있는 신앙인이 되도록 하는 것이 교육선교의 사명이었다. 교회지도자 양성이라는 측면에서 남장로교와 북장로교를 비롯한 보수적인 장로교 선교회들의 교육선교의 목적이 대동소이하였지만, 북장로교가 복음전도자 양성에 보다 집중하였다면, 남장로교는 교회와 사회에 기여하는 기독교 지도자 양성이라는 점에서 통전적, 실용적 성격이 강하였다. 이러한 특징은 인돈 자신도 공학도였던 만큼 과학교육을 강조하고, 또한 모든 학생들에게 직업교육을 강조한 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대전대학에서 볼 수 있듯이, 인문학과 과학과 신학의 조화와 융합, 신앙과 학문과 실용적 삶의 연결은 독특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기독교적 교육환경을 위해, 모든 교사가 진실한 기독교인이어야 하고, 학생들의 다수가 기독교인이어야 하고, 교육의 내용과 삶이 기독교적이어야 한다는 원칙은 인돈의 교육선교의 마지막까지 강조되었다. 교육선교의 목적과 정체성에 대한 신념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반대하여 자진폐교를 결정하고 교육선교에서 물러난 것에서도 잘 드러났다. 이 원칙은, 작지만 기독교적 정체성과 목적이 유지되는 순수한 대학을 만들고자 하였던 모습에서도 나타났다.

This paper investigates the educational work of William A. Linton, who came to Korea in 1912 and worked as an educational missionary from the Presbyterian Church U. S. until he resigned on account of ill health in 1960. He began his missionary work by teaching English and the Bible at Young Myoung School in Kunsan and worked later as a principal at Sin Heung School in Jeonju. Responding to the Japanese imperialist educational policies to bring private and mission schools under the government control, the Southern Presbyterian mission in Korea decided to prepare two core schools - Sin Heung for boys and Speer in Kwangju for girls - to get accredited as the designation school, which would have the autonomy in religious education under the Japanese educational system. Linton took the responsibility to get Sin Heung School ready for the government accreditation and successfully accomplished his duty. When the Japanese enforced the Shinto Shrine worship, however, the mission opposed the act and decided to close the mission schools, and Linton was invested with complete authority to shut down them. In the post-liberation period, he took charge of establishing a new mission station in Daejeon and founding the Daejeon Presbyterian College, which would later develop into Hannam University. Linton made a great contribution to the educational work of the Southern Presbyterian mission and played a significant role in developing secondary and higher education in Korea, particularly in Cholla and Chungcheong Province.
The consistent and continuous emphasis that Linton laid on the educational work was to nurture leadership for the Korean church. It echoed the mission’s motto: “evangelize the non-believers and educate the believers”. The aims of missionary education was to teach Christian students from primary to higher level and qualify them to take charge of their churches, families, and communities. Northern and Southern Presbyterian missions alike aimed at educating the children of Christian families to make them the leaders of the Korean Church. If they were different, Southern Presbyterian mission raised Christian leaders in many different fields while Northern Presbyterian concentrated on nurturing church workers and preachers. Linton highlighted science and industrial education in his schools.
Linton emphasized three important factors for mission school: the majority of students from Christian families; qualified teachers/professors with the strong Christian faith; and education within the Christian atmosphere. He maintained these principles in closing schools against the enforcement of Shinto Shrine worship under the Japanese colonial rule and also in founding the Daejeon Presbyterian College later in the post-colonial Korea.

저자
  • 최영근(한남대학교 기독교학과 조교수) | Choi, Youngke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