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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敎會史學會誌 KCI 등재 한국교회사학회지 JCHS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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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호

제41집 (2015년 9월) 7

1.
2015.09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프랑케는 “살아 움직이는 신앙”이라는 경건주의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교육과 선교에 힘썼다. 시작은 방임되고 있는 하층민들의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학교와 전쟁고아들을 돌보기 위한 고아원 설립부터였다. 방임된 아이들은 종교적 가르침을 받지 못하고 결국에는 “살아있는 신앙을 소유한 시민”으로서 성장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프랑케의 사고는 후대 19세기 부흥 운동가들이 아이들의 올바른 기독교적 양육을 통해 부모들의 신앙을 다시 살아나게 하고 더불어 미래의 신실한 기독교인을 양성하고자 교육 개혁 운동을 진행 했던 것과 동일한 것이다. 또한 프랑케의 개혁은 단순히 학교를 새로 짓고 아이들을 성서 중심으로 가르치는 것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교육학적 발전을 도모했다는데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구체적인 교육 목적과 수단 그리고 여러 가지 교수법 등 올바른 학교 교육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학문적 체계들을 수용하였으며 자신의 생각들을 실현시킬 기관들을 설립하고 그를 통해 많은 긍정적 영향들을 끼쳤다고 하는 것이다. 특별히 학교 의무 교육의 중요성을 부각시킴으로 인해 후대 의무 교육 법제정에 영향을 준 점과 실습 위주의 교육을 학교 교육에 접목시킴으로 인해 직업학교 설립의 근간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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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교회사에서 이단으로 정죄한 그룹들을 ‘비당파적’ 견지에서 재조명하고 있는 고트프리드 아놀드의 사상을 조망하고, 이러한 전망 아래서 작금의 한국교회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성찰하였다. 이를 위해 본 논문은 아놀드의 두 저서 『처음 사랑』과 『비당파적인 교회사 및 이단사』에 집중하여 그 속에 나타나 있는 이단 이해를 분석하고, 그러한 이단 이해를 바탕으로 아놀드가 교회의 전체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고 기술하였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본 논문은 아놀드의 이단 이해에 근거해서 제도와 권위를 중심에 두고 투영한 승자 중심의 기독교 역사를, 성령의 역사와 사랑이라는 보다 인간의 마음 상태에 근거한 평가 기준으로 교회를 관망했을 때, 정통 기독교가 이단이라고 규정했던 교회사적 풍경들이 새롭게 조명될 수 있는 가능성뿐만 아니라, 보다 신앙의 본질에 근접한 내용을 발견할 수도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동시에 본 논문은 이러한 아놀드식의 ‘신비주의적이고 성령주의적인 입장’이 개인의 경건과 내적 말씀에 근거하다보니 신비적으로 치우칠 수 있음 또한 경고함으로써 정통과 이단에 대한 나름대로의 균형적 시각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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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미국의 기독교 사회개혁운동을 초절주의 운동의 영향 아래서 분석한 것이다. 19세기 미국사회에서는 이상사회 실현을 위한 사회개혁운동이 활발하게 추진되었다. 이 개혁 운동에 가장 앞장선 것은 기독교 지도자들이었다. 특별히 기독교 사회개혁가들은 초절주의 사상가들로부터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개혁운동을 이끌었다. 초절주의자들은 계몽주의적 자연주의와 유럽의 낭만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아 진보적 이상사회 건설에 대한 꿈을 가지고 사회개혁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들은 직접적인 사회구조 개혁보다는 개인의 도덕개혁에 초점을 맞춘 사회개혁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비해 기독교 사회개혁운동은 사회지향적 성격이 강했다. 기독교 사회개혁운동은 남북전쟁 이전에는 건강한 생활습관 정착을 위한 생활개혁운동, 노예제도 폐지와 인종평등과 같은 구조개혁 운동, 도덕적 자기개혁운동을 전개하였다. 남북전쟁 이후에는 노예제도가 폐지됨에 따라서 금주운동과 여권신장운동으로 방향이 전환되었다. 남북전쟁 이후에 기독교 사회개혁운동에 영향을 끼친 사상으로는 사회진화론, 사회복음주의, 전천년주의 등이 있었다. 특별히 초절주의 운동의 영향으로 도덕적 자기개혁을 강조한 것 또한 19세기 후반의 기독교 사회개혁운동의 방향으로 볼 수 있다. 이 연구를 통해 19세기 미국에서의 기독교 사회개혁운동의 성격과 방향을 초절주의와 연계하여 분석 평가할 수 있었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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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예일대 역사가 케네스 스코트 라투레트(Kenneth Scott Latourette, 1884–1968)는 기독교의 전 역사를 ‘확장’(expansion)이라는 맥락에서 해석하며, 특히 ‘예수의 영향력 확장’이라는 주제를 자신의 역사관으로 설정하고 이 사상을 일평생 유지했다. 그렇다면 그는 이 사상은 언제 그의 역사관과 선교관으로 확정했을까? 일반적으로 1937년 이래 수년에 걸쳐 출판된 『기독교확장사』(A History of Expansion of Christianity, 1937-45)가 그의 이런 역사관이 구체화되는 시기라고 주장되는데,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라투레트에게 이런 역사관이 없었을까? 1937년 이후 확고히 정립되는 ‘예수의 영향력 확장’으로서의 기독교 역사라는 표현 자체는 1929년에 출판된 첫 기독교 역사 관련 저작 『중국기독교선교역사』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라투레트가 이 책에서 기독교 선교사를 중국 사회에 영향을 끼치는 서구의 대리자로 묘사할 때, 독자는 그가 1937년 이후 저술에서 등장하는 ‘예수의 영향력 확장’으로서의 기독교 선교역사라는 개념과 거의 같은 인식을 하고 있음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중국에 끼친 서구의 영향력’이라는 표현으로 자주 등장하는 명제는 사실상 ‘서구’를 ‘기독교’로, 또 ‘기독교’를 ‘예수’로 바꾸어도 무방하다. 즉, 1937년 『기독교확장사』 이후에 구체화되는 명제가 이미 1929년 저작에서 배아의 형태로 표명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중국기독교선교역사』는 단순히 ‘명제’에서만 1937년 이후 작품들의 선구적 배아가 아니었다. 공정하고 편파적이지 않기 위해 기독교역사 해석은 반드시 여러 교파를 통합과 비교의 방식으로 분석해야 한다는 에큐메니컬적 역사기술, 또한 예수의 영향력은 교회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므로, ‘교회사’가 아니라, 반드시 교회 바깥의 모든 영역을 포괄적으로 기술하는 ‘기독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인식, 기독교 신앙이 선교를 통해 퍼져나갈 때, 이는 마치 파도의 고저, 밀물과 썰물의 반복되는 양상처럼 진보와 후퇴를 반복하지만 결국에는 전진한다는 믿음 등, 1937년 이후 작품에서 구체화된 라투레트의 모든 역사기술 방법론과 관점은 사실상 1929년의 『중국기독교선교역사』에도 흔적이 두드러진다. 따라서 선교사와 선교활동의 공헌을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보고, 결국에는 기독교의 확장으로 역사가 진보할 것이고 윤리가 개선될 것이라 믿는 이상적이고 순진하고 낙관주의적인 승리주의 역사관이라고 라투레트의 후기 저작을 비판하는 목소리 또한 이미 1929년에 출판된 『중국기독교선교역사』에도 적용될 수 있다. 이 점에서 『기독교확장사』(A History of Expansion of Christianity, 1937-45), 『아노 도미니: 예수, 역사, 하나님』(Anno Domini: Jesus, History, and God, 1940)과 『꺼지지 않는 빛』(The Unquenchable Light, 1941), 『기독교사』(A History of Christianity, 1953), 『혁명시대의 기독교』(Christianity in a Revolutionary Age, 1958-62), 『기독교의 역사』(Christianity through the Ages, 1965) 같은 라투레트의 후기 대작은 모두 『중국기독교선교역사』에 빚을 지고 있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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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일본의 그리스도교사 연구는 비기독교인 학자들이 주도했을 만큼, 그 연구 주제가 서구 모방과 일본 근대화를 위한 요체로서 인식되었다. 그 결과 서양 제국의 팽창에 기여한 선교사들의 헌신은 본받아야 할 하나의 개척 정신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서구 기독교의 팽창 과정’이 곧 인류사라고 전제한, 라투레트(Kenneth Scott Latourette)의 이른바 ‘선교사관’도, 제국주의를 지향한 근대 일본의 특수성 속에서 편의적으로 수용되었다. 일본의 그리스도교사 통사서에 라투레트가 처음 등장하는 시점도 만주사변(1931) 직후 중국 이해가 요구되면서 부터이고, 그의 저서들도 관변 학자들을 중심으로 중일전쟁 이후부터 그 번역이 본격화되었다. 즉 라투레트의 연구 성과는 대륙 및 해양 진출과 맞물린 일본의 국가적 이익과 관련되어 소개된 것이다. 라투레트는 극동에서 확장되어 가는 일본제국의 패권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는데, 이러한 라투레트의 ‘강자 중심’ 역사관은 전시 하에서 활동한 제자 백낙준이 일본의 제국주의 팽창론(대동아공영권 건설)을 지지하도록 설득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것은 서구 제국 중심, 선교사 중심의 교회사관이 지닌 근본적 한계로 인한 결말이기도 하다. 전후에 라투레트는 일본 국제기독교대학(ICU)의 이사장으로 부임한 뒤 일본 기독교계에 새롭게 소개된다. 대륙 침략에 활용된 ‘동양사학자’가 아닌, ‘그리스도교사학자’로서의 재평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의 서구 선교사 중심 사관은 비판에 직면하여, 동아시아의 그리스도교 수용자들의 입장, 즉 ‘토착화’ 관점을 통한 극복 시도가 이루어졌다. 한국 교회사학계에서도 ‘민족교회사관’, ‘민중교회사관’, ‘토착교회사관’, ‘실증주의 사관’ 등의 등장으로 인해 라투레트의 사관은 비판에 직면하였다. 라투레트를 수단화하여 수용했던 과거의 착오를 반성하며 극복하려던 전후 일본에서의 신학 및 역사적 시도는, 결국 피해자와 가해자로 식민지 시대를 공유한 한일 그리스도교 사학계의 공통된 현상이었다. 그런 면에서 일본에서의 라투레트 수용 과정은, 한국교회사 및 동아시아 그리스도교사 연구의 현재를 입체적으로 진단하고 미래의 연구과제를 전망하는데 중요한 도움을 준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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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투레트는 20세기의 가장 탁월한 교회사가 중 하나였다. 논저의 양적면에서는 150여권의 저서를 출간하여 누구의 추적도 불허했다. 예일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미국에서 선교가 중시되던 시기에 태어나고 경건한 가정에서 자라 그 영향으로 중국선교사가 되었다. 건강 때문에 선교사역에서 물러나 고향에서 치료 후 그는 학문의 세계에 들어갔다. 그의 학문적인 관심도 선교역사였다. 선교적인 염두에서 중국 일본등지의 역사 연구서를 펴내고 사학과에서는 동양사 교수로 자리 잡았다. 종교학과에서도 기독교를 선교사적 관점에서 교수했다. 신학교에서는 기독교확장사를 가르쳤다. 기독교는 초대 교회로부터 지금까지 계속 확장되어 왔다는 견해였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는 『기독교확장사』 7권과 『혁명시대의 기독교』 5권은 그의 대표적 저서이다. 그 외에도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저서로 『기독교회사』와 『중국기독교선교사』 등이 있다. 이러한 저서들을 통해서 그는 기독교역사는 계속 확장되어 왔다는 것을 증거하였다. 백낙준과 라투레트는 예일 대학교에서 사제 관계였다. 라투레트가 백낙준의 박사논문 지도교수였다. 백낙준은 라투레트의 교회사 방법론을 따랐다. 교회의 역사는 선교의 역사라고고 그의 저서 『한국개신교사』에서 스스로 밝혔다. 라투레트 페이퍼가 예일 신학대학원에 수집되어 있음으로 이를 활용할 것과 백낙준의 글들도 더 수집하여야 할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간 연구를 위해서이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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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복음주의는 보수주의와 단순하게 동일시되어 왔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에, 정치적 진보주의자들의 민주화운동과 근본주의적 기독교인들의 반동적 행동에 대한 반작용으로, 새로운 유형의 복음주의가 출현하기 시작했다. 보수적 복음주의와 구별하기 위해서, 나는 그것을 ‘진보적 복음주의’라고 칭한다. 이 새로운 유형의 복음주의는 몇 가지 중요한 기관과 조직들을 통해, 자신의 신념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시작했다. 기독교학문연구회(기학연, 1984), 한국헨리조지협회(1984), 기독교문화연구회(기문연, 1986), 기독교윤리실천운동(기윤실, 1987),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1989) 등이 대표적인 예들이다. 1990년대 이후, 이것은 다양한 조직, 기관, 운동으로 더욱 확대·발전되었다. 예를 들어, 잡지 「복음과 상황」(1991), 기독법률가회(1999), 교회개혁실천연대(2002), 성서한국(2002), 기독연구원 느헤미야(2010) 등이 연속적으로 출현했으며, 한국헨리조지협회는 1996년에 ‘성경적토지정의를위한모임’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2010년에 ‘희년토지정의실천운동’(희년운동)과 통합하여 ‘희년함께’로 거듭났다. 뿐만 아니라, 미국과 영국에서 비슷한 운동을 개척하거나 주도했던 학자들이 IVP를 포함한 여러 복음주의 출판사들을 통해, 국내에 꾸준히 소개되었다. 존 스토트, 크리스토퍼 라이트, 로날드 사이더, 리차드 마우, 짐 월리스, 토니 캠폴로, 브라이언 맥클라렌, 존 하워드 요더가 그런 흐름의 대표주자들이었다. 이 운동의 발전과정에서, 우리는 이 운동의 신학적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끼친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신학적 원천들을 발견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의 나라 신학,” 로잔언약(1974), 기독교세계관운동, 해방신학, 민중신학, 마르크스주의, 그리고 미국 복음주의 좌파가 한국에서 진보적 복음주의의 탄생과 성장에 지속적으로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그 결과, 진보적 복음주의는 주요 쟁점들에 대해 비교적 진보적·개방적인 견해를 갖게 되었다. 예를 들면, 진보적 복음주의자들의 성경관은 근본주의자들의 것보다 진보적이며, 사회적·정치적 문제들에 대해선 좌파적 경향을 보이고, 행동 방식은 명백히 엘리트주의적 혹은 학문적이다. 이처럼, 진보적 복음주의는 한국의 복음주의 역사에서 대단히 독특하고 중요하다. 하지만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 혹은 극대화하기 위해선, 특히, 대중을 포용하기 위해선, 자신의 엘리트주의와 학문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처해 있는 독특한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그리고 종교적 환경에 근거하여 자신의 신학을 발전시키기 위해선, 서구신학에 대한 지나친 의존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