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일본의 그리스도교사 연구는 비기독교인 학자들이 주도했을 만큼, 그 연구 주제가 서구 모방과 일본 근대화를 위한 요체로서 인식되었다. 그 결과 서양 제국의 팽창에 기여한 선교사들의 헌신은 본받아야 할 하나의 개척 정신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서구 기독교의 팽창 과정’이 곧 인류사라고 전제한, 라투레트(Kenneth Scott Latourette)의 이른바 ‘선교사관’도, 제국주의를 지향한 근대 일본의 특수성 속에서 편의적으로 수용되었다. 일본의 그리스도교사 통사서에 라투레트가 처음 등장하는 시점도 만주사변(1931) 직후 중국 이해가 요구되면서 부터이고, 그의 저서들도 관변 학자들을 중심으로 중일전쟁 이후부터 그 번역이 본격화되었다. 즉 라투레트의 연구 성과는 대륙 및 해양 진출과 맞물린 일본의 국가적 이익과 관련되어 소개된 것이다. 라투레트는 극동에서 확장되어 가는 일본제국의 패권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는데, 이러한 라투레트의 ‘강자 중심’ 역사관은 전시 하에서 활동한 제자 백낙준이 일본의 제국주의 팽창론(대동아공영권 건설)을 지지하도록 설득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것은 서구 제국 중심, 선교사 중심의 교회사관이 지닌 근본적 한계로 인한 결말이기도 하다.
전후에 라투레트는 일본 국제기독교대학(ICU)의 이사장으로 부임한 뒤 일본 기독교계에 새롭게 소개된다. 대륙 침략에 활용된 ‘동양사학자’가 아닌, ‘그리스도교사학자’로서의 재평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의 서구 선교사 중심 사관은 비판에 직면하여, 동아시아의 그리스도교 수용자들의 입장, 즉 ‘토착화’ 관점을 통한 극복 시도가 이루어졌다. 한국 교회사학계에서도 ‘민족교회사관’, ‘민중교회사관’, ‘토착교회사관’, ‘실증주의 사관’ 등의 등장으로 인해 라투레트의 사관은 비판에 직면하였다. 라투레트를 수단화하여 수용했던 과거의 착오를 반성하며 극복하려던 전후 일본에서의 신학 및 역사적 시도는, 결국 피해자와 가해자로 식민지 시대를 공유한 한일 그리스도교 사학계의 공통된 현상이었다. 그런 면에서 일본에서의 라투레트 수용 과정은, 한국교회사 및 동아시아 그리스도교사 연구의 현재를 입체적으로 진단하고 미래의 연구과제를 전망하는데 중요한 도움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