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키온을 이해하는 일은 2세기 기독교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일이다. 당시 교회는 마르키온을 경계하면서 새로운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그의 사상을 논박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신앙과 신학의 방향을 체계화하는 계기로 삼았다. 마르키온에 대한 교부들의 평가는 그 시대의 기독교인들의 상황과 입장을 짐작하게 해준다. 이 글은 먼저 마르키온의 삶의 행적과 관련된 몇 가지 사실관계에 대하여 학자들의 의견을 통해서 규명하고 이해하고자 한다. 그런 다음 그의 주요 사상을 몇 가지 되짚어보고 2세기 당시의 기독교인들이 그의 주장에 어떻게 반응했는지, 그가 2세기 기독교에 끼친 영향은 무엇인지, 그리고 기독교 신앙의 관점에서 그 사상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월드비전은 제 2차 세계대전이후 미국에서 새롭게 시작된 복음주의 운동과 그 영향을 받은 밥 피얼스(Bob Pierce)가 창설하였다. 이 복음주의 운동은 전통적인 기독교 메시지를 수호하는 동시에 변화하는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는 한편,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자유세계를 위협하는 공산주의에 대항하였다.
밥 피얼스는 복음주의 선교단체인 YFC(Youth for Christ)의 일원으로 1947년과 1948년 중국을 방문하여 그곳에서 전도와 함께 어려운 사람들을 도왔다. 특별히 그는 당시 중국의 상황을 필름에 담아 미국사회에 생생하게 전하였다.
밥 피얼스는 중국이 공산화되자 1950년 3월 한국에 와서 위와 같은 사역을 다시 시작하였다. 밥 피얼스는 한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과 한경직 목사의 도움을 받아 전국을 순회하면서 전도집회를 개최하였고, 고아원들을 순회하였으며, 이승만을 만나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해 논의하기도 하였다. 그가 귀국한 뒤 곧 바로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밥 피얼스는 한국사역을 체계적으로 하기 위해서 1950년 9월에 월드비전을 창립하였고, 1953년에는 한국 지부를 만들었다. 월드비전은 초기에는 기존 선교단체를 돕는 것이 주 사역이었으나 점점 아동후원 프로그램을 발전시켜, 오늘 날에는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아동후원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단체가 되었다. 월드비전은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을 지키면서도 동시에 변화하는 세계에 적응하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본 논문은 한국에서 활동한 외원단체들 가운데, 동양선교회(Oriental Missionary Society)와 밀접한 관련을 가졌던 세계구호위원회(World Relief Commission)의 설립동기와 배경, 그리고 한국에서의 활동을 살펴보고 있다. 특히 세계구호위원회에서 주도적인 활동을 한 엘마 길보른(Elmer Kilbourne)의 활동에 집중하여, 이후 한국의 사회복지에 기여한 점을 추적하고 있다. 본 논문은 세계구호위원회와 엘마 길보른의 활동을 밝힘으로, 전후 한국사회의 재건과 사회사업 및 복지기관의 출현 등에 끼친 복음주의 기독교의 역할 및 한국성결교회의 기여를 드러내려고 한다.
본 논문은 미국복음주의협회 관련자료, 엘마 길보른의 보고서와 회고록, 세계구호위원회의 활동기록, OMS 보고서,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록, 기독공보 등을 통해, 한국사회를 사회사업의 역사와 비교하여 살펴보기 위하여, 사회학적인 접근과 함께 역사적 기술방법을 택하고 있다. 본 논문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 세계구호위원회의 한국 활동은 처음 구호활동에서 시작하여 점차 사회사업으로 발전하였다. 둘째, 세계구호위원회의 한국활동은 한국성결교회를 통해 진행되어, 교단이 사회의 약자들에게 관심을 갖고 인도주의적 프로그램을 시도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셋째, 세계구호 위원회의 한국 활동은 전쟁을 통해 형성된 반공의식을 더 강화시키는 기능을 하였다. 넷째, PL480을 통한 미국정부의 세계구호위원회의 지원은 사회 사업을 더 강화시킨 측면이 있으나, 상대적으로 자발적 활동의 한계를 노출시켰다. 마지막으로, 세계구호위원회의 한국 활동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는데, 자료 활용에 어려움이 있다는 점이다.
만주의 존 로스 선교사가 1900년대 초에 중국어로 출판했던 7권의 주석서를 탐구하는 이 논문은 그 주석서가 태동하게 된 역사적 배경, 서지사항에 있어서 쟁점들, 그리고 그 가운데 한글로 번역되어 출판된 5권의 신약 주석서를 규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연구 방법으로는, 1890년과 1907년에 열렸던 중국 개신교 선교사대회의 보고서, 로스 및 선정된 중국 개신교 선교사들이 저술한 <선교사대회 성경주석>, 1800년대 말에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중국어 성경 역본, 그리고 한국의 동양서원과 조선기독교서회가 1900년대 초에 출판한 한글 번역본들을 검토하였다. 연구 결과로서는, 위의 1890년 선교사대회에서 행한 알렉산더 윌리엄슨의 ‘해설 성경’ 제안이 최종적으로는 <선교사대회 성경주석>으로 귀결되었음을 밝혔다. 번역과 저술을 포함하는 로스의 주석서들은 신명(神名)의 차이를 반영한 다양한 판들로 출판되었으며, 사용된 성경 역본으로는 구약은 대표역본, 신약은 그리피스 존의 1898년판 천문리(淺文理) 역본임을 확인하였다. 한국의 동양서원은 로스가 저술한 5권의 신약 주석서를 번역 출판하였고, 조선예수 교서회는 동양서원의 유다서 주석을 추후에 새로운 맞춤법에 따라 수정하여 출판하였는데, 두 출판사 모두 주석서에서 로스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이 논문은 존 로스에 대한 연구가 성경 주석이라는 소재를 통하여 더욱 확장될 수 있으며 또한 <선교사대회 성경주석>이 중국과 한국에서의 기독교 신앙과 신학에 공시적 및 통시적으로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로마의 국경선을 298년에 국경선을 시네로 철수하였고, 메로에 왕조가 4세기 중반 이후 붕괴하자, 트리아콘타스코이노스에서 정치적인 공백이 발생하였다. 이 무렵에 이 지역에서 블레미스인들과 노바데스인들이 등장하여 충돌하였다. 먼저 블레미스인들이 394년에 탈 미스를 점령하였고 5세기 전반기에는 도데카스코이노스와 함께 동부 사막 지대의 에메랄드 광산을 개발하였다. 동부 사막지대에 거주하던 이들은 정치적인 공백이 발생하자 매장지와 목초지를 구하여 도데카스코이노스지역으로 이주하여 정치적으로 지배하면서 에메랄드를 중심으로 중개무역을 하였다.
5세기에 제2폭포 지역을 중심으로 노바데스인들이 등장하여 노바디아 왕조를 세웠다. 이 왕조의 실코 왕은 5세기 중엽에 부족연합국가를 형성하여 블레미스인들을 물리치고 도데카스코이네스 지역을 차지하였고 6세기에 접어들어 중앙집권화된 왕국으로 발전하였다. 이렇게 부족연합국가 단계를 넘어 중앙집권화된 왕국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실코 왕은 다른 전통 종교들과 함께 기독교도 하나의 종교로 인정하였다. 그러한 증거로 블란나 지역의 무덤들에서 기독교의 표지를 가진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고, 사람들을 함께 매장하던 풍습이 사라지다가 500년경에는 큰 무덤을 만드는 매장 풍습이 사라졌다. 동로마제국에서 선교사를 파송하여 나라가 543년에 정식으로 기독교를 수용하는데, 이것은 5세기 후반부터 기독교가 점진적으로 확산되는 과정의 정점으로 보인다.
독일 경건주의는 그 시기나 활동영역이 넓고 포괄적이어서 정의를 내리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정신을 계승하였을 뿐만 아니라, 18세 기계몽주의와 합리주의의 도전과 급격한 사회변화 가운데서 성경에 기반을 둔 기독교와 경건한 신앙생활을 위한 토대를 마련해주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런 관점에서 이 논문은 할레 경건주의의 성경해석학을 다룬다. 할레대학은 보편 해석학과 신학적 해석학이 다양한 학자들의 사상과 논쟁을 거쳐 이후 18세기에 해석학의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해석사의 관점에서 할레대학은 과도기신학-신신학(Neologie)-신학적 합리 주의의 제단계를 밟았다. 이런 출발점에 할레대학의 설립자인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의 성서해석을 위한 논문들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했기에 이를 중심으로 논문을 전개했다. 이를 통해 결론적으로 다양한 개념과 사상들이 난무하는 것처럼 보여도 내적인 논리정연성이 계승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즉, 해석학의 새로운 구상은 전통적인 개신교 성경원리가 문화적으로 변화된 기본조건에 부합되도록 하려는 의도에서 등장했다고 볼 수 있 다. 그래서 경건주의적인 신앙심의 개혁과 대학의 철학적인 합리주의 또는 근대의 역사적인 인식의 기원은 서로 다른 바탕 위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사회와 세계 속에서 정당성을 찾으려는 시도로 보아야 한다.
이 논문의 목적은 16세기 메노나이트 지도자였던 더크 필립스의 사상을 밝히고 그의 중심 사상을 논의함으로 그의 기독론이 보이는 교회에 관한 관점과 연결되어 있음을 밝히는 것이다. 먼저 더크 필립스의 생애를 간략하게 다룰 것인데 이를 통해 그의 신학의 형성과정과 그의 사역 환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더크는 동시대의 다른 종교개혁 지도자들과 달리 매우 독특한 기독론 (호프만의 ‘천상의 육체론’을 기본으로 한)을 발전시켰기 때문에 기독론은 그의 신학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틀이라고 할 수 있다. 더크에 관한 지금까지의 연구에서도 그의 기독론을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핵심 신학으로 여겨져 왔으며 실제로 더크의 저작의 분량에서도 기독론의 비중이 높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논문에서는 그의 기독론이 그의 보이는 교회의 관점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밝히며 이러한 관점에서 그의 기독론을 이해하고자 한다. 예를 들면, 더크의 기독론 안에 성육신의 논의가 신학적으로도 의미가 있지만, 그는 성육신의 교리는 신자들이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한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것으로 이해하며 성육신은 인간의 그리스도 안에 거룩한 본성을 갖도록 하는 데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조세핀 캠벨(Josephine Eaton Peel Campbell, 姜婦人, 姜慕仁)선교사는 1897년에서 1920년까지 한국여성들을 위해 선교에 헌신했던 미국 남감리회 여성해외선교부(Woman’s Board of Foreign Missions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의 선교사다. 1898년 배화여자대학의 전신인 ‘배화학당’을 설립하였다. 본고는 캠벨 선교사의 교육선교사상과 교육사업을 중점적으로 살펴보았다. 캠벨의 교육선교사상은 내한하자마자 쓴 첫 보고 서 서두에 잘 나타나 있다.
세상이 복음을 위해 준비된 것이 아니라 복음이 이 세상을 위해 준비되어 있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이 먼 지구의 구석진 곳에 있는 우리에게 얼마나 신실한지요? 어둠속에 머물고 있는 이 사람들을 위해 준비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나는 이것을 기쁘게 생각하고 있으며, 우리의 축복이요 특권입니다.(J. P. Campbell, "Communication from Mrs. Campbell," the korea Mission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1897), 15).
캠벨의 교육선교사상에 따른 선교 목적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한국 교회를 위한 여성 지도자를 배출할 학교 설립, 또 하나는 전도사업을 통해 특히 여성들을 위한 교회를 설립하는 일이었다. 한말 일제기 기독교계 여학교는 역사·문화·전통·풍속의 기반 위에 서 있는 ‘한국적 여성’, 초월적 영성을 가진 ‘기독교적 여성’, 민족의 암울한 현실을 자각하고 실천하는 ‘민족적 여성’이라는 세 가지의 주된 과제를 가지고 교육해야하는 과업을 안고 있었다. 배화의 교육을 담당했던 캠벨과 선교사들 및 교사들은 교육 과정 속에서 위의 세 가지 목표를 가지고 교육사업을 전개해 나갔다. 캠벨의 그리스도적인 인류애를 품고 조선 땅으로 왔다. “소외된 자에게 물 한 그릇 대접하라”는 예수의 명령에 따라 혼신(渾身)으로 선교사라는 ‘도구’ 가 되어 조선의 여성을 끝까지 사랑하며, 대접하며 살다가 1920년 11월 12일 68세를 일기로, 사랑하는 한국 땅에서 별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