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경우, 교회와 국가(Church and State)의 관계는 기독교의 탄생 이후 계속해서 연구되어 온 주제이다.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각 시대, 국가, 현실에 따라 매우 다양한 관계를 형성해왔다.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연구를 정리하면 대개 4가지 타입으로 요약할 수 있다. 교회와 국가의 일치, 교회 우선 혹은 국가 우선, 교회와 국가의 분리가 그것이다. 이 논문에선 이런 이론적 틀을 토대로 조선 후기에 천주교가 조선에 재 래되면서 국가와 천주교가 부딪히며 일어난 핍박과 박해 가운데 당시 천주교인들의 대응을 통해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고 대했는지 대표적 인물인 황사영과 정하상의 대응(백서(帛書)와 상재상서(上宰相書)) 를 통해 살펴보고 있다. 이 연구를 통해 이들이 각각 교회우선주의와 국가 우선주의의 유형에 속했음을 알 수 있고 이들의 대응이 향후 천주교의 전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또한 이런 차이가 왜 발생하게 되었는지를 검토하였다. 조선에 재래된 천주교는 하나였지만 교회와 국가의 대립과 갈등 그리고 박해 시에 천주교 안에는 하나 이상의 입장이 존재했고, 이런 입장은 시간의 흐름과 폭넓은 경험 그리고 교육에 의해 극단적인 입장에서 이해와 대화를 시도하는 보다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되어갔음을 알 수 있다.
본 논문은 4세기 예루살렘 교회에 초점을 맞추어 초기교회 입교절차의 신학적 메시지와 교육적 가치를 탐구하고, 한국 개신교회를 위한 몇 가지 시사점을 제시했다. 입교절차는 키릴로스의 세례 전 사순절 카테케시스와 세례 후 미스타고지에 근거해 재구성했고, 에제리아의 증언에 도움을 받았다. 입교절차는 세례예식 전, 세례예식, 세례예식 후의 세 단계로 구성되어 있고, 가르침과 예식이 치밀하게 짜인 거룩한 사회화 과정이라는 특성을 갖고 있다. 주된 신학적 메시지는 사탄의 통치에 대한 포기와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수용, 그리고 그에 따른 세계관과 가치관, 윤리관과 삶의 양식의 변화를 의미하는 회심과 성화다.
이 논문은 대한예수교장로회 규칙의 제정 과정과 내용적인 특징을 연구한 것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 규칙은 1907년 대한예수교장로회 노회에서 채택한 것으로 당시 같이 채택한 대한장로교회 신경과 함께 한국장로교회 최초의 헌법이라고 할 수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규칙의 제정 과정에서 노회를 위한 규칙과 부칙위원회는 웨스트민스터 정치모범을 제시했다. 그러나 연합공의회의 회원들은 곧 설립하게 될 대한예수교장로회 노회가 감당하기에는 어렵다는 이유로 좀 더 간단한 형태의 규칙을 채택했다. 이렇게 제정된 대한예수교장로회 규칙에 나타나는 장로교 정치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항존직을 장로와 집사 두 종류로 구분하고, 다시 장로를 목사와 치리장로로 구분했다. 둘째, 당회, 노회, 총회 등 치리회를 매우 수직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셋째, 교회직원을 항존직 중심으로 규정하고 당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던 영수, 조사, 전도부인, 전도사, 권서 등에 대한 규정은 미비했다. 넷째, 별도의 예배모범 없이 간결한 주일 예배 형식만 제시하고 있다. 다섯째, 시찰위원회와 같이 현장에 필요한 독자적인 제도를 만들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 규칙은 장로교회의 기본적인 정치체제를 따르면서 1907년 당시 한국장로교회의 상황을 고려한 내용도 포함하고 있다.
사탕수수 농장주들을 비롯한 미국 기업가들이 주도하고 미군이 협조하여 일어난 하와이왕국의 전복은 서부지역을 넘어 아시아로 진출하던 미국의 서구식민화과정으로 규정될 수 있다. 1800년대에 설탕산업은 하와이의 주요 산업으로 자리잡았다. 초기에 사탕수수 농장주들은 하와이 원주민, 빈곤한 유럽인, 그리고 남아메리카인들을 농장의 노동력으로 활용하였으나 그들은 열악한 노동조건 등의 이유로 농장에서 이탈하였다. 1800년대 후반에 농장주들은 동아시아로 눈을 돌려 중국인과 일본인을 끌어들였지만, 그들 역시 노동조건에 만족하지 못하고 심지어 파업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1895년에 이르러 자조적 일환으로 ‘하와이농장주협회’(HSPA)를 구성한 농장주들은 마침내 한국과 필리핀으로부터 노동력을 수입하여 중국인과 일본인의 부족을 채우거나 그들의 세력을 희석시키기를 희망하였다. 그들의 호소는 재한 미국공사 호레이스 알렌(Horace N. Allen)과 미국감리교 선교사 조지 히버 존스(George Heber Jones, 조원시) 등에 의하여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다. 1902년에 미국 본토와 하와이에서 하와이농장주협회 임원들과 만났던 알렌은 그 첫 작업을 주도하였다. 조선에서 미국의 정치적 영향력 및 경제적 이익을 위하여 노력하던 그는 조선 국왕 고종을 설득하여 유민원을 설치하고, 윌리엄 데쉴러(William Deshler)를 모집책으로 선정하여 하와이농장주협회의 부름에 응답하였던 것이다. 존스는 자신의 교구에 있는 신자들로 하여금 하와이로 이주하여 노동하도록 설득하였고 그 결과 1902년 말에 출항한 첫 이민 선박의 절반에 해당하는 노동자들을 하와이로 송출하는데 기여하였다. 하와이농장주협회의 순종적 노동력에 대한 요구는 무엇보다도 미국감리교회의 하와이선교부를 이끌어갔던 초기 감리사들, 와드맨(John W. Wadman)과 헨리 프라이(Henry Fry)에 의하여 적극적으로 응답되었다. 재정이 부족하였던 감리사들은 하와이농장주협회와 농장 주들에게 선교부를 위한 기부금을 지속적으로 요구하였고, 기부금에 대한 보답으로서, 한인 신자들로 하여금 농장에 협조하도록 격려하거나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에게 농장을 이미 떠난 그들의 동료들이 돌아오도록 종용하기도 하였다. 1905년에 와드맨을 돕기 위하여 하와이를 방문한 재한 감리교 선교사 아더 노블(W. Arthur Noble)은 한인 신자들이 하와이 농장의 지속적 번영을 담보하도록 ‘모범적 소수민족’(Model Minority) 담론을 펼치기도 하였다. 결국,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감리교 선교부와 한인교회들은 번성하였던 반면에 한인 노동자 자신들은 선교부로부터 노동조건의 개선을 위한 도움을 받지 못했고, 낮은 임금, 인종 및 국적별 업종의 차별, 잔인한 대우 등으로 인하여 빈곤과 곤경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미국이 20세기로 접어들면서 고립주의를 버리고 서부를 넘어 태평양과 동아시아로 진출하여 소위 ‘백인의 짐’ (the White Man’s Burden)을 짊어지 기를 자처할 때에, 하와이선교부는 주한 미국 공사와 선교사들의 강하고 지속적인 도움과 더불어 하와이농장주협회의 요청에 적극 응답하였으며, 이것은 결국 서구식민주의에 봉사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본 논문은 영혼치유적 구제론과 구속론적 구제가 요한 크리소스톰에게서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탐구한다. 영혼치유적 구제는 고대 철학적 치유의 관점에서 가난한 자들에 대한 도움을 통한 영혼의 평화의 회복을 의미한다. 유대-기독교 전통에서 자선은 또한 죄 용서와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중요한 수단으로 간주되었다. 대립적으로 보이는 이 두 전통들이 모두 크리소스톰의 구제설교에서 등장한다. 학자들은 그의 사상에서 철학과 신학이 분리되었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본 논문은 크리소스톰의 마태복음과 요한복음 설교를 면밀히 분석하여 이 두 전통들이 그의 구원론과 구속적 구제와 관련된 성경구절 해석을 바탕으로 유기적으로 통합되어 이교 철학자들과 연설가들의 이상을 대체하는 새로운 기독교적 치유론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크리소스톰에게 있어서 영혼의 병과 결과에 대한 철학적인 개념이 기독 교적인 죄와 심판의 틀 속에서 흡수되어 변화되었다. 죄는 마음의 평화를 깨트리는 욕망의 무질서나 잘못된 생각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으로 인한 그의 심판과 지옥의 형벌 아래에 있는 끔찍한 상태이다. 구제는 이러한 영혼의 모든 위기를 해결한다. 즉, 악덕을 제거하고 덕을 증진하여 영혼의 건강을 회복하여 궁극적으로 천국으로 향하게 한다. 크리소스톰은 그리스-로마의 철학적 치유 개념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그의 목양적인 목적에 따라 그것의 목적과 범위와 내용을 변혁하여 기독교적 영혼치유 구제담론을 만들었다.
3·1운동의 100주년을 기념하는 해에 각계에서 많은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다. 특별히 그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기독교는 각 교단별로 독립 만세운동 적극가담자의 신원을 밝히는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런 각 교단의 활동에 동참하기 위해서 안식일교회도 3·1운동에서 안식일교회의 역할을 조명하는 연구가 요구되었다. 본 연구는 이런 역사적 필요에 부응하여 3·1운동 당시에 안식일교회와 관련된 역사적 자료를 새롭게 정리하였다. 역사적 사료에 근거하면, 안식일교회에서 3·1운동에 참여한 첫 기록은 3월 2일 평남 거촌교회에서 박종은, 최경선 등의 주도로 500여 명이 모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 후 3월 6일에 평남 순안에서 진행된 만세운동에서 안식일교회가 경영하는 사립의명학교의 교직원생도 수 명이 포박된 기록이 나타난다. 3월부터 5월까지 3개월간 전개된 독립만 세운동에서 입감된 9천여 명의 사람들 중에서 안식일교인은 5명으로 집계 된다. 본 연구는 이 5명의 안식교도의 신원을 파악하기 위해서 관련 자료를 조사하였다. 그 결과 박종은, 전홍석, 강영국, 홍종엽, 최경선이 이 명단에 포함되는 것을 밝혔다. 이와 더불어 1년 후에 상해임시정부의 명령에 따라 추진되었던 대한독립1주년기념축하경고문 배포문 사건이 있었는데, 이 사건은 안식일교회 출판소인 시조사와 안식일교인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이 사건으로 유진익, 유진상, 권학규 등의 안식일교인이 체포되어 감옥에 갔다. 그 외에도 순안병원의 의사였던 러셀 선교사가 총에 맞아 부상을 입은 청년을 치료해 준 것이 발각되어 3개월간 심문을 받은 사건도 있었다. 이처럼 안식일교회는 교인들과 시조사와 순안병원과 선교사를 통해서 3·1운동에 가담하였음이 여러 역사적 자료들을 통해서 밝혀진다. 1904년 한국에 복음이 시작된 안식일교회는 15년 후에 발생한 민족독립운동에 동참하여 민족의 운명과 함께 하였다.
본 논문은 한반도 분단 극복에 대한 한국 기독교의 관점을 민족주의적 담론과 탈민족주의적 담론으로 구분하여 논의한다. 이러한 논의를 통하여 각각의 담론에서 평화와 통일이 서로 맺는 관계의 의미를 심도 있게 분석 한다. 통일의 당위성은 민족주의적 패러다임에 의해 추동 되었고, 민족주의적 관점이 그 당위성에 정당성을 부여 하였다. 이 관점은 남과 북은 원래 하나의 민족이고, 역사를 공유하고, 같은 언어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남과 북의 분단은 비정상적 상황이라고 전제한 후, 이러한 왜곡된 현실은 통일로 극복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 연구에서는 민족주의적 기독교통일운동의 대표적인 관점으로 1988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발표한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 을 분석한다. 민족주의적 통일론 속에서 평화는 통일의 하위범주 였고, 독자적 위치를 가지 못했다. 통일이 평화를 지도하였다. 1990년대 이후로 민족주의적 담론은 민주화를 통한 시민운동의 부상, 민족정체성에 대한 국가정체성의 점차적 우위, 2000년대 이후 평화담론의 확산, 세계화에 따른 다문화주의와 다원주의적 경향의 대두 등의 역사적 변화 속에서 비판에 직면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 속에서 탈민족주의적 평화통일 담론이 부상하였다. 탈민족주의적 입장에 서 있는 기독교 통일담 론으로는 평화주의적 관점, 화해를 강조하는 입장, 복음통일이라는 입장 또는 다문화주의적 입장에서 전개된 통일신학 등이 있다. 본 논문은 이러한 탈민족주의적 담론들을 논의하면서 그 담론들이 제시하는 평화와 통일의 길항적 관계를 검토한다.
광주 선교 스테이션은 의료활동을 통해서 복음의 접촉점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당시 열악한 위생상태와 질병을 통하여 죽어가는 사람들을 치료해 주었다. 특히 광주 선교스테이션의 한센병과 폐결핵환자에 대한 치료는 헌신적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치료를 받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함으로 이를 통하여 주님께 돌아오는 이들이 많았다. 환자들을 찾아가기도 했다. 의사가 없는 지역에 순회진료를 했고, 그리고 농어촌 의료봉사, 보건예방교육 등을 통하여 국민건강 증진과 위생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켰다. 의료활동은 광주지역을 넘어서 여수와 순천으로 그리고 남부지역으로 확대되었다. 또한 치료와 회복 그리고 재활 프로그램을 통하여 사회의 소중한 일원으로 살아가게 했고, 의료인재를 양성해서 장차 선교한국으로의 토대를 마련했다.
코스마스는 6세기 중엽에 알렉산드리아에서『기독교지형학』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지구가 둥글다는 아리스토텔레스-프톨레미의 그리스 우주관을 비판하고 지구가 평평하다고 주장하려는 목적으로 저술되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자신이 젊어서 항해무역을 하면서 여행을 했던 에티오피아와 타프로바네와 인도와 중국 지역과 이루어지는 중계무역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바다와 만을 통한 국제무역활동은 인류의 삶에 필요한 물자들을 유통시켜 상호간의 우의를 증진 시킨다고 정의하고 있다. 그는 당시 자신 이 직접 방문했던 에티오피아의 아둘레를 중심으로 향료를 비롯한 다양한 무역이 이루어지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자신이 직접 방문하지 않았던 타프로바네에서 인도와 중국 등지와 이루어지는 비단과 향의 무역을 설명한다. 그는 특히 인도의 동물과 식물과 해양식물을 소개하면서 에티오피아의 동물들과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으며, 각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중계무역을 편견 없이 문화횡단성의 시각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는 6세기 동서양을 통해 이루어지는 무역을 통해 이러한 상품교역과 함께 각 지역에 전해진 기독교의 활동들을 설명하여 기독교 확산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이 논문은 WCC를 중심으로 20세기 세계에큐메니칼 운동의 역사와 방향을 평가하고 21세기의 시대의 징조와 신학적 변화를 고찰하고 한국교회의 에큐메니칼 운동의 방향을 찾는데 기여하려는 목적이 있다. 20세기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은 선교, 봉사, 신학의 일치에서 WCC의 창립으로 이어 졌고, 그후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은 교회일치, 정의와 평화, 생명보전의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21세기는 세계기독교의 중심이 남반구로 이동하였고, 경제적 양극화와 다원주의, 문명충돌과 같은 문명전환 현상들이 나타나면서 서구 기독교가 세운 에큐메니칼 질서가 전반적으로 해체되는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그 결과 세계 에큐메니칼 신학은 생명과 창조, 화해와 치유, 다양성 속에서 문화적 정체성, 삼위일체론적 보편주의를 강조하게 되었다. 과연 세계 교회와 에큐메니칼 운동은 자본이 지배하는 이 질서 속에서 성령의 역사를 의지하고 예언자적 특성, 신학적 지성, 지도자들의 도덕성을 회복해 갈 수 있을까? 그리고 에큐메니칼 운동은 유럽기독교와 비유럽 기독교의 갈등을 해소하고 미래를 열어갈 수 있을까? 제10차 WCC 부산총회 이후 세계교회는 한국교회가 신학적으로 재정적으로 유럽 교회와 비유럽 교회들 사이에 다리를 놓는 역할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한국교회는 여러 측면에서 쇠락의 징후를 보이고 있어서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는 일이 쉽지 않다. 향후 10년 동안 한국교회의 영적 에너지를 어떤 곳에 투자하느냐에 따라 한국교회의 미래는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 신앙고백은 한 순간에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시대와 상황에 따라 발전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에 나오는 1세기 초기 단계의 신앙고백부터 공의회의 결과물로 나온 4세기 발전된 신조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신앙고백은 계속 발전했다. 이러한 발전과정에서 정통신앙고백이라고 판단하는 기준은 각 시대마다 존재했고, 초기에는 대부분 사도적 기원으로 판단했다. 물론 성경 그 자체가 기준이었지만, 다양한 성경해석의 문제 앞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기준은 바로 사도였다. 그러므로 사도들의 성경해석과 그들의 신앙은 정통이라 인정받았고, 이러한 사도성에 기준을 둔 신앙고백은 발전해서 4세기 공의회를 통한 신조까지 이어졌다. 본 논문은 성경에 나타난 신앙고백 이외에 사도들로부터 인정된 초기 기독교 신앙고백들의 내용을 밝혀내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 특히 그 범위를 성서시대를 넘어선 1세기 후반부터 2세기 중반 ‘신앙규범’(regula fidei)이 등 장하기 전까지 나타나는 기독교 신앙고백의 초기단계를 살펴보았다. 이에 클레멘스 제 1서신과 이그나티우스의 일곱서신과 아리스티테스 저서와 순 교자 유스티누스의 저서를 다루면서 사도들의 신앙고백의 요소들을 찾아내고 이를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