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논문의 목적은 요안네스 카시아누스의 『제도집』과 『담화집』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철저하고 자발적인 부의 포기와 가난의 지속’이라는 주제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반복되는 이유를 밝히는 것이 다. 카시아누스는 5세기 초 남부 갈리아 지역에서 수도사로 활동했고 『제 도집』과 『담화집』을 수도문헌으로 남겼다. 두 권의 수도문헌은 전통적으로 이집트와 동방의 수도생활을 서방, 특별히 갈리아 지역의 수도사들에게 전 할 목적으로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카시아누스의 수도문헌에는 철저한 가난이라는 주제가 의도적이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반복되고 있다. 그런데 카시아누스 연구가들은 그동안 가난의 주제 뿐 아니라 그것이 강조 되는 이유와 배경에 관해서 깊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 연구논문은 카시아누스의 가난에 대한 강조가 의미하는 바를 밝히기 위해서 먼저 『제도집』과 『담화집』에서 가난에 대한 강조가 어떻게 나타나
2017년은 종교개혁 500주년의 해이다. 독일의 루터10년 프로젝트처럼, 한국교회 역시 많은 학술 심포지엄을 계획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서 종교 개혁 내지는 루터 신학의 세계적인 의미를 찾을 것이다. 본 논문은 루터의 신학에서 “무엇이 종교개혁적인가?”를 다루었다. 관점에 따라서 루터 신학 의 핵심은 다르게 선택될 수도 있다. 필자는 한국교회의 개혁과 갱신을 염 두에 두었고, 그 결과 루터 신학의 바른 이해와 적용을 위해 ‘이신칭의’, ‘십자가 신학’, ‘만인제사장직’을 선택하여 논했다. 칭의의 조건은 그리스 도를 믿는 믿음이다. 그렇지만 칭의는 종결이 아닌 온전한 그리스도인을 향한 시작이다. 신자의 거룩한 삶이 칭의와 더불어 시작되고, 이 세상에서 생을 다하기까지 함께 간다. 그것이 무엇이건 인간이 할 일이 있다면, 칭의 이후의 일이며, 칭의 이후의 일이 역으로 칭의에 영향을 줄 수 없다. 즉 칭 의를 위해 인간이 할 일은 없지만, 거룩한 삶은 칭의와 더불어 가는 것이 다. 십자가 신학은 하나의 일하심의 한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인식한다. 이것은 가시적인 것 혹은 외적인 권위와 규모 를 통해 신을 파악하려했던 중세교회의 영광의 신학 내지는 스콜라신학을 거부한다. 물질주의에 대한 한국교회의 의존성, 기복 및 개교회 지상주의 는 중세교회의 영광의 신학과 다를 바가 없다. 만인제사장직은 세례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적 평등의 선언이자, 직업 활동 을 통한 소명의 성취를 요구한다. 한국교회 역시 성직자와 평신도라는 이 분법적 틀을 희석시켜야 하며, 동시에 교회 밖 직장과 사회에서 직업 소명, 즉 제사장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종교개혁의 자랑스런 유산을 물려받은 프로테스탄트의 후예이다. 마르틴 루터의 이신칭의, 십자가 신학, 만인제사장직을 바르게 이해하고, 실천하여 교회의 교회됨을 회복하는 분 기점으로 삼아야 한다.
본 연구의 목적은 행복에 대한 웨슬리의 관점은 무엇이며 웨슬리의 시대 인 계몽주의 시대 속에서 그의 관점이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를 살펴보는데 있다. 당시 계몽주의 시대에 사람들은 즉각적인 만족감을 동반하는 감각적 쾌락들을 행복과 연결시키는 경향이 만연했다. 이러한 시대 환경 속에서 웨 슬리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행복은 “아마도 같은 시간에 시작해서 끝나 는 가볍고 사소한 쾌락이 아니라 영혼을 만족시키는 웰빙(well-being)의 상 태로서 꾸준하고 지속적인 만족감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하며 행복과 성결을 연결시켰다. 즉 웨슬리는 인간 삶의 진정한 목적으로서의 행복이 성 결과 함께 한다고 주장했다. 웨슬리는 이러한 결합을 통해 인간 존재와 인 간 삶의 목적인 탐구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기독자의 변화된 삶의 당위성을 설명했다.
본 연구는 19세기 문화-프로테스탄티즘의 낙관적 종말론을 기독교사상 사적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의 다른 이름인 문화-프로테스탄 티즘은 기독교 신학을 철학화하여 정통주의의 안티테제로 등장한 신학사 조를 말한다.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등장한 합리적 회의주의로 인해 기독교 신앙이 도전을 받게 되자 그에 대한 학문적 응전이 필요했는데, 문화-프로 테스탄트 신학자들은 칸트와 헤겔의 인식론에 기초해서 그 과제를 해결하 려 했다. 특별히 인간의 선의지로 실현할 윤리적 하나님 나라에 기초해 종 말론을 내재적, 낙관적으로 이해하는 측면에서 문화-프로테스탄티즘은 근 대 이성철학의 낙관주의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 문화-프로테스탄티즘의 주 요 학자인 슐라이에르마허와 리츨과 하르낙은 하나님 나라를 역사와 문화 속에 내재하는 것으로 해석하여 낙관적 종말론을 확립하였다. 이와 함께 근대 진보적 낙관주의에 영향을 받아 세속적 유토피아의 실현을 하나님 나 라와 일치시킴으로써 기독교 종말론의 낙관적 이해를 확립하였다. 이와 같 이 종말론에 대한 낙관적 이해는 재림의 지연에 따른 성서적 종말론의 딜 레마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신학적 원리를 제공해 주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있다. 그러나 이성철학에 기초한 근대 계몽주의적 진보주의가 실패 한 상황에서 문화-프로테스탄티즘의 낙관적 종말론 역시 사상적으로 도전 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20세기 기독교는 문화프로테스탄티즘이 실패한 자 리에서 새로운 신학적 종말론을 모색하면서 다양한 이해를 발전시켰다. 결 과적으로 19세기 문화-프로테스탄티즘의 낙관적 종말론은 변증법적으로 기독교 종말론을 발전시키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세대주의 전천년설은 18세기에 성령론과 삼위일체적 세대론의 해석법으로 존 웨슬리의 신학을 체계화시킨 존 플레쳐에게서 부분적으로 발견되고, 18세 기 말과 19세기 초 영국의 캠브리지 대학과 옥스퍼드 대학의 종말론에 관한 가열찬 담론 가운데 발전되었으며, 성경예언연구를 통해 사도행전적 오순절 현상의 분출을 경험한 어빙의 알버리써클에서, 그리고 19세기 후반 영국, 이 어 북미에서 개최된 일련의 성경예언대회에서 지속적으로 논의되고 확립된 종말론이다. “세대주의의 아버지”라 칭해진 존 다비가 신학적 독창성으로 세 대주의 이론을 창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상기한 영국의 세대이론과 역사 주의 전천년설 및 오순절운동의 교차로 위에서 발전한 신학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19세기 초 영국에서 구체화된 세대주의 전천년설은 동시대 교회지도 자들의 종말론과 일치하지 않았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의 마찰을 야기하 기도 하였지만, 복음주의 신앙을 관철한 성서적 교회회복운동이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북미의 세대주의 전천년설 확산의 결정적 견인차는 일련의 성경예언대회였다. 이는 개혁교회의 피어 선과 브룩스, 침례교회의 고든과 무디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고, 더 나아가 급진적 성결운동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에큐메니컬 연합전선을 펼쳤 다. 한국에 세대주의 전천년설이 한 교단의 신학으로 자리 잡았을지라도 그를 산출한 19세기 영미성경예언대회는 장로교와 침례교, 감리교와 성결 운동지도자들을 총망라하는 초교파적 협력을 창출해내었다. 이러한 협력으 로 기독교의 중심축을 성경과 성령 및 다시 오실 그리스도에게로 옮기는 19세기의 에큐메니칼 교회개혁운동이었다. 교회연합의 정신 가운데 추진 된 북미의 성경예언대회는 성경에 절대적 권위를 부여하며, 성령의 현재적 이고 초자연적인 활동을 확신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지상 대명령인 세계 선교에 주력하였는데, 이러한 결합이 세대주의 전천년설을 전세계로 확산 시킨 모판으로 작용하였다. 세계를 교구로 삼은 메소디스트 뿐만 아니라 세계선교를 촉진시킨 19세 기 선교동원가들이 전천년설을 지지하는 성경예언대회의 중심인물이었기 에, 세대주의 전천년설은 학생자원운동의 수로를 따라 남반구로 확산되었 고 세계기독교의 형성에 주요 신학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오늘날 남반구의 주류가 된 오순절운동의 신학적 기초를 마련한 선교와 성령 중심의 종말론 이었다. 기독교기관의 재화축적과 과학기술의 진흥에 어깨를 맞추고자 질 주하던 19세기 교회의 행로에 브레이크를 밟고 다시 인간의 거룩 및 영혼 의 구원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는 일종의 영성운동이라 볼 수 있다. 생명 과 진리의 분여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와 거룩한 성령의 초자연적 개입을 긍정하므로 인간의 근본적 성품변화를 유도하고 거룩한 성품으로부터 깨 끗한 사회로의 변화를 유도하는 종교관과 세계관을 강화하였다. 세대주의 전천년설은 세속화되고 교권화된 교회의 성서적 본질을 회복하려는 19세 기의 초교파적 교회개혁운동이었다.
본 논문은 1895년 미국 북침례교 계통의 클라렌돈가침례교회(Clarendon Street Baptist Church) 내에서 개인의 후원으로 설립된 초교파 선교단체인 엘라씽기념선교회(Ella Thing Memorial Mission)의 한국선교에 대한 연구 이다. 본 연구가 갖는 중요성과 역사적 의의 다음과 같다. 첫째, 엘라씽기 념선교회의 한국선교는 교파 선교회가 아닌, 한 개인의 헌신에 의해 설립 된 소규모 초교파 선교단체가 태평양을 건너 먼 이국땅 한국에서 선교의 열매를 맺은 첫 사례라는데 있다. 한국의 개신교 선교는 1884년부터 시작 됐는데, 주로 교파 선교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대표적으로 4개의 장로 회 선교부(북장로회, 남장로회, 호주빅토리아장로회선교회, 캐나다장로회) 와 2개의 미국 감리회 선교부(북감리교, 남감리교), 영국성공회가 그것이 다. 한편, 초교파적인 선교단체의 후원에 의한 독립선교사들도 속속 내한 하였다. 1888년에 입국한 게일(J. S. Gale)은 토론토대학 기독청년회 (YMCA) 후원을 받았으나 1891년 미북장로회로 이적하였다. 게일과 함께 입국한 하크니스(R. Harkness)는 한국연합선교회(CUM) 후원을 받았으나 1889년 6월 예기치 않은 질병으로 인해 한국을 떠나 일본을 거쳐 귀국하였 다. 1889년 펜윅(M. C. Fenwick)은 한국연합선교회(CUM) 후원으로 내한 했으나 1893년에 귀국하였고, 1890년에 입국한 하디(R. A. Hardie)도 토론 토의과대학 기독청년회(YMCA) 후원으로 내한했지만 1898년에 미남감리 회로 소속을 옮겼다. 1893년에 입국한 매켄지(W. J. Mackenzie) 역시 캐나 다 독립선교사로 내한하였으나 1895년 일사병과 신열(身熱)에 의한 정신 이상으로 권총 자살함으로 막을 내렸다. 이처럼 초기에 내한했던 초교파 선교사들은 교파선교사로 이적하거나 귀국 또는 단명함으로 뚜렷한 선교 열매를 맺지 못했다. 그러나 엘라씽기념선교회는 약 6년간 한국선교를 지 속하여 교회설립이라는 놀라운 선교의 열매를 맺었다. 둘째, 엘라씽기념선교회는 당시 선교지 분할정책 속에서 선교의 사각지 대를 잘 인식하여 선교를 시도했다는데 의의가 있다. 선교지 분할정책은 한국교회사에서 그 명암이 뚜렷할 정도로 공헌과 한계가 분명하다. 선교사 간에 불필요한 마찰 해소하고, 선교의 재정 낭비를 줄일 수 있었다는 데는 공헌했으나, 30년 이상 이것이 한반도에 적용되므로 인해 선교회 배경에 따라 교회의 특성이 형성되고, 지역성이 더해져 교권분쟁과 교파분열의 단 초가 되었다는 비판은 면할 길이 없다. 폴링의 충청도 선교는 남장로회의 전라도 선교 집중으로 인한 선교 사각지대를 효과적으로 접근했다는데 의 미가 있다. 처음부터 오지선교를 추구했던 엘라씽기념선교회 선교의 빛이 난다. 교파 간의 불필요한 경쟁을 피하면서도 선교의 불모지에 복음을 전 했다는 것은 선교의 후발주자로서 매우 바람직한 선교전략이 아닐 수 없 다. 물론 약 6년 남짓의 짧은 기간이 아쉽지만, 그래도 엘라씽기념선교회의 수고와 헌신은 헛되지 않았고, 훗날 펜윅에게 인계되어 한국 침례교회 형 성의 중요한 토대요 모판이 되었음을 감안할 때, 엘라씽기념선교회의 활동 은 재인식되어야 하고, 더 많은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 논문은 한치진이 『基督敎人生觀』을 통해 1930년대 한국교회의 문제 점을 진단하고 그 개선방안을 제시한 논지를 고찰하는 데 목적을 둔다. 이 연구에서는 그의 대표적인 저서 『基督敎人生觀』 뿐만 아니라 본 주제와 관련된 다른 주요 문헌들도 참고할 것이다. 이 책은 일제강점기인 1934년 에 출판되었으며 기독교윤리관에 입각하여 저술되었다. 그는 목사도 신학 자도 아닌 평신도의 위치에 있었지만 기독교윤리에 뛰어난 지식을 갖춘 인 물이었다. 한치진의 저서 『基督敎人生觀』이 남긴 중요한 교훈들을 정리하 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개혁에 대한 관점이다. 그는 당시 한국교회가 여러 방면에서 심각 하게 타락했다는 점을 직시하고, 그리스도인들이 사회를 개혁해나가기 위 해서는 먼저 교회 안에 내재되어 있는 내적 부패상부터 척결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둘째, 실천적인 관점이다. 한치진은 엄격한 규범을 제시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에서 선행을 추구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 을 따라 기독교윤리를 실천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이 저서에 높은 실업률, 젊은 세대 교육, 병약한 환자들, 삶과 노동, 파시즘과 권위주의 등 다방면 에서 윤리적 주제들을 담았다. 셋째, 세계에 대한 관점이다. 그는 교회는 반드시 만물의 궁극적 중생(重 生)을 고대하면서 현세와 지복(至福)의 내세 양 지평에 동등한 관심을 가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연구가 향후 한치진의 ‘기독교 윤리관’, ‘기독교 심리학’, ‘기독교 교 육학’, ‘신앙적 사고’ 등의 연구 작업으로 더욱 확장되어지기를 기대한다.
독촉국민회는 이승만과 김구가 연합하여 1946년 2월에 지방우익세력을 조직하려고 만들었던 연합조직이었다. 초기에는 오하영과 김구가 중심이 되어 조직을 이끌었으나, 이승만은 지방 조직을 확산시킨 남부지방 순회여 행 후 1946년 6월에 열린 2차 전국대회에서 중앙조직을 장악하였다. 이 조 직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신익회의 정치공작대 세력의 적극적인 참여가 중 요한 요인이었다. 그는 6월 29일에 민족통일총본부를 조직하였고, 7월에 이 조직에 애국단체 총연합회를 통합시켰다. 이러한 세력 확장을 이룬 후 에 독립촉성국민회의 운영에서 드러난 난맥상을 해결하기 위해 1946년 9 월 7일에 제3차 전국대회를 열었는데, 임원진에 임정세력이 상당히 참여했으나, 중앙위원조직은 이승만이 확실하게 장악하였다. 이승만은 1946년 말에 단독정부 수립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미국정부에 전달하기 위해 미국방문에 나섰다. 그의 미국방문기간 동안 임정세력은 비 상국민회의, 민족통일총본부, 독촉국민회 등을 통합하여 임정봉대론에 입 각한 임시정부수립운동을 전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을 지지하는 배은희와 이윤영등의 반대로 임정세력의 이러한 통합운동은 좌절되었다. 그렇지만 김구 중심의 임정세력은 임정봉대론을 계속 추진하였으며, 이러한 책임을 물어 이승만은 1947년 4월에 열린 제4차 전국대회에서 임정세 력을 정리하고 자신의 지지세력을 중심으로 독촉국민회를 재편하였다. 그 이후에 점차로 단독선거를 지지하는 세력을 중심으로 임원진을 개편한 후 에, 이 조직을 바탕으로 1948년 5월 총선거에 임하였다. 그 결과 제헌국회 의원 가운데 가장 많은 55명이 독촉국민회에서 선출되었다. 이러한 독촉국민회 중앙조직에 상당수의 기독교인들이 참여하였다. 초기에는 오하영이 이승만과 김구 사이의 중간역할을 하면서 부위원장을 하 였다. 중앙에서 이승만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인물로는 배은희목사와 이관 운목사 그리고 이승만의 직계였던 송필만, 임영신, 북한에서 월남한 이종 현 등이었다. 특히 월남기독교인들로 주목되는 그룹이 이윤영과 이종현, 변성옥이었다. 그리고 최태용은 반공과 국민운동을 통한 건국운동이란 점 에서 독촉국민회의 지지자가 되었다. 독립촉성회 중앙조직 가운데 기독교인들은 적어도 20%에서 40% 정도 를 차지하였다. 이러한 비율은 해방공간에서 기독교인들이 우파 세력의 중 심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것을 잘 보여주며, 이 조직의 임원진에 참여한 기 독교인들은 대부분 일제 강제기 동안 민족운동에 참여했던 인물들이었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지지 기반이었다.
본 논문은 해방 후 전재민에 대한 한국 사회의 구호활동을 살펴보려고 한다. 당시 인구의 1/10-1/6에 해당하는 전재민이 남한에 유입되면서, 한국 사회는 커다란 변동을 경험했는데, 경제적 위기는 극에 달하게 되었다. 이 에 전재민들의 성향에 대해서는 사회학적인 방법을 그리고 전재민 구호활 동에 대해서는 사회복지의 측면에서 살피고자 한다. 미군정청에서 활동한 주요 한국인들이 해외 유학파 기독교인이며, 교회는 민간구호활동에 적극적이었다. 특히 전재민 교회는 자신 스스로가 자력갱생 을 이루는 모범적인 공동체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는데, 이를 통해 기독교가 전재민구호활동을 통하여 한국현대사회에 기여하였음을 보이려고 한다.
해방 후 미군정기간에 한국사회의 가장 큰 문제였던 전재민에 대한 구호활 동은 종교인들의 당연한 관심의 영역이었을 것이지만, 이에 대한 연구는 없었 다. 또한 당시에 대한 연구가 지나치게 정치역학의 관점에서만 조명되었다. 그런 점에서 이 논문은 기독교인들의 인도주의적 활동을 설명하면서, 전재민 구호활동이 민간인 주도에서, 미군정청중심으로, 그리고 더 나아가 전재민 스스로 자력갱생의 과정으로 발전되었다는 것을 밝히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