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누스와 기독교의 연관성에 대한 연구는 부족한 1차 자료로 인해 여전히 많은 논란 가운데 있다. 그가 기독교인이 된 과정은 오랜 기간에 걸친 전환이었다. 그러나 일시적 회심이 아니라고 해서 그의 통치 시기가 기독교에 가져온 의미조차 퇴색 되어져서는 안 된다. 물론 정치적 의도를 배제하고 생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부륵하르트의 주장처럼 그 나름의 종교적 이해 혹은 신앙적 가치관 없이 오로지 정치적 목적에서만 기독교 우대 정책들을 펼쳤다거나, 기독교가 국가 종교가 되는 발판을 마련했다고도 보기 어렵다. 그의 정치적 의도 가운데는 분명히 로마의 옛 종교가 지녔던 공공의 안녕(salus publica)을 비는 역할을 기독교가 대체해 주길 바란 의도가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의 기독교적 윤리성 혹은 신앙인으로서의 자세가 옳은지 그른지를 떠나 그의 시대가 기독교에 열어준 종교적 자유와 발전 가능성은 그 전 황제들과 비교했을 때 비교할 수 없는 것 이었다. 사학자들의 주장처럼 분명 그의 삶 후반기에 저지른 근친 처단은 기독교 윤리적으로는 허용될 수 없는 사건이다. 또한 그가 직접 지시하진 않았지만 후대에 발생한 정치와 종교의 밀착으로 인한 부정적 영향 또한 분명하다. 분명한 것은 콘스탄티누스는 로마의 옛 종교를 기독교로 대체하고자 했으며 그러한 종교 정책을 펼쳤다는 것이다.
본 논문은 윤치호가 1885년부터 1888년까지 중국 상해에 머물며 남감리회 미션스쿨인 중서서원에서 수학하던 시기를 그 연구대상으로 삼아, 윤치호가 중서서원에서 받은 근대교육과 종교교육에 대해 살펴보면서, 미션스쿨이 윤치호의 개종에 미친 영향에 대해 고찰해 보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이에 대해 본 논문은 첫째, 윤치호가 상해에서 수강한 과목들을 당시 중서 서원의 8년 학제에 포함된 교과목들과 비교하면서 윤치호가 그 중 3-6학년 도 과정을 수학한 것을 밝혔으며, 둘째, 중서서원의 종교교육을 검토하면서 중서서원은 세속학교가 아닌 전형적인 미션스쿨로서, 윤치호도 그가 받은 모든 수업에서 성경이 교재로 사용되었고 매일 두 차례씩 종교예식을 갖고 토요일에는 성경강독 수업을 받았음을 살펴보았다. 셋째, 선행연구에서와 달리 윤치호가 처음 예배당에 간 것은 1885년 2월 15일이 아닌 2월 8일이었으며 교회에 데려간 사람은 알렌이 아닌 로얄 선교사였음을 밝혔고, 이를 통해 윤치호가 중서서원에 입학한 직후부터 선교사들의 특별한 선교적 관심을 받았을 가능성이 컸음을 추론하였다. 결국, 윤치호는 윤리적 종교에 대한 개인적 관심 및 근대 사상에 대한 관심에서 스스로 기독교 에 접근하기에 앞서, 이미 미션스쿨의 종교적 학풍과 선교사들의 전략적 전도 과정을 통해 이미 기독교적 환경에 놓이게 되었던 것이었다.
본 논문의 목적은 교회 공간 활용을 분석하여 지역교회가 사회와 무엇을 공유하고 영향을 끼쳤는지를 밝히는데 있다. 이 목적을 위해 정동제일 교회를 택하여 해방 후 교회 공간이 어떻게 활용되었는지 신문, 보고서, 기사 등을 분석하였다. 여기에서 공간은 단지 물리적인 공간만이 아닌 인간의 활동과 공간적인 실천이 결합된 공간을 의미한다. 이것을 “사회적 공간”(social space)으로 부른다.
해방공간에서 다양한 단체와 기관들은 자신들의 활동을 위하여 공간이 필요했다. YMCA나 학교강당, 천도교 강당 등은 실내공간으로 선호도가 높았다. 특히 교회건물은 예배공간만이 아닌 다양한 활동 공간으로 사람들에게 제공되었다. 서울에 위치한 정동제일교회는 수도권에서 많은 사람들이 선호한 공간이었다.
김인영 목사가 재직하던 시기를 전후로 공간 활용도가 더욱 높았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신흥우와 함께 YMCA와 적극신앙단에서 활동했으며, 해방 후에는 한국기독교연합회에서 활동했다. 기독교 정신 위에 대외적으로 활동했던 그의 행동은 정동제일교회 공간에서도 그대로 투영되었다. 비록 친일행적을 계기로 이전처럼 정치 일선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그는 시대적인 혼란을 극복하고 새로운 국가를 기대하며 시민사회에 공간을 제공하였다.
더 나아가 여러 시민단체들은 세계정세를 파악할 수 있도록 세계적인 석학이나 종교지도자들을 초청하여 시민들의 의식을 함양시켰다. 교회는 시민들의 다양한 욕구들 즉 문화적인 것, 경제적인 것, 결혼식과 장례식 등의 일상적인 것들을 위하여 공간을 제공하였다. 이것은 교회가 시민들의 생각과 욕구를 공유했음을 의미한다. 특히 이승만과 관련된 단체들에게 결집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함으로 그의 정치활동을 지원하였다. 반탁과 관련된 집회와 강좌는 서울지역의 우파를 결집시켰고, 전국대회를 성공적으 로 개최한 독촉국민회는 1948년 제헌국회에서 다수당이 되어 정국을 주도 하였다.
정리하면 정동제일교회 공간은 사회적 관심을 공유하는 것을 넘어서 새로운 국가 건설을 세우는데 그 힘을 결집시키는데 영향을 주었다는데 의의가 있다.
일제의 추방으로 폐쇄되었던 전주 스테이션은 1947년에 복구되어 활동을 시작했는데, 1948년에는 9명의 선교사들이 활동하였다. 이들 가운데 인돈, 위인사, 조요셉 등은 노회원으로 교회들의 목회활동을 도왔지만, 주로 교육분야와 의료분야에서 활동하였다. 인돈 부부는 신흥과 기전의 교장으로, 윈과 폰테인은 한예정신학교를 위해 사역하였고, 구바울 부부와 변마지는 예수병원에서 사역하였다.
해방 후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합병되었던 전주 시내 5개 교회들이 문을 다시 열면서 교회가 성장하기 시작하여 1952년에는 12개로 늘어났다. 1952년부터 기장과 예장으로 총회가 분열하면서 노회도 분열하였고, 1959년에 다시 예장 합동과 통합으로 분열하였다. 이 과정에서 1960년에 기장 전북 노회는 16개의 교회로, 통합 전북노회는 1962년에 자립 9개와 미자립 6개로 늘어났고, 합동은 1960년에 7개로 출발하였다.
인톤 선교사가 1946년 7월 귀국한 후에 신흥과 기전 학교의 복교가 추진되어 11월에 문을 열었고 1950년에 중고등학교로 분리되었다. 강흥모에 의해 1955년에 영생중학교와 영생고등학교를 인가받았고 1963년에 영생여자중학교를 인가받았다. 그 결과 1960년대에 전주에서 기독교학교가 중학교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0-30%이고, 고등학교에서는 30-40%를 차지하였다. 고등교육기관은 강흥모가 세운 영생대학교와 전주공업전문학교가 오늘 날 전주대학교와 전주비전대학으로, 여자성경학교였던 한예정성경학교가 1968년에 한일여자신학교로, 예수병원의 간호기술학교는 1973년에 간호전문학교로, 기전여자고등학교에서 1974년에 기전전문학교로 발전하였다.
전주예수병원은 1948년 45병상으로 출발하여 1960년에는 160개 병상의 종합병원이자 지방거점병원으로 발전하였다. 구바울, 설대위, 켈리, 필립 등의 다양한 분야의 의사들이 진료를 하였고, 전문수련의 병원으로서의 역할을 통해 1960년대에는 외과, 이비인후과, 안과, 신경외과 등과 함께 암전문치료 병원으로 발전하였다. 전주는 미션 스테이션의 복구와 전주 장로교회들의 협력을 통해 교육과 의료의 인프라를 구축하고 많은 교회들이 설립되어 최근에도 27.6%의 높은 복음화율을 가진 도시가 되었고 많은 기독교 관광장원을 활용하여 기독교를 지역의 특성으로 활용하는 도시가 되었다.
본 연구는 일제강점기 한국기독교의 국제교류활동을 조명한다. 전간기의 서구신학계는 태평양문제연구회, 예루살렘선교대회, 평신도해외선교조 사위원회의 중심인물인 플레밍-록펠러-호킹의 현대주의 신학사상이 한국기독교인에게 수평적인 국제교류의 장을 제공했다. 전후의 참화를 극복하고 새로운 세계질서 수립을 겨냥한 이들은 기독교 평등사상 및 기독교세계주의에 주목하였고, 사회진화론에 근거한 서구우월의식을 지양하고, 세계 각 민족과의 우호협력 및 현지인 주도성의 필요성을 강조하여, 한국기독교인들에게 일본인과 구별된 독자적 국제문화교류를 경험할 장을 마련하였다. 문화교류라는 맥락에서 제공된 한국인의 지식과 정보는 아시아학의 태동기에 기초자료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태평양 전쟁기 및 전후 한국문제의 이해를 위한 정치외교적 함의를 지닌 정보로 사용되었고, 영미계의 대한정책수립에 참고자료를 제공하였다. 이러한 문헌 증거는 일제강점기가 국가 차원에서의 외교기관 부재라는 전이해에 따라 민족의 독립투쟁에 집중되 어온 기존의 역사연구를 보완한다. 서구열강은 한민족의 대외활동을 일본의 내정이라는 차원으로 인식하였기에 한민족이 고투하는 자주적 해외독 립투쟁에 집중된 기존연구를 보완하는 본 연구는 자주적인 해외독립투쟁에 집중된 연구를 보완하는 본 논문은 서구기독교인들과 한국기독교인의 협력적 관계를 조명한다는 측면에서 미개척분야라 할 수 있다. 외교를 국가대표기구의 공식적 회견이라는 관점보다 민간인의 국제교류를 통한 민간공공외교라는 관점에서 자료발굴과 해석을 시도함에 외교사와 기독교사가 교차하는 영역에 집중하므로 학제융합적 접근방법을 사용한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 국권상실에 이르기까지의 형성된 한민족의 대미관계 및 해외한인의 독립활동에 집중한 기존연구를 보완하는 본 논문은 제국주의의 감시와 억압을 뚫고 민족의 세계적 활로를 제공한 기독교평등주의와 기독교세계주의를 검토하며 세계기독교대회에서 면면히 지속되어 온 한인의 국제교류활동상을 조명하여 한국외교사의 공백기를 채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