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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敎會史學會誌 KCI 등재 한국교회사학회지 JCHS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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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집 (2017년 8월) 9

1.
2017.08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의 목적은 독일 경건주의가 독일 문학의 최고봉으로 여겨지는 요한 볼프강 괴테(1749-1832)에 끼친 영향을 탐구하는 것이다. 그는 젊은 시절 경건주의의 강한 영향을 받았다. 그가 대학생활을 하며 병을 얻었던 라이프치히에서 고향인 프랑크푸르트로 돌아 왔을 때, 그는 어머니의 친구 인 클레텐베르크 부인과 프랑크푸르트 근교에 살던 경건주의자들에 의해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자유롭고, 감각적이며 영감어린 종교적 체험을 하였다. 특별히 이 시기에 괴테는 친젠도르프가 세운 헤른후트 형제단 회 원들과의 강렬한 만남을 가졌다. 처음에 괴테는 그들에게 매료되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들과의 신 학적인 입장의 차이로 점점 멀어지게 되었다. 특히 인간의 원죄를 긍정하 고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그들의 입장에 괴테는 동의할 수 없었다. 이러한 괴테의 입장은 그들에 의해 이단적인 펠라기우스주의란 정죄를 받았다. 마 음의 큰 상처를 입은 괴테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심하던 중 아 버지의 서재에서 아놀드의 󰡔불편부당한 교회와 이단의 역사󰡕를 발견하고, 여기에서 자신의 종교적인 입장의 정당성을 확인하였다. 그는 당대의 기독 교회가 교권에 의해 교리화되고 제도화 되면서 초대 교회가 지녔던 신앙의 생동력을 상실했다고 보았다. 그는 신앙이란 결국 각자의 신념의 문제로 파악하고, 특정한 기독교 신앙 전통에 매이지 않고 담대하게 자신의 길을 나아갔다. 아놀드의 저서의 영향은 괴테의 문학 이곳저곳에 배어 있는데, 특히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어떤 지역의 목사가 어떤 지역의 신임 목사 에게 보내는 편지」, 「두 가지 중요한, 이제까지 해명되지 않은 물음들」, 그 리고 「영원한 유대인」이다. 괴테는 아놀드의 교회사적인 맥락에서 도출된 개념과 모티브를 다른 삶의 영역과 작품에 적용하고 일반화시켰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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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 관용은 상당히 어려운 주제이다. 관용이란 서로를 자유로운 자요 동등한 자로 인정하는 조건에서만 실제성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역 사적으로 살펴보면, 자신의 고유한 전통이 지닌 어두운 측면을 인식하게 되고, 따라서 정확하게 들여다보고 개별화해서 판단하지 않으면 안 될 것 이다. 물론 각 전통은 빛과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의 질문들을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한다. 도대체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관용 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관용과 진리는 어떤 관계를 갖는가? 왜냐하면 각 신자들에게 신앙의 진리에 대해 기대하거나 요구하는 것은 관용의 지속적 인 주제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리스도교가 유일신교를 표방하는 종교라면 선천적으로 편협하고 배타적인 것이 아니겠는가? 또한 관용에 대한 사회의 물음에서 교회는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가? 관용에는 한계가 있는가? 사회는 얼마나 많은 다름과 차이를 견뎌낼 수 있는가? 더군다나 교회 안에 서의 관용은 가장 위험한 것인데, 우리가 ‘복음적’이라고 말할 때는 그 어 떤 권위와 상관하지 않고 누구든지 자신이 원하는 바를 믿을 수 있다는 전 제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므로 이단과 사교의 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분명히 관용은 올바른 삶을 소개하는 하나의 양식으로써 다양성을 가공하 는 것이다. 동시에 관용은 신자이면서 능동적인 시민이 되는 것을 허용하 는 것이기에 결코 정신분열증이나 모순적인 것이 아니다. 그래서 관용은 신앙의 범주에 해당된다. 이 논문은 이런 관점에서 종교개혁자들을 중심으 로 관용의 문제를 살펴보고 있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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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20세기의 위대한 선교신학자 레슬리 뉴비긴(1909-1998)이 종 교개혁사상을 후기 계몽주의 다원주의 사회에 어떻게 적용하였는지를 살 펴보려는 것이다. 뉴비긴은 20세기 후반의 서구사회에서 과학적 세계관을 새로운 이교주의로 보고 기독교 신학에 인식론적 새 출발을 하려고 했다. 뉴비긴은 개혁신학의 토대위에 선교사의 경험과 에큐메칼 운동의 경험을 수렴하여 통전적이고 독창적인 신학을 제공하였다. 이 글은 첫째, 뉴비긴 의 생애와 그의 신학형성에 영향을 준 사건들을 검토했다. 둘째, 20세기의 세계기독교의 변화에 대한 뉴비긴의 이해를 검토했다. 셋째 뉴비긴의 신학 에서 종교개혁사상과 관계된 부분을 ⑴ 하나님 지식, ⑵ 오직 믿음, 오직 은혜, ⑶ 성경의 권위, ⑷ 교회: 하나님의 가족, ⑸ 선택의 교리, ⑹ 만인제 사장직과 직제, ⑺ 교회와 국가의 순서로 연구했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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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대한민국 제1공화국 속에서 태극기에 대한 국기 경례 방식으 로 인해 발생한 교회와 국가 간의 첨예한 갈등에 대하여 고찰하여 보았다. 해방을 맞이한 직후인 미군정기부터 한국 사회에서 시행된 국기 경례 방식 은 세이케이레이, 번역하여 최경례, 흔히 배례라고 불리우는 일본식 경례 방식이었다. 한국 기독교는 이와 같은 국기 배례에 대하여 민족적으로는 일제의 잔재라는 측면, 신앙적으로는 우상 숭배라는 측면, 종교적으로는 미신적이라는 측면 등 세 가지 이유 때문에 거부하였다. 이러한 국기 배례 거부 움직임은 해방 직후부터 손양원 목사를 필두로 해서 장로교회가 주도 하였다. 그렇지만 국기 배례는 대한민국 제1공화국이 수립되면서, 국가 지 상주의 혹은 민족 지상주의의 일환으로 한국 사회에서 더욱 강력하게 시행 되었다. 다시 말해 대종교인으로 초대 문교부 장관이었던 안호상이 종교의 식이 아닌 국가의식이란 명분하에 더욱 강력하게 시행한 것이다. 이렇게 국기 배례가 자리한 한국 사회에서 가장 빈번하게 시행된 공간은 일선 학 교들이었다. 이로 인해 특히 전국에서 산발적으로 교회에 출석하는 유년 주일학교 학생들이 국민학교에서 시행하는 국기 배례를 거부함으로 인하 여 수난을 당하였다. 그런 가운데 장로교를 넘어서 한국기독교연합회에서도 국기 배례에 대 한 거부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렇지만 궁극적으로 한국 기독교가 동일한 목소리를 낸 것은 아니었다. 특히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를 종교의식이 아 닌 국가의식으로 받아들였던 감리교는 일제 강점기의 신학과 신앙 전통을 계승하여 국기 경례에 대해서도 종교의식이 아닌 국가의식으로 간주하였 다. 그리하여 국기 배례든, 혹은 국기 주목례든 간에 어느 것도 무방하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그 직후, 1950년 4월 25일에 국기 배례 폐지 건이 국무 회의에 상정되었다. 국무회의에서는 국기에 대한 배례를 국기에 대한 주목 례로 변경하였다. 이와 같은 국기 경례 방식 변경은 이승만 대통령의 지원 이 결정적이었다. 이처럼 이승만 대통령이 지원하게 된 것은 지금까지 알 려진 바와 같이 한국 기독교의 지속적인 국기 배례 거부 운동도 한몫했지 만 지금까지 한국 기독교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던 두 수난 사건들이, 제 각각 그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개연성이 제기되고 있다. 그 하나는 국 기 배례 거부로 인하여 감옥에 수감되었던 안중섭 전도사의 수난과 또 다 른 하나는 국기 배례 거부로 인하여 위천교회 주일학교 학생들과 교사들이 겪은 대환난이다. 이 두 가지 수난 사건 모두 이승만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제각각 수난 해결을 위한 인적 연결 고리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설득 력을 가지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국기 경례 방식에 대한 변경은 국 기 배례 거부로 인한 수난 속에서 그 해결 방안의 결과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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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동서교류, 특히 그리스도교와 동아시아 문화의 만남에 대한 연구가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 연구는 그리스도교 한문 전교서가 동서 문화 교류 연구에 주요한 사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저술되었다. 이 연구의 초점은 이탈리아 출신 예수회 선교사 쥴리오 알레 니(Giulio Aleni 艾儒略, 1582-1649)가 저술한 천주강생출상경해(天主降 生出像經解, 1637; 이하 출상경해)이다. 출상경해는 예수의 생애를 탄생부터 승천까지 그림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스페인 출신 예수회 사제인 제 로니모 나달(Jerónimo Nadal, 1507-1580)의 복음역사 도해집(Evangelicae historiae imagines)의 한문본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알레니는 복음역사 도해집을 3분의 1정도로 간추려 번역했다. 이 연구는 알레니가 나달의 복음역사 도해집을 중국인 독자를 위해 어떻게 번역하고 변용시켰는지, 곧 번역과 문화 전수란 관점에서 출상경해를 연구한다. 이를 위해 이 연구는 네 가지 주제를 다루고자 한다. 첫째는 서문격인 “천주강생출상경해인”(天主降生出像經解引)을 통해 출상경해의 목적과 원리를 규명한다. 둘째, 나달의 복음역사 도해집과 출상경해의 구조를 비교하여, 알레니가 복음역사 도해집에서 어떤 도해를 선택하고 또 어떻 게 배열했는지를 다룬다. 셋째, 알레니가 복음역사 도해집에 없는 도해 를 삽입하거나 여러 도해를 하나로 합성한 사례를 중심으로 라틴어 저본의 한문 번역에 대해 고찰한다. 마지막으로 시각 이미지 측면에서 출상경해의 특징을 고찰한다. 나달의 복음역사 도해집은 출상경해 뿐만 아니라 다 로카 신부(Giovanni da Rocha, 1565-1623)의 송염주규정(誦念珠規程, 1620)에 수록된 그림과 요한 아담 샬 폰 벨(Johann Adam Schall von Bell S.J., 1592-1666)의 진정서상(進呈書像, 1640)의 일부 그림의 저본이 되 었다. 이 연구는 나달의 복음역사 도해집의 중국화라는 점에서 이 세 작 품을 비교하여 출상경해의 특징을 규명한다. 결론적으로 출상경해는 라틴어 도상과 해설의 한문화를 통해 서양 그 리스도교의 핵심적 내용을 중국인과 소통하고 전수하려는 시도였다고 평 가할 수 있다. 출상경해는 라틴 그리스도교 문화를 중국에 전수할 때 예 수회 선교사들이 가졌던 실용적이고 창의적인 자세와 함께, 문화적 적응 내지 중국화보다는 서양의 문화를 충실하게 번역하고 전달하려는 양면적 성격을 보여준다. 이러한 양면적 성격은 17세기 동서 문화 교류를 이해하 고 평가하는 중요한 틀이 될 수 있다. 출상경해 이외에도 이 시대 수많 은 한문 전교서에 대한 폭넓은 연구는 명청 시대의 가톨릭교회의 선교를 통해 이루어진 동서 교류의 성격과 면모를 더욱 분명하게 밝혀줄 것이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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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헌국회에 진출한 기독교인들의 숫자는 50명으로 확인된다. 한민당 11 명, 독립촉성국민회 13명, 대동청년단 5명, 무소속 14명, 기타 단체 7명이 며, 여기에는 천주교인 3명이 포함되어 있다. 기독교인 의원들 50명이 전 체 의원들 209명 가운데 차지하는 24% 비율이 전체 인구 가운데 기독교 인구 0.5%를 과대하게 대표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당시 고등교육을 받았 던 기독교인들의 인구비율이 20-30% 정도 된다는 점에서는 적절한 비율의 대표성을 나타낸다고 평가할 수 있다. 기독교 의원들 가운데 독립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24명으로 거의 절반에 가까워 전체 국회의원들 가운데 독 립운동 가담자 27%보다는 훨씬 더 높다.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국내에서 공부한 경우에 미션스쿨에서 공부를 하였고, 졸업 후에도 대부분 실력양성 운동의 일환이었던 사립 기독교학교에서 교원을 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해방 후에는 미군정, 민주의원, 입법의원 등의 다양한 정치활동 을 하였고, 면장, 읍장, 군수 등의 다양한 행정직도 하였으며, 교육기관에도 상당수가 근무하였다. 이들은 해방 후에 한민당과 독촉국민회, 여러 청년 단에 소속되어 활동하면서 우파 세력의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제헌국회에 진출한 후에는 한민당에 소속된 사람들은 거의 한민당에서 활동하였고, 독촉국민회에 소속된 사람들은 상당수가 일민구락부에 소속되 어 이승만 지지세력으로 활동하였고, 6-7명의 사람들은 소장파에 소속되어 개혁활동을 지지하였다. 그러므로 기독교국회의원들은 자신이 소속된 정당 이나 구락부에 따라 활동하며 개인들의 경우에 이합집산이 심하였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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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중세 가톨릭교회의 인간중심적 구원론에 반 대해 신중심적 구원론을 제시했다. 그 결과 루터 신학은 인간의 전적타락 과 노예의지(인간론), 하나님의 자기 충족성과 예정(신론), 그리스도의 의 의 전가를 통한 칭의와 성화(기독론), 성령의 계시에 의한 영적 시련과 위 로(성령론), 행함 없이 믿음으로만 얻는 구원(구원론), 구원에 토대를 둔 소 명의 삶(기독교 윤리) 등 신학의 제반 주제에서 구원의 원인과 공로를 오 직 하나님께 돌리는 일관성을 나타냈다. 동시에 루터는 신중심적 신학이 인간의 책임성 약화를 초래하는 것을 방 지하고자 신자의 거룩한 삶을 위한 자극과 동력이 되는 성화의 장치를 종 교개혁 신학 체계 안에 마련했다. 즉,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는 신앙을 통해 하나님께 대한 경외와 사랑, 순종을 일으키며,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통 한 구원은 그리스도의 법에 대한 자발적 성취로, 성령의 은혜는 칭의에 대 한 깨달음 뿐만 아니라 실제적 변화로서 성화로, 또 구원의 믿음은 행함의 열매로, 영적 구원은 세상에서 소명을 다하는 삶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 논문은 많은 한국 개신교인이 믿음과 행위 사이, 피안적 천국과 이 땅 사이의 이원론에 빠지게 된 것은, 그들이 루터의 신중심적 신학을 받아 들이면서도 그가 강조한 성화의 장치는 소홀히 다루었기 때문으로 분석한 다. 이 점에서 루터의 성화의 장치에 대한 주의깊은 이해와 수용은 한국 개신교의 도덕성과 영성, 사회적 책임성 제고의 중요한 토대가 될 수 있다고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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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부르디외의 사회자본 이론과 그라노베터의 연결망 이론을 통해 종교가 어떻게 미군정기의 행정 관료 채용에, 또한 이를 통해 이후 한국 사회의 방향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았다. 1) 부르디외에게 종교는 상징자본으로서의 역할이 중요하지만, 때로는 사회자본으로서의 기능을 감당할 수 있음을, 2) 종교적 배경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할 수 없었 던 그라노베터의 연구와는 달리, 종교가 미군정기 노동시장에서 중요한 접 촉 연결망으로 작용하고, 나아가 ‘확장된 내부노동시장’의 장치를 통해 지 속적인 영향을 미쳤음을 본 연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이러한 과정을 네트워크에서 1차 결절점(node)으로서 기능한 3명의 선교사 2세(윌 리암스, 언더우드, 윔스)와 2차 결절점으로서 기능한 1차 등용 관료(조병옥, 정일형, 이묘묵)들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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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성화상 논쟁에 대하여 역사(historiography)와 사상(philosophy and methodology)이라는 두 개의 주제를 동시에 다룬 연구이다. 이러한 점 에서 성화상 논쟁에 대한 기존의 연구와 차별되는 독특성을 띠고 있다. 본 연구는 ‘이미지 이데올로기(image ideology)’ 측면에서 8세기 비잔틴 시대의 성화상 논쟁의 발단 원인을 규명하는 데 목적을 두고 진행하였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성화상 논쟁에 관한 연구는 논쟁 발단의 외면적 요인을 중점적으로 다룬 반면, 본 논문은 그 내면적 요인을 밝히는데 초점을 맞췄다. 연구의 내실을 기하기 위해 독자적으로 ‘이미지 이데올로기’라는 새로운 개념을 정립하여 해석의 툴(tool)로 사용하였다. ‘이미지 이데올로기’는 이 미지의 속성으로서의 이데올로기(ideology as an attribute of image)와 ‘이 미지의 이미지’의 속성으로서의 이데올로기(ideology as an attribute of image of image)를 동시에 지닌 해석체계를 의미한다. 이것은 이미지가 본 래적으로 이데올로기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상에 근거하고 있다. 이미지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성화상 논쟁의 발단 원인을 조명해 본 결 과, 8세기 비잔틴 시대의 성화상 논쟁은 성화상 파괴를 주도하였던 황제 레오 3세(Leo Ⅲ, 717-41 재위)와 성화상 숭배를 옹호하였던 교황 그레고 리우스 2세(Gregorius Ⅱ, 715-31 재위)간의 이미지 이데올로기 충돌로 인해 발생한 사건임이 드러났다. 레오 3세는 ‘황제-교황주의’를, 그레고리우스 2세 는 ‘교황-황제주의’ 라는 정치적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성화상(icon)이라는 이미지를 이데올로기적 수단으로 이용하였던 것이다. 8세기 비잔틴 시대의 성화상 논쟁을 기점으로 시작된 그리스도교의 이 미지 담론은 오늘날에 이르러 단순히 신학적 담론에 머물지 않고 정치, 경 제, 사회, 문화, 예술, 사상 등 다양한 영역에서 이데올로기와 연결되어 거 대담론이 되고 있다. 이것은 이데올로기가 이미지의 속성이라는 본 연구의 관점에서 볼 때,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대적 상 황에서 본 논문이 이론적으로는 성화상 논쟁 연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틀을 제시하고, 정책적으로는 한국교회를 향하여 이미지 이데올로기에 대 한 경각심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