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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敎會史學會誌 KCI 등재 한국교회사학회지 JCHS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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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호

제45집 (2016년 12월) 9

1.
2016.12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의 목적은 이슬람의 등장(622년) 이후 비잔티움의 멸망(1453년)까 지 이슬람 세계, 비잔티움, 라틴 그리스도교 세계의 세 권역에서 이슬람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대응을 개관・비교하는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이 글 은 이슬람 세계와 종교, 특히 꾸란과 무함마드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변 증과 논박서를 개관하고 그 논점과 성격을 권역별로 비교한다. 결론적으로 이 글은 이슬람 세계 안에서 꾸란과 이슬람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이슬람의 도전에 대해 그리스도교 신앙을 변증했던 동방 그리스도교의 이 슬람 대응 문헌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는 이슬람 세계와 적대적인 관계 에 있었으며, 언어의 차이와 왕래와 교역의 제한으로 무슬림과 이슬람의 종교적 가르침과 관행을 접하기 어려웠던 비잔티움과 라틴 그리스도교의 이슬람 대응과는 대조된다. 대체로 비잔티움이나 라틴 그리스도교 세계의 지성인은 이슬람의 종교적 가르침에 대해 큰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그리 스도교 세계의 존립 자체가 위태롭게 될 때에야 이슬람의 지적인 도전을 인정하고 이슬람에 대한 학문적이고 개관적인 연구를 발전시켰다. 이 연구 는 무슬림 이주민 사역과 국내외 무슬림 선교를 위해 한국 교회에 보다 객 관적이고 진지한 이슬람 연구를 요청하며 끝맺는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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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의 연구목적은 루터의 죽음관을 살펴보는 것이다. 기존의 로마 가톨릭 교회의 입장과는 달리 루터의 죽음관이 드러내는 가장 큰 특징은 루터가 죽음의 문제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해서만 의롭게 된다는 그의 핵심적 개혁 사상을 가지고 풀이한다는 점이다. 더 나아가서 루터는 이 개혁 사상에 의거하여 중세 구원론과 종교적 관행에 불가결한 요소였던 연옥 사상을 결국 거부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해서만 의롭게 된다는 관점에서 루터는 그리스도인과 관련하여 두 종류 의 죽음―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인생 중에 경험하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죽음과 인생의 끝을 의미하는 죽음―을 이야기한 다. 전자의 죽음은 후자의 죽음의 형태와 그 이후 누리게 될 부활과 영생 의 불가피한 조건이 되는 만큼 루터의 죽음관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 지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경험하는 이 두 형태의 죽음은 두 형태의 부활 과 연결된다. 루터는 죽음 이후 불멸하는 영혼이 즉각적으로 심판을 받고 천국이나 지옥이나 연옥으로 옮겨진다는 중세 후기 교리 대신 부활 때까지 죽음은 잠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잠으로서의 이 죽음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첫 번째 창조 때보다 훨씬 더 영광스럽고 아름답게 만들어질 두 번째 창조를 위한 중간과정이라는 점에서 두렵고 끔찍한 일이 아니고, 하나님과 의 영원한 삶을 위해 거쳐야 할 꼭 필요한 통과의례가 되며 이 세상에서 겪은 모든 죄와 죽음과 악과의 싸움에 대한 최후 승리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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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은 개신교 종교개혁 500주년이 된다. 근래에 일부 역사가들은 신 학에 비중을 두는 데서 벗어나 종교개혁이 대중에게 끼친 영향과 그들의 역할을 연구하면서 종교개혁의 사회사를 기술하고 있다. 그런 경향을 따라 서 여성사학자들도 종교개혁에 대한 여성들의 반응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종교개혁은 유럽 여성들의 지위에 변화를 가져왔으며, 여성들은 종교개혁 의 전파와 확립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여성들은 단지 종교개혁의 메시지 를 받는 수동적 수혜자가 아니라 종교개혁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종교개혁 여성들은 실로 개혁된 것이 아니라 개혁을 했다. 종교개혁에 수반된 가장 극적인 변화들 중의 하나는 수녀원의 폐쇄였다. 어떤 역사가들은 수녀원의 해체에 대해서 긍정적인 평가를 한다. 종교개혁은 타락하고 성차별적인 수도원 제도로부터 수녀들을 해방시켰으며, 여성과 가 정을 정절과 수녀원보다 높은 단계로 상승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역사 가들은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다. 수녀원의 폐쇄는 수녀들의 선택권을 제한했 으며, 그들이 가질 수 있었던 제한적인 경력들 중 하나를 부인했고, 여성이 지도력을 행사하고 능력을 발휘하는 기회를 박탈했다는 것이다. 수녀들은 그녀들이 겪은 가장 강력한 도전에 대해서 다양한 방식으로반응했다. 독일의 많은 수녀들은 수녀원을 탈출해서 종교개혁의 물결에 참 여했다. 그러나 다른 수녀들은 강력한 개혁의 폭풍에 맞서 수녀원 생활을 존속시키려고 애썼다. 그리고 또 다른 수녀들은 개혁 세력과 절충해서 개 신교로 개종하거나 수녀원 시설을 학교나 병원으로 전환했다. 종교개혁 시 대의 여성종교단체에 대한 많은 연구들은 아직도 수녀원의 저항이나 존속 보다 해체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많은 수녀들이 수녀원에 남았으며 말과 행동으로 저항했다. 독일의 수녀원들은 종교개혁의 격류에 도 휩쓸리지 않은 난공불락의 요새였고, 수녀들은 막강하고 정복되지 않는 베일 쓴 군대였다. 접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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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내전 이후 난민은 세계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가 되 었고, 이 문제가 교회와 사회에 대해 지니는 의미는 매우 크다. 한국사회와 한국교회가 원하건 말건 간에, 난민문제는 이미 다가왔고, 전 세계로부터 이에 대한 책임을 요구받고 있다. 사실 난민문제는 성경과 교회역사 가운 데 항상 접해왔던 유구한 문제이며, 특히 세계화 현상을 맞은 오늘날 그 중요성이 더욱 인식되기 시작한 문제이다. 급기야 2016년 브라질 리오에서 개최된 하계 올림픽에서는 난민들이 한 팀을 이뤄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 런 맥락에서, 우리는 종교개혁가 칼뱅의 삶과 사역을 통하여, 난민사역의 한 측면을 들여다보았다. 본 논문은 칼뱅을 종교난민, 난민목회자, 난민사역의 관점에서 살펴보았 다. 먼저 칼뱅은 종교난민이었는데, 그는 이방인에서 이웃으로 다시 시민 으로 신분이 바뀌었지만, 난민의 정체성을 지녔고, 그것이 그의 신학과 사 역에 영향을 미쳤다. 또한 칼뱅은 난민목회자였는데, 그는 난민목회에 대 한 문제의식을 지녔고, 이를 해결하고자 구조와 사역자를 마련하였다. 이 런 칼뱅의 난민사역의 유산을 검토하면서, 난민의 정체성, 난민의 연대, 상 황과 목회라는 교훈과 도전을 살펴보았다. 특히 칼뱅의 삶과 사역을 통하여, 난민 나아가 이주민이 경험할 이주, 추방, 외국인혐오 등의 문제를 들여다볼 수 있었으며, 따라서 환대의 신학 의 중요성이 다시금 대두되었다. 더구나 기독교가 중심이 아닌 주변의 위 치에 설 때 신학적 개혁이 가능하다는 도전도 살펴보았다. 이제 한국교회 도 난민사역의 근거가 되는 난민신학을 구성하고, 난민사역을 개발해야할 당위성에 직면하고 있다. 이주민, 특히 난민은 이동, 즉 이주와 관련된 존재인데, ‘이동 중인 인간’ 은 가장 위약한 존재이고, 가장 도움이 필요한 존재이며, 동시에 복음에 대 한 수용성이 가장 높은 존재이다. 따라서 난민은 마태복음 28장의 복음선 교는 물론이고 마태복음 25장의 긍휼선교의 우선적인 대상이요, 또한 주체 인 것이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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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클린 올링거(Franklin Ohlinger,중국명:武林吉)는 미북감리교 (Methodist Episcopal Mission, 여기서 M.E.M의 중국식 표현으로 미이미회 (美以美會)라 지칭했다.) 소속 선교사로서 한국선교의 초기 북감리교 선교 정책에 영향을 미칠 뿐 만 아니라 문서선교로도 평가되는 인물이다. 그의 짧은 한국선교(1887-1893), 5년8개월의 시기에 비추어 그의 사역을 평가하 는 면도 있겠지만 그의 생애 대부분을 차지했던 중국선교(1870-1887, 1895-1911)에 대한 연구는 한국기독교사연구에 올링거를 통전적으로 이해 하는 기초라고 볼 수 있다. 이에 필자는 그가 한국선교를 시작하기 전 18 년동안 중국 복주(福州,Fuzhou)에서 활동한 사역에 초점을 맞추어 그를 다 시 평가하고자 한다. 북감리교의 복주선교를 통해 직접적인 선교뿐만 아니 라 출판과 교육에 중점을 두고자 한 선교정책을 이해해 보며, 올링거와 뗄 수 없는 영화서원의 성립 등을 통해 그의 교육선교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 를 풀어가고자 한다. 특히, 영화서원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중∙영문 이중언 어교육 논쟁을 통해 당시 선교와 교육의 문제에 대한 북감리교 선교사들의 목소리를 경청해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선교사들은 전문적인 영어교육이 중국신도의 자존감을 고양시킬 뿐만 아니라 현지기독교인과 함께 만들어 가는 선교이양의 문제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길이라고 여겼다. 반면 이와 다르게 영어교육이 선교의 세속화를 촉진할 뿐만 아니라 물질주 의적인 취향이 농후한 중국신도가 신앙문제보다 영어를 통한 직업적 성공 에 더 몰두할 수 있다고 여겨 영어교육을 선교의 장애물로 보고 염려했다. 이점은 분명 올링거의 영화서원 이중언어교육에서 발단이 된 것으로 올링 거 이해의 중요한 기초가 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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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한국의 전통적인 커뮤니케이션 장소였던 장시(market)가 구한 말 초기 선교사들의 전도활동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음을 밝히고, 장시가 복음의 장소로 변화하는 과정을 탐색하려는 목적에서 집필되었다. 선교사 윌리엄 블레어(William Blair)는 복음 전도지로서 “장터는 사람들을 만나기 좋은 장소이며, 복음을 전하기 안성맞춤인 곳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15세 기 중엽에 설치되기 시작하여 17세기에 조선 전역에 확산된 서울 뿐 아니 라 지방 포구를 중심으로 상품 유통의 중요한 발달을 가져왔다. 장시는 조 선 사회의 경제적 활성화를 견인하였을 뿐 아니라 신문물, 신문화의 전파 통로이기도 하였고, 이를 통해 사회 변혁을 이끄는 기능도 하였다. 초기 입국 선교사들은 이러한 장시의 특성을 파악하고 복음 전파의 중 심지로 적극 활용하였다. 로스는 국제 무역 장시였던 만주의 ‘고려문’에서 조선의 상인들을 만나 기독교를 전하고 성경을 번역하였으며, 국경 무역장 시인 의주를 통해 한반도에 복음이 들어오는 데에 큰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후 1885년 언더우드, 아펜젤러 등의 선교사들도 한국의 풍토와 민정을 파악하기 위하여 장시를 방문하였고, 19세기 말에는 개항지의 확대와 더불 어 전국 장터에 속속들이 선교 거점이 마련되었다.이처럼 장시는 조선에서의 선교 활동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와 우리 민족과 만나 어우러져 숨쉬기 시작한 토대는 바로 조선 시대 소통의 장이었던 장시였던 것이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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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특사 사건은 1907년 고종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회 만 국평화회의에 이상설 등의 특사를 파견하였던 사건이다. 당시 헤이그특사 파견은 그 기획과 추진에 있어서 국제정세와 궁중의 상황으로 1년여가 넘 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고 또한 특사 선정과 파견이 비밀리에 추진되었 다. 따라서 그 역사적 실체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그동안의 연구 와 진술을 토태로 종합하면 고종황제의 헤이그특사 파견은 물론 고종의 의 지과 다각적인 대외외교 노력이 있었지만 이회영과 전덕기목사를 중심한 상동파 민족지사들의 계획과 활동을 통해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이에 앞서 헤이그 특사준비와 파견에 있어서 상동청년회와 상동청년학원 및 신민회의 조직과 이 조직에 속한 민족운동가들 즉, 상동파의 역할이 매 우 컸다고 할 수 있다. 헤이그 특사 파견에 있어서 상동교회는 헤이그특사 사건의 온상이었으며, 헤이그특사 책략이 이회영과 전덕기를 비롯한 상동 파 인사들을 중심으로 협의되어 고종에게 주청되었고 승인되었음을 밝혔 다. 또한 상동파의 헤이그특사 파견 활동은 신민회의 활동 중의 하나였다. 그리하여 상동파의 특사파견 논의 과정, 고종황제에 대한 특사의 주청과 승인, 특사 선정과 파견에 있어서 상동파 인물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종은 자신이 가장 믿을 수 있는 궁내의 인물, 시종 조남익과 조남승, 내시 안호형, 김상궁 등의 도움으로 상동파 인물과 연결되어 그 뜻을 전하 고 위임장을 보낼 수 있었다. 이회영을 비롯한 상동파는 고종과 특사들을 연결해주는 고리 역할을 하였다. 특사로 활약한 이상설과 이준은 이회영, 전덕기와 함께 수시로 상동교회에 모여 국사를 협의하던 상동파의 중심인 물이었고, 이준은 1907 헤이그 특사 파견이 있던 해인 상동교회에 출석하 며 청년회장직을 맡고 있었다. 더욱이 블라디보스톡에서 밀사들의 활동을 준비했다는 정순만은 상동청년회 서기였고 미국에서 윤병구와 송헌주를 헤이그로 보낸 박용만 역시 상동청년회에서 정순만 바로 전에 서기로 활동 하던 상동교인이었다. 이러한 준비와 상동파의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핵심 상동파들이 고종의 특사파견에 가담하여 힘을 모았던 것이다.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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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1959-1969년 사이에 네 개의 장로교단(고신, 기장, 통합, 합 동) 사이에서 일어난 5차례의 연합운동에 대해 발생과정, 논쟁점들, 실패의 이유에 대해 고찰했다. ⑴ 제1차 연동-승동(훗날 통합-합동) 재연합운동 (1959-60)은 중립파와 선교사들의 중재로 시작되었다. 분열의 상처가 채 아물기 전이었고, ICCC자금 지원에 의존하여 승동측이 연동측에 신학교재 산을 되찾으려는 소송을 준비하는 중이었기에 화해가 이루어질 수 없었다. 1960년 2월 조직된 통합측은 WCC탈퇴를 결정했다. ⑵ 기장-통합 귀일운 동(1961)은 한국신학대학 출신의 목회자들의 인적 관계로 인해 시작되었 다. 강단교류를 통해 우정회복과 신앙교류를 한다는 소박한 운동이었으나 통합측 교권의 반대로 중단되었다. ⑶ 제2차 통합-합동 재연합운동 (1961-63)은 고신-승동의 합동총회(1961)이후 희년총회(1962)에 일치를 기 대하는 평신도들의 열기에 힘입어 시작되었다. 실패의 원인은 NCC 탈퇴에 대한 이견 때문이고, 합동으로부터 성경장로교회(1961)와 호헌교단(1962) 이 분립했고, 고신이 환원(1963)함으로써 연합운동의 동력이 떨어졌다. ⑷ “합동촉진론”(1964)은 NCC를 탈퇴하고 합동과 일치하자는 주장으로 경북 지역의 통합측 노회 안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통합측 리더들은 무례한 유인물을 배포한 합동지도부들의 진실성을 의심해서 이 운동을 규제했다. “장로교연맹체론”(1964-65)은 기장-통합 소장파들로부터 시작되었고 교단 연합이 어려우니 연맹을 구성하자고 했다. 합동과 고신은 이에 응하지 않 았다. ⑸ 3차 통합-합동 재연합운동(1968)은 1967년에 합동교단에서 내부 교권갈등으로 지방주의(Synod제도 추진)가 강화되자 정치적 해결책으로 시작되었다. 합동측은 보수-진보 진영 논리를 강화해서 통합측의 신학적 내부갈등을 유도했다. 하지만 통합측 내부분열이 심해지자 통합총회는 1968년 9월 재연합운동을 중단시켰고, 이듬해 압도적인 다수표로 WCC복 귀를 결정했다.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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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의 동경협정, 1922년의 요코하마협정, 1929년의 태평양문제연구 회를 관통하는 YMCA의 첨예한 관심사는 문화적 자치의 공간이었다. 이는 외교적 협력을 통해 획득한 한국YMCA의 고유한 권리로, 정치적 독립을 상실한 일제 강점기의 한국에 문화적 독립에 상응하는 권리를, 외교권이 박탈당한 한국에 국제교류의 통로를 제공하였다. 1913년 일본 동경에서 체 결한 동경협정은 한국 YMCA가 보유한 문화민족주의 실현의 자치권을 일 본YMCA의 체제에 예편시켜, 기관명칭, 의사집행부, 법규제정에 이르기까 지 일본 YMCA에게 동반적 통제권을 부여했다. 그러나 1922년 체결한 요 코하마협정은 동경협정조문의 실행에 제동을 걸고, 기관명칭, 건물소유권, 의사집행부구성, 선교사 관할영역에 이르기까지 한국 YMCA의 독자적 자 치권을 천명하고, 구체적으로 반영할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였다. 이러한 한일YMCA의 쌍방협약은 3년 후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중국, 일본, 필리핀, 하와이로 구성된 태평양문제연구회에 1925년부터 1929년에 이르기까지 한국 대표의 정체성을 가지고 일본과 구별된 독자적 국제교류를 가능하도록 수문을 개방했다. 1925년 태평양문제연구회라는 국제기관의 발족단계에서부터 시작된 한국의 참여는 한국문화를 말살시키는 일본정책을 보고를 가능하게 하였고 해외전문가의 호응을 이끌어 내었 다.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나 1920년 파리강화회의에서 기회조차 두 절된 식민지 한국의 상황 및 한국인의 입장은 1925년 제 1회 태평양문제연 구회에서 평화적으로 진술되었고 1차 세계대전 후 평등과 상생이 지배하 는 국제적 신질서를 모색하는 태평양문제연구회의 이해를 증진하는데 기 여했다. 즉 한국YMCA는 단순히 민족주의의 보루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 세계주의에 입각하여 민족주의의 이상을 구현할 자치의 공간을 제공하였 다. 한국 YMCA의 민족주의는 가시적이고 단기적인 투쟁을 통해서라기 보 다 장기적이고 은밀한 외교적 방식을 사용하였고 국제주의에 입각한 협력 을 통해 획득한 자치공간 안에서 발현되었다. 국제기구라는 장막 안에 숨 겨진 민족적 이상을 실현할 장이요 민족 지도자를 양육할 백년지대계를 이 행할 장이었다. 이러한 YMCA의 국제주의와 민족주의의 정신을 꿰뚫고 있는 중심인물 은 윤치호로서 그의 YMCA 훈련은 한국YMCA역사의 오류로 알려진 최초 의 YMCA가담자 여병헌에 선행한다. 윤치호는 여병헌이 런던으로 가는 1896년, 한국에 YMCA가 도입된 1903년 이전, 미국의 반더빌트 대학, 에 모리 대학, 학생자원운동의 학생 YMCA대표로 활동했고, 전국신학교 선교 연맹 및 조지아주 YMCA컨벤션에서 YMCA 지도자 훈련을 몸에 익혔던 YMCA인이었다. 윤치호는 뉴욕 본부가 지원한 한국인 최초의 YMCA간사 였고, 모트 등 해외 YMCA 간사의 한국인 자문이었으며, 일제 강점기 수 십 년 동안 YMCA 이사회 회장을 역임했다. 일제 강점기에 한국의 봉쇄 및 이권 착취의 최대걸림돌은 국제관계를 유지한 YMCA의 제압이었다. 따 라서 일제는 105인 사건으로 윤치호가 대구 구치소에 투옥된 기간, 이상재, 남궁억, 신흥우, 아비슨 및 언더우드의 참석과 존 모트의 진행가운데 동경 협정을 체결하여 자치권을 보유한 한국 YMCA에 일본의 감독권을 침투시켰다. 여기에 애국자로 묘사된 한국YMCA 인사들이 한국 YMCA를 일제 에 복속시키는 협정에 서명한 것이다. 그러나 1922년 YMCA의 요코하마 협정에서는 윤치호가 선제공격을 감행하여 한국 YMCA의 자치권을 탈취 하였고, 이로 인해 1925년 YMCA 중심의 태평양문제연구회의 활동이 가 능했으며, 1929년 일제가 태평양문제 연구회에 한국인 참여금지법안을 제 정하고자 상정할 때 한국태평양연구회 회장인 윤치호가 전면에서 한국인 참여의 정당성을 효과적으로 변호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국면은 일반적으 로 애국자의 표상으로 구축된 인물의 해석이나, 윤치호는 삼일운동 이후 사회진화론에 입각해 친일로 기울었고 대동아이론에 기초하여 서구를 배 척하고 친일에 전향했다는 양극단적 해석의 실증적 검토를 필요로 한다. 역사자료의 실증적 검토는 윤치호가 중일전쟁 이후 친일로 경도된 사실을 긍정함에도 불구하고, 식민지시대에 복잡하게 얽힌 억압의 현실이 친일파 내지 애국자라는 양극단적 해석의 틀에 개인생애 전반과 집단 전체를 삽입 하여 유형화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았고, 그러기에는 선택의 폭이 다양하고 유동적이었음을 시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