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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敎會史學會誌 KCI 등재 한국교회사학회지 JCHS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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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집 (2013년 12월)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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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라 철학에서 유래된 영지주의 사상들은 초대교회시 이미 여러가지 초기적인 형태로 나타나고 있었으나 본격적인 사상체계를 갖춘 영지주의의 존재를 입증 할 수 있는 문서는 오늘날 까지도 없다. 다만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영지주의는 이 천년 기독교역사 가운데 강한 영향력이 있는 이교가 되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어떠한 체계화를 통해 그런 지속성을 갖게 되었는지를 추론해 보고자 한다. 물론 각자의 독창성을 발휘하는 특색이 있었던 반면, 이러한 다양한 영지주의의 사상들을 관찰해 보면 어떤 패턴처럼 공유된 연속성을 이레네우스는 가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나름대로 다양한 영지주의 창시자들이 주장한 교리적 연속성과 특성들을 정리 하는 카달록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에 따르면 각양 기독교적 영지주의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모든 이교들은 싸이몬 마구스를 비롯하여 발단 되었으며, 싸이몬의 측근에서 메낸더가 그의 후계자로 등장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두사람은 각각 초창기 시절의 원동력을 일시적이나마 카리스마적인 구세주의 역할로 구심점을 이뤘다면, 다음세대의, 그리고 지속되는 영지주의란, 그 이상, 아니면 그 외의 것들을 갖추었을 때 지구력이 있는 종교로 서 존재하게 된 것이다. 이 시점에서 케린투스가 주장하는 교리내용은 그 당시 신비적인 부분을 적당히 갖추었던 헬라 문화가 실질적인 신인관계를 표출하는 스토리라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케린투스가 영지주의를 다분히 지속성이 있는 종교가 되도록 했다면 결국 두 가지 중요한 패러다임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도케티즘의 구세주 (Docetic Savior) 와 영지주의적 부활 (non-bodily resurrection)이다. 영지주의에 있어서 이러한 패러다임의 가치는 그 뒤에 오는 싸터나이너스 와 벨렌티너스가 ‘divine spark’나 ‘divine seed’를 통해 영지주의적 부활을 설명 하고 있다는 것이며, 이러한 본격적인 영지주의로 전개 해 나가기 까지는 케린투스가 초석을 마련 했다는 점이다. 케린투스가 싸터나이너스에게 직접 영향을 미쳤다는 언급은 없으나, 이레네우스의 ‘이단반박’에 따르면, 두 사마리아 출신인 싸이몬과 그의 후계자 메낸더가 유사했고, 케린투스와 싸터나이너스는 소아시아의 동시대의 영지주의의 리더였으며, 그들은 유대교적인 뿌리의 특성을 갖춘 인간론, 도케티즘적인 기독론, 그리고 도덕적인 강조점 등이 있음을 볼수있다. 그외에 ‘사도서신’ 은 싸이몬 과 케린투스 두 사람만을 명시 하고 있는데, 싸이몬 이후의 케린투스의 비성서적 부활의 가르침을 경고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같은 입장을 강화하고 있다. 이와같이 케린투스의 독창적으로 계발한 두가지의 결과는 영지주의의 지속성을 기인 했을것 이라는 개연성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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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두 가지 목적을 갖는다. 하나는 기독교역사에서 아나뱁티스트들의 역사적 위치와 그들 입장의 정당성 확보는 ‘평화와 정의’의 실천력에서 판가름 났다는 전제 아래 그들의 평화 담론을 논구해 보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아나뱁티스트들의 견해들이 ‘에큐메니칼 의제’로써 얼마나 설득력을 확보할 수 있는지 종교개혁 주류세력의 담론과 비교를 통해 검토해 보려한다. 지금까지 기독교 주류의 아나뱁티스트들에 대한 담론은 대부분 부정적인 견해가 주를 이루었다. 그들은 교회사의 각주로 취급받아 왔다. 그러나 20세기 들어 벤더학파(the Bender school)를 비롯하여 아나뱁티스트 그룹이 배출한 신학자들에 의해 아나뱁티스트 초기 운동과 그 지도자들에 관한 역사적 자료들이 발굴되고 그 운동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쏟아지면서 지금까지의 부정적인 시각이 교정되었다. 오히려 세속주의화 되어버린 오늘의 교회 현실에서 아나뱁티스트 운동은 하나의 대안세력으로 부상하고 있을 정도다. 16세기 종교개혁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나뱁티스트 운동은 종교개혁세력의 엄연한 하나의 축으로 역할을 해 오고 있으며 “역사적 평화교회”로 자리매김하였다. 따라서 아나뱁티스트의 평화 담론을 탐구하는 작업은 신학적인 오류나 사회적인 일탈 죄가 있는 것으로 비난 받았던 그들의 견해가 무엇인지를 확인해 보는 것이요 또 그들의 사상 속에는 새로운 영감과 통찰력을 배울 수 있는 많은 요소와 가치들이 내포되어 있음을 전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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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WCC 제10차 부산 총회를 계기로 복음주의 교회와 에큐메니칼 교회가 격렬한 신학 논쟁을 벌였다. 복음주의 교회는 특별히 WCC의 교회론에 대하여 의심이 많았다. 복음주의는 WCC 교회론이 교회의 정체성보다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다가 교회와 세상의 경계선을 무너뜨렸다고 비판했다. WCC 교회론이 정말 그런가? 이 글은 에큐메니칼 운동의 문서들에 대한 역사적 연구를 통해 다음과 같은 연구 결과를 얻었다. 첫째, 에큐메니칼 운동은 20세기 전반부터 교회 일치를 추구하는 교회론을 발전시켰다. 에큐메니칼 문서는 유기체적 연합에서 협의회적 교제와 코이노니아로 발전하는 교회 일치 개념을 발전시켰다. 둘째, 에큐메니칼 운동은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이르러 교회의 선교적 사명을 강조하는 교회론을 발전시켰다. 에큐메니칼 문서는 하나님의 선교 신학에 근거하여 교회를 하나님 나라를 섬기는 종으로 보았다. 셋째, 에큐메니칼 운동은 1990년대에 교회론을 본격적으로 연구하여, 교회의 본성과 사명을 통합하는 교회론을 발전시켰다. 『교회와 세상』과 『하나의 신앙고백』 문서에 의하면,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코이노니아에 기원을 두고 있고, 교회의 본성은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이고, 교회의 사명은 하나님의 나라를 가리키는 징표와 하나님 나라의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는 도구라는 것이다. 이 글은 이런 연구 결과에 근거하여, 에큐메니칼 운동이, 복음주의의 비판과 달리, 1990년대에 이르러 교회의 본성과 사명을 균형있게 강조한 교회론을 발전시켰다는 것을 밝히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앞으로 복음주의 교회와 에큐메니칼 교회 사이에 깊은 신학적 대화가 이루어지를 기대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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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파 정통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으로 훈련을 받은 크리스티안 토마시우스는 위대한 계몽주의 철학자요 법학자로서 그 명성을 떨친 인물이다. 또한 그는 라이프치히 대학을 거쳐 할레 대학에서 교수직을 맡아 강의하면서 계몽주의와 경건주의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한편 제도적 교회와 대중신심에 자리 잡고 있던 미신과 무신론적 성향에 맞서 투쟁했던 인물이다. 특히 그의 “도덕론 입문”과 “도덕론 실행”은 당시의 비이성적 종교생활에 대한 답변으로서 토마시우스는 참된 종교란 내적인 예배와 신앙에 기인하는 것이며, 음욕과 명예욕 그리고 물욕이라는 부정적인 격정(정감)이 이성적인 사랑과 예배를 왜곡시킨다고 보았다. 따라서 미신과 우상 그리고 무신론은 이성과 신앙을 통해 극복되어야 할 과제이며, 참된 경건은 바로 이 점에 달려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세속화와 탈세속화라는 양극화를 걷고 있는 한국교회도 무신론과 미신이라는 도전 앞에서 토마시우스의 태도를 음미하는 것이 필요하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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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의 사상은 오늘날 이중적인 형태, 즉 사변적 혹은 경험적, 정치적 혹은 신비적, 그리고 내적 혹은 외적으로 이해되고 있지만 본 연구는 이런 이중적인 이해를 통합해보려 했다. 이중적인 이해에 있어 그의 생애-교회정치가 혹은 수도사-가 큰 몫을 차지하고 있지만 사상적인 측면에서도 그러한 이해가 지배적이다. 특히 관상과 활동의 관계를 이해하는데도 관상의 우위에 두려는 경향으로 인해 앞선 연구자들은 마치 베르나르의 사상을 내적인 것에 편중되어 있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므로 본 연구는 베르나르의 사상 관상의 우위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오늘날의 연구에 대한 비판적인 고찰에서 시작된 것이다. 연구자는 본론의 첫 부분(Ⅱ장)에서 관상의 내적인 성향과 활동의 외적인 성향을 살피보고 관상적인 삶이 활동적인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를 밝혀보려 했다. 그 결과, 베르나르에게서 대체로 내적인 변화가 외적인 변화를 수반한다는 것이다. 내적인 것에서 외적인 것으로의 전환은 베르나르의 사상에서 수도원적인 사고의 표현이지만, 또한 그것은 자기애의 상실을 통한 이웃 사랑으로의 확장이며 종교적인 실천으로 표출되는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의 상호 공존한다는 것이다. 연구자는 본론의 두 번째 부분(Ⅲ장)에서 사도직 안에서 관상과 활동과의 관계를 살폈다. 여기선 베르나르의 사도직에 대한 이해는 관상하는 삶을 전제로 한 활동하는 삶의 구현이다. 그것은 관상과 활동이 조화를 이룰 뿐만 아니라 수도원생활의 은둔적인 삶보다 세상 속에서 관상하는 삶을 통해 신적인 충만한 사랑을 다른 영혼들에게 전달하는 사역이다. 사도적인 삶의 형식은 중세 초기의 관상하는 삶을 넘어서 중세 후기로 이어지는 교량적 이해인 “관상하는 삶과 활동하는 삶의 혼합된 삶”이다. 연구자는 본론의 세 번째(Ⅳ)에서 중세의 관상과 활동의 성서적인 모델로 적용된 마리아와 마르다와의 상호관계를 베르나르가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다루었다. 일반적으로 중세 신학자들은 두 인물을 관상과 활동의 대표적인 인물들로 해석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베르나르는 성서의 또 다른 인물인 욥을 등장 시켜 활동과 관상의 혼합적인 형태를 제시하면서 관상과 활동의 조화를 피력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정화-관상-활동을 순서적으로 이해하지만 그것은 단지 순서적인 차이일 뿐 서열적인 차이가 아님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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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소고는 초대교회의 성직제, 과부에 관한 연구논문이다. 본고는 여성성직제, 과부에 대한 초대교회의 자료들을 많이 소개하고 과부였던 여성들의 활동과 당시 교회에 미쳤던 의미들을 살펴보았다. ‘과부’는 단순히 남편을 잃은 여성을 지칭하는 단어로서가 아니라 교회여성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열정으로 교회사역에 참여하고 헌신할 수 있었던 통로가 된 직제이었다. 이는 제도적 교회가 인정한 성직이었으며 여성들은 공동체를 위해 기도했고 환자나 가난한 자들을 심방하고 구제했으며 교회의 형편에 따라 예전에 참여하여 사제처럼 감독을 돕기도 했다. 그들은 그 인품과 영성, 그리고 섬김의 모델로 존경받았다. 성경과 (특히 목회서신), 속사도시대 문서들과 초대교회 교부들의 글, 그리고 여러 교회규정집들에서 과부직제에 대한 기록들이 발견된다. 초창기 초대교회 공동체에서 과부들의 위상과 사역은 나름대로 존중되었고 공동체 회원들의 역할 모델이 되었다. 그러나 차츰 교회가 제도적으로 모양을 갖추면서 과부들의 사역이 축소되었고 그 의미도 희미해졌다. 제도적 교회는 의도적으로 여성들을 리더십에서 소외시키고 그들의 사역을 축소시켰다. 교회규정집들이 제시하는 과부 직제의 의미와 사역의 범위가 이를 잘 말해준다. 더욱이 과부를 비유하는 ‘하나님의 제단’의 의미도 후대에 갈수록 그 뜻과 상징이 왜곡 되게 나타난다. 처음 기도로 공동체를 중보하는 의미로 헌신과 희생, 성결로 공동체의 모델이 되었지만 여성을 가사울타리 안에 가두는 도구로 제단의 이미지를 사용함으로써 그들의 사역을 공공연히 폄하시키는 것이 눈에 띄게 나타난다. 제단은 움직이지 않고 한자리에 있는 것이므로 여성들은 집안에 있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하며 과부직제의 무게를 격하시켰다. 그러나 교회 규정집에 끝이지 않고 여성의 활동을 제한해야 한다는 항목이 나타나는 것은 역으로 그만큼 여성들의 활동이 활발했으며 이에 대한 요구가 계속 있었었음을 암묵적으로 말해준다고 봐야 한다. 본 소고는 제도적 교회에서 성직을 맡아 봉사하고 현신했던 여성들의 역할과 가치를 새롭게 조명하여 기독교 역사를 균형 있게 펼쳐가는 데 기여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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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7년을 종교개혁의 원년으로 삼는 개신교회는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을 4년 앞두고 범세계적으로 지역적으로, 또한 연합적으로 혹은 개 교단 차원의 기념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 글에서는 “Re500”와 한국에서 조직된 “종교개혁500주년기념사업회”에 집중하여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준비가 전 세계적으로 한국 내에서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소개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