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한국교회사학회지』에 게재된 논문들을 대상으로 중세교회사 연구 40년사를 결산하고 향후 연구과제와 방향을 전망해 보려는 시도이다. 본고에서 중세교회사 범위에 포함시킨 연대는 통상적으로 ‘중세 천년’이라 일컬어지는 500년에서 1500년대이다. 학회지에 발표된 이 시기에 관한 논문 34편을 대상으로 양적 지표와 주제별 연구 현황과 추이를 살펴본 결과는 다음과 같다. 국내에서 황무지와 같았던 서양 중세 연구 분야에 용기 있게 도전한 연구자들이 라틴어와 자료접근의 어려움과 같은 열악한 연구 조건을 딛고 발표한 논문의 질은 그동안 국내 연구역량의 강화와 함께 점차 발전해 온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본고에서 분석한 34편의 논문에서 다루어진 주제는 다양하고 풍부한 중세교회사 주제에 비춰볼 때 매우 협소하다. 따라서 연구자층과 연구 지평의 확대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이 글은 한국 장로교 여성 가운데 최초로 목사안수를 받은 최덕지 (1901-1956)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하여 무너진 한국교회를 회복 하기 위해 해방 직후에 전개한 교회재건 운동을 살펴보고, 그의 교회론에 대한 신학적 해석을 시도한다. 그의 교회론에 대한 교회사가들의 평가는 지금까지 대체로 매우 부정적 이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의 교회론을 ‘극단적 분리주의’ 혹은 ‘극단적 분파주의’ 혹은 ‘도나투스주의’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이들의 평가는 최덕 지의 재건운동에 대한 자세한 분석과 교회론에 대한 깊은 신학적 해석에 기초한 것이 아니다. 본고는 이런 연구의 공백을 메꾸기 위한 하나의 시도 이다. 최덕지의 교회론을 정확하게 평가하기 위해 그의 교회재건 운동을 해방 직후의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 위치시키고 ‘도나투스파 교회론’을 해석학 적 도구로 사용하여 그의 설교를 분석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최덕지의 교회론을 ‘극단적 분리주의, 혹은 분파주의’ 혹은 ‘도나투스주의’라고 단순하게 말하기는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재건운동과 재건교회 설립은 그가 의도하지 않았던 교회의 분열을 낳았고, 그의 교회 론에 도나투스주의와 매우 유사한 성격-장점과 한계 두 측면 모두에 있어 서-이 많은 것도 부인할 수 없음을 확인했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최덕지의 교회재건 운동은 교회의 거룩성 회복을 위 해서는 큰 공헌을 하였으나, 교회의 일치 유지를 위한 노력은 부족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역사적 상황에서 교회의 거룩성 회복이야말 로 보다 중요한 시대적 과제였던 점을 감안하면, 그의 공헌이 한계보다 훨 씬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최덕지의 교회론이 지금 주님의 몸을 수없이 많은 조각으로 찢어놓고 만신창이로 만든 한국교회에 주는 교훈은 실로 무겁다. 참된 교회의 회복 을 위해서는 ‘일치를 해치지 않는 거룩성’과 ‘거룩성을 해치지 않는 일치’ 를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연구가 최덕지의 교회재건 운동에 대한 재평가를 위해 그리고 오늘 한국교회의 분열된 현실의 뿌리 이해와 일치의 길 모색 그리고 더 나아가 통일 이후 북한교회가 직면하게 될 해방직후와 유사한 배교자 치리 문제를 예견하고 미리 준비하는 데 기여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모든 부는 불의한 부, 즉 불공평한 부라고 일컬어진다. 왜냐하면 그것 은 모든 이에게 공평하게 분배되지 않고, 한 사람에게는 부족하게, 다른 사 람에게는 필요 이상으로 풍부하게 분배되기 때문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에 나오는 이 인용문은 부의 불공평한 분배가 불의하다는 관념 을 뚜렷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정의는 동등을 함축한다”는 명제로 요 약될 수 있는 토마스 정의론의 핵심적인 관념에 속한다. 이러한 특징을 가진 토마스의 정의론에 비추어 보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허용되어 온 심각한 수준의 경제적 불평등은 부정의를 내포하는 것으로 보 인다. 본고는 현대자본주의의 경제 질서가 양산해 온 불평등 문제를 재평 가할 수 있는 하나의 윤리적 준거점으로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정의론을 고 찰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기초해서 본고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에 나타난 정의론을 사적 소유권의 한계와 빈민의 권리에 초점을 맞추어 철저 한 원전 분석 방법을 사용하여 연구한다. 이 분석을 통해 다음과 같은 것 을 밝힌다. 토마스는 외적 사물의 관리와 분배에 있어서 효율성, 질서, 평 화를 이유로 사적 소유가 허용됨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는 외적 사물의 사용에 있어서는 공적 소유를 주장하며, 사적 소유권에 우선하는 자연법의 규정에 근거하여 사적 소유권의 한계를 분명히 한다. 즉 사적 소유권은 생 존에 필요한 것이 결핍된 빈민의 자기보존이라는 자연권에 종속되어야 한 다는 것이다. 이처럼 자연법에 토대를 둔 소유권 이해에 따라 토마스는 빈 민의 권리를 우선적으로 고려하여 부의 불평등 문제에 접근한다. 본고의 연구결과는 토마스의 정의론에 따른 소유권 이해가 무한한 재산 의 축적을 정의로운 것으로 본 현대 자본주의 정치경제학의 전제를 윤리적 으로 재평가할 수 있는 하나의 관점을 제공해 줄 수 있음을 보여준다.
This paper examines how the disabled were considered in the Western Medieval Church. It centers on Thomas Aquinas, St. Louis IX, and some women mystics. The results of this research can be summarized as follows. First, a disability was not always associated with a sin in the Medieval Church. Secondly, the intellectually disabled, who lack cognitive ability to understand the meaning of the sacrament, were not excluded from the Sacrament of Baptism. Thirdly, contrary to the rigorous prohibition against the disabled performing sacred rituals in Leviticus, medieval priests were not prevented from holding their office just because of physical impairment. Finally, disabled people were not considered miserable or beneficiaries of charity but spiritually valuable and beneficial in maintaining a spiritually healthy society.
In view of our findings, the general assumption of modern authors that medieval societies saw a link between sin and disability to the extent that the Church sanctioned the abuse of disabled people turns out to be a prejudice. On the contrary, the disabled in the Medieval Church were never excluded from the order of grace. As H.-J. Stiker, the author of a classical monograph on the history of disability, said, disabled people in the Middle Ages, when compared with those in the previous and following ages, can be found under the influence of ethical and divine love.
In this article, we examine the evangelical movement during the 12th and 13th centuries. In the Middle Age, during these centuries, the evangelical movement, which tried to obey the teachings of the Gospel, saw its most powerful expression.
Among various forms of evangelical movements from peoples of diverse classes, we focus on two kinds of people: Waldensians, “heretics” of the medieval church, who separated themselves from the church by criticizing and resisting the institutional church, and the mendicant friars, who aimed at returning to the apostolic tradition within the church.
All these evangelical movements show that they placed an evangelical value to poverty. In other words, for those who wanted to live according to the teachings of the gospel, poverty was the first practice and the effective symbol of evangelical awakening. Thomas Aquinas, representative theologian who showed theological reflection on this evangelical poverty, says that the voluntary poverty is the first basis on the way to the perfection of Christian life. This is because the perfection of human life is the union with God, which is the ultimate goal of the humanity and because the love of wealth decreases the love of God.
We find that the medieval evangelical movement challenges the evangelicals today, especially those in the Korean church. The essence of the evangelical spirit shown through the evangelical movement is the unlimited obedience to the words and the acceptance of the voluntary poverty as the condition of apostolic life. This can be summarized as discipleship(sequela Christi). We believe that we can take significant lessons and insights from the emphasis on the discipleship which is a characteristic of the medieval evangelicalism. We think so in view of the context of the Korean church, where she emphasizes on sola gratia but where the sequela Christi can hardly be found. If anyone truly believes in the forgiveness of sins through the redemption of Christ and the gospel that means the eternal grace of salvation, he or she cannot but follow Christ; the Gospel can’t be separated from the discipleshi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