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겨레는 삼국시대부터 줄곧 나무 모습 연화문을 단독 문 양으로 또는 산·봉황·집·등 여러 물상과 어우러진 ‘신산 세계(별 천지·낙원·이상향)’를 구성하는 중요 문양으로 표현하였다. 나무 모습 연화문도 여느 연화문처럼 다른 모습 연화문과 함께 표현 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그 표현 당시 연꽃으로 인식한 분명한 증거이다. 삼국시대의 나무 모습 연화문은 고구려 기와·삼국의 금관·금동 관의 입식·백제 무령왕릉 출토 은잔 등에 있는데 대부분 직립에 좌우 대칭인 모습이다. 필자는 이 모습을 첫째 신석기·고조선(청 동기)시대 청동 거울이나 팔주령 등에 있는 중앙・중심에서 외곽 으로 전개된 태양문의 계승, 둘째 연꽃을 비롯한 식물의 보편적 모습 즉 위로 성장하고 좌우로 가지를 뻗는 모습, 셋째 중앙·중 심과 좌우로 구성되는 세 갈래 모습의 구현(具顯)으로 본다. 그리고 기존 학계에 나무 모습으로 널리 알려진 금관·금동관의 ‘산자 모양(山字形)’을 포함한 입식(立飾)들도 필자는 나무 모습 이 아닌 매우 분명한 연꽃 모습 또는 나무 모습 연꽃으로 본다. 고려·조선시대의 도자기나 기와 등에서 나무 모습 연화문은 가 지와 줄기가 많고 연꽃봉오리와 잎사귀 모습이 뚜렷하게 분화· 구분된 모습이 많다. 이들 중 일부는 일제 강점기 때 모란문 또 는 국화문이란 잘못된 이름이 부여되었다. 조선시대 도자기 중에 가지와 줄기가 앙상하고 꽃잎이나 잎사 귀 모습이 없는 앙상한 나무 모습 연화문이 있다. 이들도 직립에 좌우 대칭됨이 분명하다. 이는 삼국시대 이래 나무 모습 연화문 이 뚜렷하게 전수(傳授)된 증거이다. 이 모습의 연화문은 기·생 장(연화화생 포함)의 몇 과정·단계를 통하여 탄생, 완성되었다. 그 돌기 또는 돋고 솟구친 부위는 크고 작은 연판 즉 연꽃잎에 해당이 된다. 도자기에 표현한 나무 모습 연화문을 포함한 연화문은 임진왜란 이후 대부분 사라졌다. 선사시대부터 내려온 우리 겨레의 이 귀중한 전통이자 중심 문양 표현이 아쉽게도 사라진 것이다. 그 대신 이후 도자기에는 사물(정물), 산수, 신선 사상을 담은 문양 이나 그림이 차지하였다. 수요층의 기호 변화, 사상 변화 특히 유학적 사고(예를 들면 간결과 질박함을 추구)가 원인이다. 반면에 기와, 건축(단청 포함), 목가구 등에서는 대체로 간단한 모습의 연화문들이 조선시대 후기까지도 답습되며 지속되었다. 가지와 줄기가 있는 나무 모습 연화문이나 치밀한 연화문 모습 은 거의 사라진 상태이다 이 논문을 계기로 나무 모습 연화문을 포함한 다양한 연화문 이 우리 겨레의 오랜 전통 표현을 담은 고유의 독자적 중심 문양 이었다는 사실, 삼국시대부터 단독 문양으로 또는 산·봉황·집·등 여러 물상과 어우러진 ‘신산 세계((神山世界: 별천지·낙원·이상 향)’의 중심 문양으로 전승되었다는 사실 등이 널리 알려지기를 고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