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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5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독촉국민회는 이승만과 김구가 연합하여 1946년 2월에 지방우익세력을 조직하려고 만들었던 연합조직이었다. 초기에는 오하영과 김구가 중심이 되어 조직을 이끌었으나, 이승만은 지방 조직을 확산시킨 남부지방 순회여 행 후 1946년 6월에 열린 2차 전국대회에서 중앙조직을 장악하였다. 이 조 직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신익회의 정치공작대 세력의 적극적인 참여가 중 요한 요인이었다. 그는 6월 29일에 민족통일총본부를 조직하였고, 7월에 이 조직에 애국단체 총연합회를 통합시켰다. 이러한 세력 확장을 이룬 후 에 독립촉성국민회의 운영에서 드러난 난맥상을 해결하기 위해 1946년 9 월 7일에 제3차 전국대회를 열었는데, 임원진에 임정세력이 상당히 참여했으나, 중앙위원조직은 이승만이 확실하게 장악하였다. 이승만은 1946년 말에 단독정부 수립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미국정부에 전달하기 위해 미국방문에 나섰다. 그의 미국방문기간 동안 임정세력은 비 상국민회의, 민족통일총본부, 독촉국민회 등을 통합하여 임정봉대론에 입 각한 임시정부수립운동을 전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을 지지하는 배은희와 이윤영등의 반대로 임정세력의 이러한 통합운동은 좌절되었다. 그렇지만 김구 중심의 임정세력은 임정봉대론을 계속 추진하였으며, 이러한 책임을 물어 이승만은 1947년 4월에 열린 제4차 전국대회에서 임정세 력을 정리하고 자신의 지지세력을 중심으로 독촉국민회를 재편하였다. 그 이후에 점차로 단독선거를 지지하는 세력을 중심으로 임원진을 개편한 후 에, 이 조직을 바탕으로 1948년 5월 총선거에 임하였다. 그 결과 제헌국회 의원 가운데 가장 많은 55명이 독촉국민회에서 선출되었다. 이러한 독촉국민회 중앙조직에 상당수의 기독교인들이 참여하였다. 초기에는 오하영이 이승만과 김구 사이의 중간역할을 하면서 부위원장을 하 였다. 중앙에서 이승만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인물로는 배은희목사와 이관 운목사 그리고 이승만의 직계였던 송필만, 임영신, 북한에서 월남한 이종 현 등이었다. 특히 월남기독교인들로 주목되는 그룹이 이윤영과 이종현, 변성옥이었다. 그리고 최태용은 반공과 국민운동을 통한 건국운동이란 점 에서 독촉국민회의 지지자가 되었다. 독립촉성회 중앙조직 가운데 기독교인들은 적어도 20%에서 40% 정도 를 차지하였다. 이러한 비율은 해방공간에서 기독교인들이 우파 세력의 중 심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것을 잘 보여주며, 이 조직의 임원진에 참여한 기 독교인들은 대부분 일제 강제기 동안 민족운동에 참여했던 인물들이었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지지 기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