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라 철학에서 유래된 영지주의 사상들은 초대교회시 이미 여러가지 초기적인 형태로 나타나고 있었으나 본격적인 사상체계를 갖춘 영지주의의 존재를 입증 할 수 있는 문서는 오늘날 까지도 없다. 다만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영지주의는 이 천년 기독교역사 가운데 강한 영향력이 있는 이교가 되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어떠한 체계화를 통해 그런 지속성을 갖게 되었는지를 추론해 보고자 한다. 물론 각자의 독창성을 발휘하는 특색이 있었던 반면, 이러한 다양한 영지주의의 사상들을 관찰해 보면 어떤 패턴처럼 공유된 연속성을 이레네우스는 가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나름대로 다양한 영지주의 창시자들이 주장한 교리적 연속성과 특성들을 정리 하는 카달록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에 따르면 각양 기독교적 영지주의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모든 이교들은 싸이몬 마구스를 비롯하여 발단 되었으며, 싸이몬의 측근에서 메낸더가 그의 후계자로 등장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두사람은 각각 초창기 시절의 원동력을 일시적이나마 카리스마적인 구세주의 역할로 구심점을 이뤘다면, 다음세대의, 그리고 지속되는 영지주의란, 그 이상, 아니면 그 외의 것들을 갖추었을 때 지구력이 있는 종교로 서 존재하게 된 것이다. 이 시점에서 케린투스가 주장하는 교리내용은 그 당시 신비적인 부분을 적당히 갖추었던 헬라 문화가 실질적인 신인관계를 표출하는 스토리라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케린투스가 영지주의를 다분히 지속성이 있는 종교가 되도록 했다면 결국 두 가지 중요한 패러다임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도케티즘의 구세주 (Docetic Savior) 와 영지주의적 부활 (non-bodily resurrection)이다. 영지주의에 있어서 이러한 패러다임의 가치는 그 뒤에 오는 싸터나이너스 와 벨렌티너스가 ‘divine spark’나 ‘divine seed’를 통해 영지주의적 부활을 설명 하고 있다는 것이며, 이러한 본격적인 영지주의로 전개 해 나가기 까지는 케린투스가 초석을 마련 했다는 점이다. 케린투스가 싸터나이너스에게 직접 영향을 미쳤다는 언급은 없으나, 이레네우스의 ‘이단반박’에 따르면, 두 사마리아 출신인 싸이몬과 그의 후계자 메낸더가 유사했고, 케린투스와 싸터나이너스는 소아시아의 동시대의 영지주의의 리더였으며, 그들은 유대교적인 뿌리의 특성을 갖춘 인간론, 도케티즘적인 기독론, 그리고 도덕적인 강조점 등이 있음을 볼수있다. 그외에 ‘사도서신’ 은 싸이몬 과 케린투스 두 사람만을 명시 하고 있는데, 싸이몬 이후의 케린투스의 비성서적 부활의 가르침을 경고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같은 입장을 강화하고 있다. 이와같이 케린투스의 독창적으로 계발한 두가지의 결과는 영지주의의 지속성을 기인 했을것 이라는 개연성을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