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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11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삼국사기』에 견훤이 대량과 구사를 공취한 다음에 나아갔다는 진례는 구사가 창원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김해의 진례로 보아야 하며 진례성을 중심으로 하는 호족의 발호는 여러 가지 기록을 검토한 결과 9세기말에서 10세기 초반 경에 있었다고 판단되었다. 또한 진례성주로 기록된 김인광과 소충자와 소율희 등은 당시 진례를 대표하는 권력자로서 대외적으로도 잘 알려진 것으로 이해된다. 또한 이들의 세력기반이었던 진례성은 학자들의 의견이 다르기는 하지만 조사결과 진례산성은 조선시대의 석축성으로 확인되었므로 통일신라시대의 진례성이 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통일신라시대의 진례성은 김해로부터 거리가 부합되며 통일신라시대의 토기가 출토되었고, 그 위치 또한 진례를 기반으로 하는 호족세력이 위치하기에는 적합한 곳이라고 생각되는 송정리토성으로 비정하였다. 그러나 송정리토성은 아직 정식으로 조사된 바가 없어 정확한 축조시기와 성격을 알지 못하는 상황인데 이를 몇몇 출토유물이나 고고역사학적인 상황만으로 비정하는 것은 문제점이 있어 차후 본격적인 조사가 필요하다. 한편 기록에는 김해로 비정되는 금관고성을 匝干 忠至가 공취하여 성주장군이 되었다고 하는데 충지는 진례 출신이므로 진례의 세력이 결국 김해까지 차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신라하대에 선승들은 모두 진례로 가서 김인광, 소충자, 소율희를 보았다고 하였지 김해 금관경에 갔다고는 하지 않았다. 이 점은 결국 진례와 김해의 정치적 성향 또는 역사적 환경이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양동산성은 신라가 김해지역을 정복한 다음 맨 처음 축조한 성으로 알려져 있다. 진례지역과 김해와 진례의 교통로와 진례 중심을 조망할 수 있는 양동산성을 먼저 축조한 것은 신라와 가까운 김해와는 반대세력이 자리하고 있는 진례를 견제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가야시대 김해의 대표세력이 양동고분 축조세력에서 대성동고분 축조세력으로 변하는 것도 이와 같은 김해와 진례의 세력 이동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이는 점도 차후의 연구에서는 진례와 김해의 관계에 대하여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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