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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기존 영토·영해 국제분쟁에 관련 국제법 판결을 살펴보면 실효 적 지배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다. 독도 관련 한국의 실효적 지 배의 역사적 사실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한국인은 고대 이전 부터 울릉도에 거주했다. 한국정부는 최소 15세기 중엽 울릉도와 독도를 그 판도로 정확하게 인식했고,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을 행사했다. 그 대표적인 증거가 1454년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 지」, 1531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이 바로 그 것이다. 무엇보다도 17세기 말 한국 정부는 일본 막부의‘죽도도해금지령 (竹島渡海禁止令)’에 기초하여 한일양국의 현안 중 하나인 울릉도와 독도가 한국 영토라는 공식적인 확인 절차를 마무리했다. 여 기서 주목할 점은 일본이 소위‘안용복사건’(1693-1696)으로 촉발 된 한일 외교교섭 이후 1905년 시마네현의 독도편입까지 200년간 독도에 대한 아무런 영유권 주장도 제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소위‘안용복 사건’이후 한국 정부는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관 심이 증대되면서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방어 노력을 기울였다. 한 국 정부는 이미 1694년 삼척첨사 장한상(張漢相)을 파견해 울릉도 를 자세히 살피게 했고, 1694년과 1697년 막부의‘죽도도해금지 령’이 내려지면서 울릉도 수토정책(搜討政策, 순검과 수색)을 정 식화했다. 그 후 한국 정부는 18세기 독도를 포함한 울릉도 수토 를 진행하면서 울릉도의 시찰, 울릉도 자원 조사 및 채취 등을 실 제로 실행했다. 대한제국 정부는 1900년 6월 내부시찰관(內部視察官) 울도시찰위 원(鬱島視察委員) 우용정(禹用鼎)을 울릉도에 파견하여 울릉도와 독도의 실효적 점유를 강화했다. 우용정은 1900년 자신의 보고서 인 울도기(鬱島記) 에서 대한제국 선포 이후 고종의 황제 등극을 표현했다. 이것은 서구 열강과 동등한 근대국가를 지향하려는 모 습 중 자국의 영토와 영해에 대한 행정관할 의식을 높이려는 고종 과 대한제국 정부의 의지를 반영한 것이다. 이러한 배경으로 1900년 10월 25일 대한제국은‘울릉도를 울도 (鬱島)로 개칭하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할 것’을 공포했다. 대한제 국 칙령 41호 2조에서 울도의 관할 범위가‘울릉전도와 죽도(竹島), 석도(石島)’로 규정되었다. 이것의 의미는 울릉도와 독도에 관한 대한제국의 영토의식과 주권행사가 대한제국 칙령 41호에 반 영되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