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평 이성산성은 남성과 북성 등 2성이 유기적으로 기능한 토성으로, 산성에서 출토된 철기와 철기 생산 유물의 검토를 통하여 남성과 북성에서 모두 철기제작이 이루어졌으나 제철은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파악되었다. 또 산성 내에서는 단조철기 위주의 철기제작이 이루어진 것으로 파악되었다. 또 남성과 북성 출토 철기는 대부분 3세기 후반~4세기 전반의 시기에 수렴되어 이 시기에 취락 형성 및 토성 축성이 이루어진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철기의 변화상과 성벽과 주거지와의 중복관계를 통하여 원삼국시대후기부터 취락을 형성하고 있던 바탕위에 축성이 이루어졌으며, 축성된 이후에도 성내의 여러 시설들을 지속적으로 구축하면서 늦어도 5세기 중엽까지는 성으로서의 기능을 유지하였던 것으로 파악되었다. 또 철기 중 大型鐵釘과 주조철부는 풍납토성 등 백제 중앙으로부터 공급된 것이 있는 반면에, 鐵鋌과 무경삼각형철촉, 릉형철촉 등 동남부지역의 김해․부산지역과 밀접한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철소재 또는 화폐로서 철 및 철기의 교역과 유통과정을 잘 보여주는 철정의 경우 미호천과 금강 수계 및 서해안을 따라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어, 이 시기에 변한 및 가야와 밀접한 교류관계가 형성되어 있었으며, 大河川수계를 이용한 교역과 교류, 철기 및 철소재의 유통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교역․교류는 원삼국시대 전기부터 있었으며, 원삼국시대 후기에는 한강 하류역까지 교류가 확대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기에는 경주를 중심으로 한 경북내륙지역과 주로 교류하였으나, 3세기경부터는 김해․부산지역으로 교류 대상이 변화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성산성 출토 동남부지역 계통의 철기들은 후자와의 교류과정에서 나타난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러한 교류 및 교역은 주로 철제품 및 철의 확보를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파악되었다. 그 이후 4~5세기에 들어서도 백제와 가야간의 교류와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다만 5세기 중후엽 이후에는 김해․부산지역에서 합천․고령을 중심으로 한 대가야로 교류의 주 대상이 바뀌어 갔다. 이러한 철 및 철기의 교역․교류과정에는 철제품의 교역과 제철기술자의 이주․정착 단계, 철제품과 철소재(철정)의 교역과 신․구의 이주․정착 제철기술자들의 기술이전 및 현지화 단계, 제철 및 철기의 백제적 정형화와 확산 단계 등 3단계의 변화 과정을 거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부모산성에서는 건축부재류, 농공구, 무기, 마구 등 다수의 철제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이들 철제유물의 특징과 계통, 사용 시기에 대하여 검토해본 결과, 백제계․고구려계․신라(통일신라)계 등으로 변별되었다. 이와 같이 계통 분류된 철제유물들을 연대 추정이 가능한 타 유적 출토 철기들과 대비하고, 함께 출토된 토기류의 편년과 대비해본 결과 크게 다섯 개의 획기로 나누어지며, Ⅴ기 이후에도 다시 2개의 획기로 구분될 가능성이 상정되었다. Ⅰ기는 백제 한성기 후기의 철기와 토기 등의 유물들과 이와 관련된 주거지․저장수혈 등이 나타나는 시기로서, 5세기 중후엽 이전부터 백제 세력이 점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었다. Ⅱ기는 5세기 중후엽으로 편년되는 고구려계 유엽형․착두형 철촉 몇 점과 토기편들이 미미하게 나타나는 시기로, 이 시기부터 6세기 전반까지 고구려 세력의 관할 하에 있었지만, 城內에는 고구려 세력이 직접 주둔하지는 않은 것으로 파악되었다. Ⅲ기는 6세기 중엽~후엽, 신라계 무기류와 농공구류가 신라후기양식토기들이 급격히 돌출하는 시기로서 6세기 중엽부터 신라세력에 의해 석축산성이 축성된 후, 6세기 후반까지 점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었다. Ⅳ기는 백제 사비양식 무기, 농공구류와 토기와 기와가 돌출하는 시기로서 부모산성을 백제가 다시 탈환하여 일정 기간 점유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Ⅴ기는 6세기후반~7세기 3/4분기 이전으로 편년되는 장경식의 신라계 무기류, 농공구류, 건축부재류 등 대다수의 신라계 철기들이 다시 집중되는 시기로서 부모산성이 신라세력에 의해 다시 탈환되어 그 이후 지속적으로 점유되었던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Ⅴ기 이후인 7세기 3/4분기 이후에는 신라토기와 철제유물은 잘 확인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7세기 중후반경, 백제(660)와 고구려(668)의 멸망과 삼국통일, 서원소경의 설치(685) 등의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종전에 비해 부모산성의 위상과 중요성이 약화되었거나 새로운 편재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상정되었다. 그 후 8세기중엽 이후 전형적인 통일신라 토기들이 다시 나타나고 있어, 기존에 청주지역에 설치된 서원소경을 서원경으로 개칭되면서 행정개편이 이루어진 것과 연동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와 같이 부모산성은 5세기 중엽 ~ 8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백제․고구려․신라가 수 차례에 걸쳐 서로 뺏고 뺏기는 각축장으로서 행정․군사․물류 거점 역할을 하였던 중요한 관방시설로서, 부모산성과 청주지역 뿐만 아니라 시기에 따라 삼국간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관방유적이었던 것으로 파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