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월아산의 法輪寺와 靑谷寺는 寺格에서 조선 초기에 법륜사가 우월했으나 조선 중기에 접어들면서 차츰 변화가 일어나 청곡사가 우위에 서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의 주요한 요인은 사족들과의 인적 네트 워크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牧隱 李穡과 愼齋 周世鵬 등은 조선 중기 진주지역 사족들의 청곡사에 대한 긍정적 인식, 청곡사의 사격 변화와 사세 유지·확장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던 인물이다. 청곡사의 사격이 높아지자 16세기 중반에 이르러 진주지역의 사족들도 그곳을 유람과 독서의 장소로서 자주 찾거나 머무는 장소로 삼았다. 이로써 청곡사는 지역 사족들의 다양한 경험이 매개된 장소로서 의미를 갖기 시작했다. 이들은 남명학파로 분류되는 지역의 이름난 사족 가문 출신이었다. 이는 1592년 10월 왜군에 의해 燒盡된 청곡사의 중창 불사가 비교적 빠른 1601년 겨울부터 시작될 수 있었던 사회·문화적 배경이었다. 浮査 成汝信과 鳳岡 趙㻩은 17세기 전반에 이루어진 청곡사의 중창 불사를 重建 記文으로 남겼다. 이는 청곡사 역사에서 남아 전하는 첫 문헌적 근거라는 점에서 의미가 적지 않다. 성여신의 「靑谷寺重建記」 와 조겸의 「靑谷僧堂記」에 의하면 청곡사의 중창 불사는 1601년 겨울부터 시작되어 1624년에 1차, 1644년에 2차에 걸쳐 모두 70여 칸 이상의 전각이 완성되었으며, 이 절의 승려 性侃, 戒行, 克明, 道引, 宗修, 惠嚴 등이 주도하였다. 또 두 기문에는 청곡사의 寺勢를 엿볼 수 있는 내용이 구체적으로 나온다. 이러한 청곡사 중창의 시기에 진주지역 남명학파는 정치적 격변을 겪었다. 특히 서인정변 이후 진주지역 사족 집단은 정치적 측면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 이 같은 때 성여신 등은 정치적 불안과 혼란에 대응하여 自靖하고 뒤이어 그들은 청곡사를 은거의 장소로 삼았다. 이는 1602년 이후 청곡사의 중창 불사로 인한 寺格과 寺勢의 변화가 초래한 공간적 요인만이 아니라 정치적 오해를 불식시킬 필요성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