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려진 바와 같이 프롤레타리아 문화운동에서 말하는 “예술”이란 미술이나 음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로 문학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프롤레타리아 문화운동은 문학이 중심이 된 운동으로, 다른 분야의 예술활동은 부수적인 존재로 인식되었다. 운동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것도 문인들이었다. 프롤레타리아 미술운동에 대해서 문학과 문인들이 미친 영향은 간과할 수 없는 정도로 컸다고 볼 수 있음에도 기존 연구에서는 문학과 미술 간의 관계에 관한 고찰이 부족하였다. 이 논문은 이러한 프롤레타리아 문화운동에서 문학과 미술이 어떤 관계였는가를 이른바 예술대중화논쟁을 통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예술대중화논쟁이란, 프로레타리아 문화운동에서 “문학은 대중들에게 직접 작용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나카노 시게하루(中野重治)의 주장에 대해서 쿠라하라 코레히토(蔵原惟人)가 운동의 대상을 예술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지식인층과 계몽이 필요하는 대중의 두 계층으로 나누어서 활동해야 한다고 반론하는 데에 시작된 논쟁이다. 예술대중화논쟁은 멀리 조선에도 전파되는 등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쳤으나 일본 국내에서는 문학논쟁에 그치지 않고 미술논쟁으로도 발전해 나갔다. 1928년 2월에 발표된 나카노 시게하루의 글 회화에 관한 긴급한 하나의 문제 (絵画に関する緊急なる一問題) 는 이른바 미술분야의 예술대중화론이며 이 논쟁에서는 쿠라하라보다 오카모토 토키(岡本唐貴)가 중심적인 논객이었다. 여기서 나키노가 주장한 것은 회화는 선동(煽動)을 위해 쓰여져야 하고 노동자들 속으로 깊이 들어가서 노동자의 모습을 화폭에 담아야 한다는 것이었으며, 그에 대해 오카모토는 화면에 무엇이 그려져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작품에 어떤 정신성이 내포되어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오카모토는 프롤레타리아 미술운동에서도 미술의 자율성이 확보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지만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프롤레타리아 문화운동이 부정해온 부르주아적인 사고방식이기도 하였다. 예술대중화논쟁이 쿠라하라 측의 승리로 끝나면서 미술분야에 있어서도 오카모토의 주장이 힘을 가지게 되고, 원래 낫프(NAPF)에서 활동해온 화가들이 모색 중이었던 마르크스주의 미술이론을 몰아냈고 프랑스 중심의 미술이론에 좌익사상을 접목함으로서 새로운 방법론을 등장시켰다. 이로써 서양중 심적인 미술개념을 극복하자는 프롤레타리아 미술운동의 맹아적인 시도가 말살되었을 뿐더러 이론 면에서도 모순이 내포된 채 활동이 진행되었다. 또한, 오카모토의 승리로 대정기(大正期) 신흥미술운동의 핵심단체였던 “조형(造型)”이 새로운 활동장소를 찾아서 프롤레타리아 진영에 합류했는데 그 길을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