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한자한문 기초교육의 교재로 중시되었던 『千字文』과 『蒙求』가 한중일 국에서 유행한 양상을 개괄하고, 각 지역의 교양 형성 방식의 차이에 따라 각각 이한 속찬본이 편찬된 사실을 논하였다. 『千字文』은 형식면에서는 4언 고시 형을 취하면서, 對仗, 押韻, 連綿字를 활용하여 한자한문 공부에 유용하였을 뿐만 니라, 서체의 교본으로도 이용되었다. 당나라 李澣의 『蒙求』도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의 교양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려와 조선초에 智永 『千字文』과 조맹부의 『千字文』이 많이 보급된 이후 『천자문』은 평측 공부의 자료로서도 활용하기 위해 판각 때 성조를 표시하되, 한국한자음의 특성에 근거하여 평성과 입성을 제외한 상성과 거성만을 표시하는 방식으로 발전하였다. 『千字文』은 일상생활에서도 다양하게 활용되어 『千字文』의 1천글자를 序數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金時習의 『千字儷句』를 시작으로 『千字文』의 본뜬 千字文류가 등장하여 해방 이후까지 다양한 변용의 양상이 나타났고, 若鏞의 『兒學編』과 같이 『千字文』의 형식을 비판한 새로운 체제의 속찬본도 왔다. 蒙求는 인물고사집으로 널리 활용되었지만, 조선시대에 주자학이 발달하면서 주자학적 성향을 지닌 속찬본이 요구되었다. 그 요구에 부응한 것이 柳希春의 『續蒙求』이다. 다만 柳希春은 주자학 관련 인물의 일화를 초촬하고 내용 위주로 체의 구조를 조정하여, 이한의 『蒙求』와 같이 압운에 있어서 정연한 체제를 갖추지는 못하였다. 본도 중국의 『千字文』과 『蒙求』를 받아들이되, 각각 『世話千字文』과 『本朝蒙求』와 같은 특이한 속찬본을 산출하였다. 17세기 이후 일본 지식인층은 대체로 운의 구조를 문자활동에서 능숙하게 활용하지는 못하였으나 일부 지식인은 압운을 치밀하게 연찬하였다. 게다가 자국의 역사와 생활을 매우 중시하여, 菅亨의 本朝蒙求(1686)을 비롯한 독자적인 『蒙求』의 속찬서가 출현하게 하였다. 『本朝蒙求』는 압운의 구조도 매우 중시하였다. 으로 동아시아의 한자한문교육은 한자문화권의 基底와 그 위에 형성된 인간정체성의 개념에 관심을 두면서도 각 지역의 역사적 맥락을 중시하여야 할 것이다. 이때 한국이나 일본에서 중국의 텍스트를 활용하되 각각의 역사와 문화를 배경으로 그 텍스트를 자국화한 양상도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