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주로 정치적, 사회경제적, 문화적 맥락 속에서 연구되어 왔다. 그러나 새로운 접근방법에서는 후원자들과 그들의 성별, 사회적인 지위가 작품제작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가, 또는 미술이 특정집단의 사람이 살아온 환경 속에서 어떻게 소통과 자기표현 수단으로 사용되었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이러한 새로운 시도들은 조선시대 예술가들을 단순히 중국 수입품에 의존하는 이들로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관점에서 당시의 미술을 볼 수 있게 하였고 이를 통해 그들의 지적, 문화적 욕구를 표현하기 위한 영감으로써 중국미술의 경향을 어떻게 수용했는지를 보여준다. 조선 초기 회화 특히 안견의 <몽유도원도, 1447년> 와 신숙주의 「화기」는 조선전기 문인들이 아직 사회적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지 못한 시기에 자신들의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해 중국의 이론적 담론, 도상 및 양식들을 사용하였는가를 보여준다. <몽유도원도>는중국의시인인 도잠(연명, 365-427)이쓴 「도화원기」 에서 비롯되었으나 도잠의 시와 중국 도상을 그대로 따르지는 않고 있다. 「도화원기」의 현실도피적 측면은 안평대군이 당시 처해있는 정치적 상황 속에서 해석할 수 있다. 양식적으로는 <몽유도원도>에서중국 북송대의 화파인 이곽파의특징을 찾을 수 있다.「화기」서론 부분의 한유와 백낙천에 대한 언급과, 소식을 상기시키는 「화기」끝부분의 철학적 담론은 안평대군의 골동수집 취향, 안견의 회화 양식과 당대의 지적 문화적 경향과 잘 부합된다. 곽희 양식에 대한 인식, 도화원기의 도상학, 한유의 미술품 수집에 대한 저술과 소식과 동시대인들의 미학적 문학활동은 고려 왕조의 어느 시기엔가 한국의 학자와 화가들에게 전달되었다. 조선초기까지 이러한 인식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자신들의 사회적 지적 정치적 위치를 확고히 하기에 적합하다고 여기는 것은 무엇이든 선택하고 이용할 수 있었던 학식 있는 문인 집단에게 있어서 실질적이고 이론적인 소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