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구는 조선 후기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관방도 성격의 함경도엽에 대한 지리・서지학적 고찰을 통해, 지도의 특징과 가치를 규명하는데 목적이 있다. 이 지도는 함경도 지역의 지형, 지세, 군사 시설 등을 상세히 표현하고 있어, 조선 후기 국방 정책 및 군사 전략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지도의 기호와 주석을 해제한 결과, 청나라가 언급되었다는 점, 백두산정계비가 표기된 점, 지도의 제작기법과 형태가 정상기의 동국지도와 매우 유사하다는 점, 홍충도의 지명이 사용되지 않은 점 등을 근거로 1740년에서 1778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지도는 동국지도의 초기 수정본 계열에 속하며, 군사・방어에 치중한 특성이 두드러진다. 이 연구는 기존 연구에서 간과되었던 개인 소장 고지도를 분석하고, 지도에 나타난 기호와 주석을 심층적으로 해제하여 그 의미를 구체화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러나 함경도엽의 정확한 제작 연도를 밝히지 못하고, 모든 지리 정보를 분석하지 못하였다는 한계도 가진다.
일제시기 함경도는 ‘군(郡)’의 숫자가 늘어난 유일한 지역이다. 증설된 네 개의 군은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2개는 1914년부제(府制)의 실시에 따라 부가 분리되면서 나머지 지역이 군이 된 경우이고, 나머지 2개는 도의 군 면적이 넓고 인구도 많아 증설된 경우이다. 후자의 경우 도 내 군들 사이의 균형과 ‘부원(富源)’의 개발 가능성을 고려했던 것 같다. 또 함경도는 다른 지역에 비해 부와 지정면·읍의 증가가 활발히 이뤄졌다. 이는 도시화의 진전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 배경은 일본의 군사적 점령,1930년대 이후 ‘북선(北鮮) 개발’이다. 이러한 행정구역의 변화와 서로 호응하면서 함경도의 인구 구성도 변화하였다. 함경도의 산업별 인구 비중을 보면 1920년은 전국과 유사하게 농업이 85% 전후를 차지하는 1차 산업 위주의 지역이었으나, 1940년 농업인구의비중은 50%를 넘지 못했다. 대신 광공업과 어업 인구의 성장, 그에 따른 상업과 교통업 인구의 증가가 눈에 띈다. 함경도의인구 증가는 사회적인 요인이 컸는데, 인구 흡수 요인으로 ‘북선 개발’에 수반한 여러 사업의 진전을 꼽을 수 있다. 이에 한국인뿐만 아니라 중국인, 일본인도 일자리를 찾아 모여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