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한말과 일제시대에 주리론과 위정척사사상을 고수하였던 의령의 입암 남정우의 교유관계와 학문세계를 분석한 것이다. 입암은 영남의 盧沙 학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로서 寒洲 학파의 인물과 교유가 깊었기 때문에, 한말 유학계를 대표하는 두 학파의 상호교류나 학설의 발전을 살피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
입암은 노사학맥에서는 노백헌 정재규, 農山 鄭冕圭, 한주 학맥에서는 俛宇 郭鍾錫, 弘窩 李斗勳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이에 그의 성리설은 노사학설과 한주학설이 종합되어 나타난다. 그는 노백헌과 농산의 학설을 한주의 학설과 동일한 心卽理와 理體理用으로 이해하였다. 한주의 심즉리설은 본래 노사의 리주재와 이일분수의 관점을 보다 발전시킨 것이기 때문에 노백헌이 한주의 설을 수용하는데 큰 무리가 없었다. 입암은 허령도 아예 리로 이해하여 노백헌의 심설에서 논란이 되었던 리의 작용성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에 입암의 심성론은 곧바로 기의 작용을 중시하였던 夷川 南昌熙 등에 의해 심은 기로 보아야 한다는 반박을 받기도 하였으나, 노백헌의 뒤를 이었던 농산이나 송산 등의 지지를 받아 심즉리설이 노백헌의 정통설로 굳어지게 되었다.
또한 입암은 심을 리의 차원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에 敬을 통해 인심을 억제하고 도심을 온전히 발현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매사에 선악을 구분하여 절대선을 지향하고자 하였으며,예설에서도 명분이 바르지 않으면 의리에 부당하다고 하여 명분에 입각한 예설을 따랐다. 이러한 입암의 학문은 주자와 노사, 노백헌의 학풍을 계승하여 이기, 심성에서의 주리설과 경을 통한 수양을 중시하였으며, 사상적으로는 衛正斥邪를 고수하였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