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이츠는 아일랜드의 음유시적 전통과 당대 유럽의 지식사회에서 강한 영향력을 발휘한 부동의 미학을 연결지어 본인만의 독특한 비극론을 전개한다. 유럽 상징주의 드라마가 자신의 연극론 형성에 갖는 잠재력을 예리하게 간파한 예이츠는 특히 벨기에 극작가 모리스 마테를링크가 주창한 “정적 드라마”에 영향을 받는다. 동시에 그리스비극을 아폴로와 디오니소스적 욕망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의 산물로 바라보는 니체의 비극 철학에 매료된다. 본 연구는 예이츠의 비극 이론을 니체철학과 마테를링크의 극이론의 창의적 수용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고 분석하며 그 장단점을 논의한다. 특히 ‘비극적 환희’라는 극적 효과가 극형식과 연계되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에 주시한다. 예이츠는 그가 가졌던 사실주의에 대한 강한 반감 때문에 마테를링크의 일상성과 니체의 아폴로적인 욕망에서 보이는 형식의 중요성을 간과하게 된다.
벨기에의 상징주의는 프랑스 상징주의만큼 중요하다. 프랑스 시인 비에 르는 선구적 시인인데, 특히 메터링크에 큰 영향을 준다. 예이츠 역시 자신에게 미친 상징주의자로 비에르를 인정한다. 그러나 비에르는 예이츠가 유일하거나 최초의 상징주의 시인은 아니다. 1890년대에 프랑스 문학계를 잘 몰랐던 예이츠는 메터링크와 동시에 아니면 메터링크가 자신의 세대에 속하지만 메터링크를 만난 직후에 만난다. 그러나, 예이츠는 비에르의 영향은 인정하지만, 자신을 메터링크와 연결 짓는 평론가를 미묘하게 들춰낸다.
무너지는 탑, 깊은 샘이나 분수, 넘을 수 없는 분지방의 상징은 메터링 크에게 만큼 예이츠에 해당되며, 사실 전세대에 해당된다. 따라서 이 논문은 예이츠와 메터링크의 상징의 동일성이나 차별성에 주목하는데, 상징의 구상과 사용을 보려고 한 다. 이들은 자신들의 글에서 비슷한 개념을 설명한다. 문학은 본질적으로 상징적이다. 그들은 상징과 알레고리를 구별하는데, 상징은 단순한 추상적 개념의 이미지는 아니 며, 상징은 이성 너머에 뿌리가 있고, 신성한 본질이 있다. 예이츠의 바일의 스트랜드에서와 메터링크의 탱토질의 죽음과의 비교는 19세기 말의 개념들에서 나타나는 “극적 상징주의”의 특별한 형태를 노출시킬 것이다. 메터링크는 작가란 신성한 상징을 피동적으로 받는 사람이라고까지 믿었던데 반해서 예이츠는 작가의 창조적 힘을 믿었 다. 이점이 두 작가가 다른 기법을 선택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벨기에 극작가 모리스 매터링크는 새로운 드라마를 창조하기 위해서 셰 익스피어와 입센을 연구하여, 가냘프고 다소 있을법하지 않은 주인공들을 괴롭히는 일 종의 좀 몰인정한 운명론과 인생의 무의미성을 결합한다. 이런 종류의 극은 예이츠, 싱, 그리고 무엇보다 새뮤엘 베켓트를 예상하게 한다. 사실, 메터링크의 미궁 같은 성 (城)의 무대장치는 많은 모더니스트 극의 이해 불가하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무대장치 를 예상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