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문학사에 있어 당대(唐代), 그 중에서도 중당(中唐)이라는 시기적 위치는 특 별함을 가지고 있다. 이 시기는 사인(士人) 계층의 개혁 의지가 강렬해지면서, 정치, 문화, 학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변화가 본격화된 시기이기도 하였다. 특히 과거(科 擧)를 통해 선발된 문인 계층이 신흥세력으로 부상하면서 그들만의 문화를 형성한 것도 바로 이 시기이다. 중당(中唐)을 대표하는 문인 중 문체 개혁운동의 정점에 서 있던 인물이라고 한다면 한유와 백거이를 대표적으로 떠올릴 수 있다. 양인(兩人)은 각각 문체 개혁운동에도 힘쓰면서도, 문인 집단을 이끌어간 영수(領袖)의 위치에 서 있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문인 집단 내에서는 교유가 활발했던 두 문인이었지만, 오히려 두 문인 간에는 교유의 흔적을 찾아보기 쉽지 않다. 본고에서는 한유와 백거 이 양인(兩人) 간 교유시(交遊詩)에 대해 소개한 뒤, 어떠한 상황 하에서 어떠한 내 용으로 교유시를 증답하였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작품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였으며, 이외에도 양인(兩人)의 교유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중당(中唐) 시기의 환경적 특징에 는 어떠한 요소들이 있는지 간단히 살펴보았다.
중국 문학사에서 당대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중당 시기의 문학사(또는 문화사)를 살펴보면, 아주 특별한 문학 현상을 접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詩僧”(집단)의 출현이 그것이다. 시승 이라 함은 문자 그대로 “시를 쓰는 승려”라는 말이다. 즉, 출가자인 승려들이 시가 창작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본 논문에서는 "시승" 의 개념과 그 문화적 함의를 고찰해보고, 중당시기 시승 출현의 문학사적 의미를 조명하였다.
물론, 중국 문학사에 있어서 승려의 시가 창작이 중당 시기에 처음으로 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西晉시기부터 이미 승려들 개인의 창작 시가가 출현하고 있다. 그러나 서진 시기의 승려 시가 창작은 그 작자나 작품 수가 매우 적고, 그렇기 때문에 또한 당시의 문단에서도 그다지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이에 반해 중당 시기 “시승”의 출현은 그 작품 수나 창작의 수준, 그리고 당시 문단에서의 지위에서나 모두 동진이나 중당 이전의 초당, 성당을 능가한다. 특히 중당의 "시승"은 시가 창작에 대한 높은 자각의식 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하나의 시가창작자로서의 집단을 형성하여 활동하였다는 점에서 볼 때, 唐代문학사나, 더 크게는 중국 문학사 전체에 있어서도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문학사적 입장에서 볼 때, 외래문화로서의 불교가 중국화되었다는 명확한 지표라는 점에서 그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