芳洲 文國鉉은 둔암-성재-순암-성호-퇴계로 이어지는 학통에서 발견되는 보수적이고 반외세적인 영향으로 일찍부터 서구세력의 동점을 경계했다. 외세에 의한 침탈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그가 제시한 것은 자기 수양과 함께 유학의 부흥과 후진의 양성이었다. 그의 전 생애에 걸쳐 조선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사건과 국권의 상실의 역사적 상황은 그로 하여금 그의 이념의 적극 적인 실천 보다는 세상으로부터의 도피와 은둔을 선택하게 하였다. 은둔자로 자처하던 방주는 개방적이기 보다는 보수로 삶의 방향을 결정하여 유가의 전통적인 이념을 묵수하면서 혼란한 시대에서도 本性의 유지와 심성의 함양을 통한 인간 도리의 실천 그리고 유가의 전통적인 학문 공부를 통해 미래 사회에서의 재기를 꿈꾸었다. 이 시기의 방주의 학문경향이나 문예관은 조선 500여년을 면면히 이어온 유 가적 학문・문예관을 충실히 계승하기는 하였다. 그렇지만 근대로 들어서는 시 대 상황을 고려하여 평가할 때는 역사의 변화에 순응하지 못하는 또는 동참하 지 않으려는 보수적인 유학자로서의 문예관을 고수한 인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