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통일신라의 명주와 삼척군에 대하여 삼국사기 기사를 토대로 기본적인 내용들을 정리한 것이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명주의 지명은 고구려의 하슬라에서 신라의 하서아=하서량으로 변해 갔으며, 문무왕부터 경덕왕에 이르는 시기에는 하서(주)의 지명이 사용되었다. 이후 경덕왕대의 지명 개정을 거쳐 명주가 등장하였으며, 신라 하대에 이르기까지 명주와 오랜 지명인 하슬라가 함께 사용되다가 신라말 고려초를 경과하면서 명주가 우세해진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주치인 명주의 영현들 가운데 정선현과 속(동)제현의 입지를 태백산맥을 넘어 영동지역으로 진출하는 교통로의 확보라는 측면에서 바라보았다. 그리고 지리지의 명주 군현들의 입지를 검토하면서 지리적인 입지에서 약간의 의문을 남기고 있는 곡성군과 녹무현의 입지적 배경을 검터하였다. 이들 군현은 경상북도 내륙지방에 위치하였는데, 이를 왕경의 방어라는 시각에서 설명하였다. 신라는 통일 후 왕경을 중심으로 한 지방사회의 재편성을 시도하였는데, 이는 왕경으로 연결되는 주요 간선교통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9주 체제 내에서 운영되었던 10정의 설치가 교통로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그 결과 곡성군과 녹무현의 입지가 결정된 것으로 보았다. 삼척군은 명주와 더불어 통일 이전 동해안 지역의 핵심 거점이었다. 이러한 사 실은 주치가 시대적 상황에 따라 하슬라와 실직(삼척)으로 이치되는 현실에서 증명되고 있다. 이와 더불어 무열왕대 설치된 북진(北鎭)은 하슬라(명주)지역의 해 상 방어를 위한 해군기지로서 운영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외에도 삼척지방에서는 중고기 북쪽 경계지역이라는 인식을 토대로 중대의 사해 제사가 열리기도 했지만, 통일 이후 고구려고지 방면으로의 국경의 확장과 주치가 명주로 고정되면서 동해 안의 핵심 거점으로서의 위상을 잃어 갔다. 이어서 하대의 전란 속에서 읍세가 위축되면서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4개의 영현 가운데 3개의 영현이 미상 지명으로 남겨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