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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仁祖反正(1623)으로 쇠퇴하기 시작한 남명학파는 戊申亂(1728) 이후 강우지역 에 대한 경계와 불신이 짙어지면서 더욱 위축되더니, 끝내 과거의 영광을 회복 할 기회도 얻지 못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잊혀야 했다. 눌암 박지서가 한창 활 동하던 시기는 18세기 후반~19세기 초반으로, 남명학의 쇠퇴가 150년 이상 지 속되고 나아질 기미조차 없던 시기였다. 눌암은 가계·학문·지역적 연원으로 보아 남명학적 성향이 다분히 드러날 수밖 에 없는 여건이었지만, 정치적으로 배제된 지역의 在地士族으로서 문중을 살리기 위해서는 현실적 대세를 비켜갈 수 없었다. 이에 진주지역에 세거한 눌암의 문중도 증조부 때부터 南人化 성향을 드러냈고, 눌암에 이르러 더욱 폭넓은 교유를 통한 남인화가 이루어졌다. 그에게서 보이는 退溪 중심의 治學 방법이나 문학작품에서 남명학 관련 언급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점 등이 이러한 문중적 성향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눌암이 강우지역 남명학파적 성향을 버리고 남인으로서의 특성 만 드러낸 것은 아니었다. 가계·학문·지역적 여건에 의해 계승된 남명학파적 성 향 위에 남인화 성향이 보태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눌암이 평생 이룩한 수많은 지적활동은 강우지역에 집중되어 나타났다. 강우지식인의 오랜 염원 인 南冥의 文廟從祀 請願을 주도하였고, 침체된 진주지역의 鄕學風 쇄신을 위해 향교와 서원 등의 교육시설 중건에 앞장섰으며, 남명학파의 시련과 함께 역사에 묻혀버린 지역 선현의 삶을 찾아 기록으로 남기려는 노력들이 이를 증빙하고 있 다. 적어도 그의 생애에 드러난 활동으로 평가한다면, 눌암은 남명학파적 성향 을 지닌 江右學者였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