訥庵 朴旨瑞(1754-1819)는, 朝鮮 英·正祖 때 慶尙右道에서 활약했던 학자로 일생 동안 벼슬에 나가지 않고 學問硏究와 弟子養成에 전념했다. 특히 그는 南冥學을 家學으로 하는 泰安朴氏 家門에서 태어나 6대조 凌虛 朴敏과 曾祖父 朴泰茂의 정신을 이어 江右地域에서 비중 있는 역할을 하는 학자로서 여러 가지 큰 儒林事業을 해내었던 것이다.
訥庵은, 近畿南人의 대표적인 학자인 順菴 安鼎福과 退溪學派의 대표적인 학자인 東巖 柳長源을 스승으로 삼아 근기남인과 江左地域의 학자들과 폭넓은 學問的 교류를 하면서, 慶尙右道의 學問的 位相을 높이려고 노력한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南冥의 文廟從祀를 청원하는 疏章을 저술한 남명학파의 핵심적인 인물이다. 남명학파에 속하는 학자로서는 文集의 분량도 상당히 많은 편이고, 그의 문집은 南冥學派 및 江右地域의 學問的 動向을 알 수 있는 文獻的 價値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당시 學者들로부터 '江右儒宗', 또는 '南州第一人'이라는 稱道를 받았다. 本考에서는, 訥庵 朴旨瑞의 生涯와 그의 폭넓은 師友關係, 당시 江右儒林社會에서의 역할 및 江右學派 연구의 寶庫라 할 수 있는 그의 문집인 『訥庵集』의 내용 및 가치에 대해서 고찰하였다.
訥庵은 江左地域의 많은 學者들과 近畿南人學派의 학자들과 폭넓게 交遊하여 학문적 視覺을 넓혀 江右地域 학자로서의 한계를 초월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의 문집의 분량도 江右地域의 앞 시대 학자들보다 증가할 수 있었다. 江右地域의 先輩學者들의 著述이 거의 없었고, 學統이 이어지지 않았기에, 訥庵이 계승할 수가 없어 정신적으로는 南冥을 이었지만 그 學問形成은 朱子와 退溪의 學問에서 得力하고 있다.
그가 수행한 뚜렷한 業績으로는 南冥의 陞 運動을 비롯한 여러 先賢들의 宣揚事業과 原稿 상태로 남아 있던 이 지역 이전 學者들의 文集의 교정·간행과 매몰된 先賢들의 事蹟을 정리하여 碑碣을 세우는 일이었다.
그의 이러한 왕성한 學問的 交遊와 活動은, 仁祖反正 이후 침체되었던 江右學派가 새롭게 일어날 기초를 마련하여, 19세기부터 江右地域에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게 만든 原動力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