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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글은 기존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삼화사 창건 내역과 노사나불상 조성의 내용, 그리고 불상 조성의 불교사적 의미를 살펴본 것이다. 다만 불상의 양식을 중 심으로 고찰한 기존 연구와 달리 명문에 기록된 결언의 행적, 사상 경향을 통해서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상 조성의 정치적인 입장을 주로 살폈다. 삼화사는 대체로 후삼국통일 이후에 왕건이 범일의 遺墟에 전각을 세우고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기록된 내용으로 보아, 범일이 터를 닦기 이전에 이미 삼화사는 지금의 자리보다는 바다에 가까운 계곡 아래쪽에 자리 하였다. 삼화사 옛 터에는 석탑 1기와 함께 철불 2구가 있었다고 전한다. 현재는 1구의 철불만이 남아 있는데, 그것은 삼화사 적광전에 봉안된 노사나불상이다. 이 불상은 ‘말법이 시작된 지 300여 년’에 조성되었다.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상이나 염거화상 승탑의 명문과 관련하여 볼 때, 제작 시기는 대체로 860년 쯤일 것이다. 없어진 1구의 철불은 9세기에 전국적으로 비로자나불상 제작이 성행하였음을 고려하면, 비로자나불상일 것으로 짐작된다.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상 조성 불사는 결언이 주관하였다. 결언은 삼화사 노사나 불상을 조성하는 불사를 설행한 뒤, 다시 숭복사 노사나불상을 제작하는 불사에 참여하는 등 주로 노사나불상 조성에 깊이 관여하였다. 숭복사 노사나불상의 제작은 경문왕의 지원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따라서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상도 경문왕 의 교서에 의해서 제작되었을 것이다. 곧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상의 조성에는 즉위 직후 위상을 부각하면서 정국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경문왕의 정치적 의도가 반영 되었다. 결언은 해인사 승려였다. 헌강왕과 정강왕 때 해인사에서는 지엄과 의상을 추모 하는 법회를 개최하면서 60권 󰡔화엄경󰡕과 80권 󰡔화엄경󰡕을 사경하는 화엄불사를 설행하였다. 결언은 현준과 함께 이 불사를 주관하였다. 결언은 성기론적 화엄사 상을 가졌지만, 유식 논리에도 유념하였으며 실천 논리에도 관심을 가졌다. 결언 이 융섭적인 화엄사상을 강조하면서 노사나불상과 비로자나불상을 조성하는 불사를 주관하였으므로, 삼화사 노사나불상 조성 불사는 화엄사상을 통해 당시 불교계를 아우르려는 경문왕계 왕실의 입장이 반영되었다. 경문왕계 왕실은 노사나불상과 비로자나불상을 조성하면서, 당시를 말세로 인식하는 민심을 위무하고, 굴산 문과 같은 선종산문을 견제하려고 하였다. 결국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상 조성 불사는 9세기 중반 이후에 경문왕계 왕실이 명주 일대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삼척 을 전략적 요충지로 삼아 지배력을 유지하려고 하였던 정치적 의도와 밀접히 관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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