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성경의 일부 혹은 전부가 문학적 해석의 여지를 가지고 있다는 관점에서 로마서에 기록된 사도바울의 자기 고백을 수사학적인 도구로 본다. 로마서 해석의 역사에서 바울의 개인적 고백이 담긴 7장 7-25절은 율법을 논하는 다른 부분의 내용과 문체적 차이를 보인다는 이유로 여담, 삽입, 낯선 내용으로 여기거나 혹은 바울이 저자가 아니라는 시각이 존재해왔다. 사도의 권위로 어렵고 중대한 율법을 다루는 담론에 지극히 사적인 고백이 들어간 것은 바울적이지 않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이 논문은 그것을 본문에서 벗어난 내용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난해하고 논란이 많은 율법이란 이슈를 1세대 크리스천 커뮤니티가 이해하도록 생생한 일인칭 내러티브로 설명한 문학적 도구로서 필수 불가결한 본질로 본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우리가 이제는 율법에서 벗어났다는 주장을 보강하려고 사적인 고백을 사용한 것이다. 바울의 문학적 전략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같은 믿음 안에 들어오게 하여 그들이 교회 안에서 서로 포용하도록 도와주는 데 있었다. “율법이 죄냐?”는 그의 물음은 율법을 지켜야 하느냐 마느냐로 대립하고 있던 교회 안의 두 그룹 모두에게 던진 질문이다. 따라서 바울의 자기 고백은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그리스도의 은혜 외에 율법으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준 문학적 도구로 사용됐음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교는 길(路) 위의 종교이다. 기원후 1세기, 그리스도의 복음을 땅 끝과 이방 사람에게 전파하기 위해 도상에 올라선 바울은 그리스도교 복음의 떠나는 본성을 그대로 지닌 ‘선교 여행자’였다. 바울이 선교 여행을 떠날 당시는 로마 제국의 치안 유지와 함께 제국 곳곳에 건설한 가도와 해로로 여행자들이 자유롭고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었다. 바울의 선교 여행도 로마 제국의 영토 내에서 로마의 가도와 해로를 통해 이루어졌다. 본 논문은 사도행전에 기록된 바울의 제1차 선교 여정의 이동 경로와 로마의 길의 상관관계에 대해 고찰함으로써,길을 통한 그리스도교 복음의 여정과 그것의 선교학적 의미를 연구한 다. 키프로스와 소아시아의 로마 도상에서 바울은 그리스-로마의 문화 및 종교관을 마주하며 하나님을 전하는 방식에 대하여 숙고했고, 궁극적으로 이 여정이 바울의 신학적 성숙을 이끌었다.
바울의 선교적 성숙은 그가 믿고 있던 복음의 의미를 풍성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선교 방식의 변화도 초래하였다. 구체적으로 바울은 그의 제1차 선교 여정 중 안디옥 설교와 루스드라 설교를 통해 지역적 특징과 청중의 문화적 수용성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 선교적 접근 방식의 차이를 처음으로 드러냈다. 바울은 안디옥 설교에 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부활을 강조한 반면, 루스드라에서는 오로 지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전달하는데 집중했다. 이처럼 바울의 설교는 지역적 특징과 청중의 종교문화적 감수성에 따라 그 선교방식을 완전히 다르게 취했다. 이런 현격한 선교 방식의 차이는 로마의 도상에 서 이루어진 여정으로 바울이 로마 제국의 종교 문화적 특징을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도상의 복음이 그 지역의 종교 문화적 감수성 과 만났을 때 선교적 성숙이 성취되고 있음을 바울이 걸어갔던 제1차 선교 여정이 보여주고 있다.
엘리엇은 매우 포괄적인 시인이다. 그는 겉으로는 자신의 선배시인이 나 비평가를 맹렬하게 공격하는 듯해도 실제 그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 우고 빌렸으며 이를 자신의 몰개성 시론에 적극 활용하였다. 프랑스 상 징주의자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어서 겉으로는 그럴듯하게 그들의 영향 력을 가렸지만, 시의 자기충족성이나 시어의 기능, 그리고 시인의 임무 나 역할과 같은 중요한 이론과 개념에서 많은 부분을 수용했다. 엘리엇 의 몰개성 시론의 가장 근본이 되는 개념을 발레리와 말라르메가 그들 의 이론에서 이미 예견하고 실행하였으니, 시는 자동성을 가진 몰개성 적 존재이며, 창작의 과정은 인간이 노동력을 매개로 여러 파편을 융합 하여 유기적이며 와해될 수 없는 총체적 존재를 만드는 것이고, 시어는 대중의 언어를 차용한 탓에 근본적으로 몰개성적인 것이며, 시인은 그 스스로가 보편인류를 대변하는 대행자라는 개념은 모두 엘리엇의 시학 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비록 엘리엇이 시어와 시인의 역할 부분에서 이들과 거리를 두게 되었으나, 시의 자동성을 예술의 자기충족성으로, 상징의 몰개성적 특성을 객관적상관물로 전화하고, 궁극적으로는 시인 으로부터 시의 독립성으로 나아간 데에는 이 두 상징주의 시인의 영향 이 지대하였음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