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이츠와 파운드 사이의 관계의 대체적인 큰 그림은 1910년대 수년간 형성되었다. 파운드는 부분적으로 예이츠를 만나기 위해 1908년 런던으로 오는데, 예이츠는 그보다 20년 연상이고 파운드는 예이츠를 시 분야에서 살아있는 거장으로 생각했다. 파운드는 문인들 사이에 곧 자리를 잡고, 올리비어 셰익스피어의 소개로 예이츠를 만나고, 예이츠가 매월요일마다 갖는 모임에 정규적으로 참석한다. 얼마 후 예이츠는 파운드를 비서로 고용하여 1913년부터 16년까지 서섹스의 스톤 코티지에서 3년 간 겨울마다 함께 머물면서 편지를 받아쓰게 하거나 가까이서 시를 쓴다. 이 생산적인 기간에 두 저명한 업적이 남는데, 예이츠의 『페르 아미카 루네』(1918년)와 파운드의 세 편의 장편시 를 포함하는 『러스트라』(1917년)가 그것이다.
1913년부터 1916년의 기간 동안 예이츠와 파운드는 영국 서섹스의 애 쉬다운 포리스트에 소재한 조그만 카티지에서 함께 겨울을 보냈다. 이른바 “스톤 카티 지 영혼의 워크샵”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이 문학적 공동작업은 모더니즘 운동의 효 시가 되었다. 그들의 문학적 공동작업의 결과 평온한 달의 부드러운 침묵의 산문집 과 해골의 꿈이라는 극이 탄생하였다. 전자는 1925년판 비전의 초판이전에 등장 한 예이츠의 시학의 가장 체계적인 이론서라 할 수 있고, 1917년 판 해골의 꿈은 일본의 니시키기와 같은 노극을 본격적인 모델로 하여 탄생한 것이다. 두 작품 다 예 이츠의 극이론과 시론의 이면에 자리잡은 열린 영혼의 시학의 미학적 선언문을 제시 하고 있다. 니시키기와 모토메주까 등의 노극을 모델로 예이츠는 그의 후기 극에서 “죽은 자의 환몽”의 극적 재현을 창안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