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호암동유적은 금강유역과 남한강유역, 낙동강유역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에 자리하고 있는 데, 적석목관묘는 기원전 2세기 초, 목관묘 2기는 기원전 2세기 전·중엽에 조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과학적 분석 결과, 호암동유적의 청동기들은 구리-주석-납의 3원계 합금으로 추정되며,『주례』고 공기의 금유육제와 비슷한 비율로 주조되었다. 이는 호암동유적의 청동기들이 기능과 용도에 따라 적 합한 성분조성비로 주조되었음을 나타낸다. 납동위원소비 분석을 토대로 한 원료산지추정 결과 중국 북부산 4점, 남한3지구산 10점, 남한2지구산 6점으로 추정되어서 청동원료가 넓은 지역에서 수급되 었음을 보여준다. 충주 호암동유적은 세형동검문화의 중심부인 중서부지역과 원료산지인 남한2지구(강원 동남부-경 북 동북부지역) 사이에 자리해서 무덤 피장자들이 청동원료를 수급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세형동검문화가 일본열도로 파급되는 시기는 호암동유적의 유이식동모보다 늦은 시기로 추정되므로 발전Ⅰ기 말보다는 발전Ⅱ기 초로 생각된다. 호암동 적석목관묘의 무기류는 “원격전용 투사무기+근접전용 단병충격무기(세형동검)+근접전용 장병충격무기(동모·동과)”조합 을 이루고 있어서 충주지역이 군장사회로 접어들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무기조합이 원삼국시대 토 광묘로 이어지는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