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검색조건
좁혀보기
검색필터
결과 내 재검색

간행물

    분야

      발행연도

      -

        검색결과 4

        1.
        2018.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논문이 천착하는 것은 예수회의 무굴 제국 선교 역사 가운데 스페인 출신의 선교사 제롬 사비에르가 이끌었던 제3차 선교이다. 특히, 그리스도교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던 무굴 제국의 황제 악바르의 요청에 따라 사비에르가 집필한 Mirʾāt Al-Quds (The Mirror of Holiness)에 주목한다. 악바르는 사비에르에게 그리스도의 생애를 페르시아어로 집필할 것을 요청하였고, 사비에르는 1602년 Mirʾāt Al-Quds라는 제목의 저서를 황제에게 봉헌했다. 사비에르는 이 책을 통해 일차적으로 악바르의 지적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했을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입증하고 악바르를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사비에르의 Mirʾāt Al-Quds는 무슬림의 예수 이해와 충돌을 일으켰고, 결국 악바르의 후계자인 자한기르 시대에 예수회 선교사와 무굴 제국의 무슬림 학자들 간의 궁정 토론을 촉발하였다.
        7,000원
        2.
        2014.11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글은 예수회 본국의 예술신학과 예술교육이 중국이라는 선교지의 예술선교 방식에 어떤 영향 주었는지를 17세기경 중국에서 만들어진 엠블럼 북의 제작과 이에 대한 중국인들의 반응을 살펴봄을 통해 고찰해 보았다. 이를 위해 2장에서는 예수회의 예술신학과 예술교육에 대해 살펴보았다. 기존에 예수회의 ‘예술신학’(Art Theology)이라는 이름으로 정의되지 않았던 예수회의 예술에 관한 신학적 관점을 ‘예술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정의하고 두 가지 정도로 정리하였다. 하나는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의 신학에 담겨진 아름다움과 예술에 관한 함의이다. 아퀴나스는 현실세계가 선한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이며 하나님의 진리와 선, 아름다움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아퀴나스는 예술이 자연을 모방하는 것은 신적 창조의 아름다움을 파악하고 자연 안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창조를 모방하는 행위로서 가치 있게 여겼다. 피조물을 재현한 예술작품은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을 계시하는 하나의 도구로 쓰일 수 있다고 보았으나 이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라고 본다. 다른 하나는 예수회의 ‘영적 이미지’(spiritual images)라는 이론으로서, 사람들의 마음에 복음을 피조물의 이미지를 통해 은유적으로 이해시키고 각인시켜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도록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이론이었다. 이러한 예술신학적인 관점에 따라 예수회에서는 이미지를 활용하여 신앙을 교육하고, 예수회 대학에서 원근법을 가르쳐서 복음을 전하고 회원들과 신자들의 신앙을 향상시키고자 하였다. 또한 엠블럼 북과 같은 삽화와 이에 대한 해설을 곁들인 책들이 유럽 본국에 널리 전파되고 유행하였다. 3장에서는 예수회의 예술신학과 예술교육의 내용들이 중국이라는 선교지에서도 적용되어 반영되는 과정을 17세기에 유럽에서 파송된 선교사들이 중국에 가서 제작했던 중국말로 번역된 도해와 중국적인 모티브와 양식이 가미된 엠블럼 북들을 통해 살펴본다. 그 중에서도 기울리오 알레니(Giulio Aleni)가 중국에서 제작한 『천주강생출상경해』(Tianzhu Jiangsheng Chuxiang Jingjie)는 유럽에서 제롬 나달(Gerome Nadal)이 만든 『그림으로 된 복음 이야기』(Evangelicae Historie Imagines)에 관한 그림에서 몇 점을 뽑아서 예수의 생애를 중국인들에게 소개한 책이다. 알레니는 유럽의 언어로 되어 있는 그림의 해설 부분을 중국어로 번역하였고, 그림도 완전하지는 않지만 중국적인 표현을 서양양식과 혼합하여 표현하였다. 이러한 이미지는 유교라는 현실주의적 세계관을 가진 중국인들에게 예수의 생애의 초자연적인 부분들을 보여줌으로써 당대 유교 사대부들로부터 글을 모르는 일반적인 중국인들에게 커다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예수회의 예술신학과 예술교육이 중국 예술선교의 방식과 상호작용한 사례에 대한 고찰은 예술선교나 사역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한국의 개신교와 한국의 중국선교 상황에 몇 가지 시사점을 제공해 준다. 먼저 개신교의 예술신학과 예술교육의 연구 기반을 좀 더 확고히 하는 가운데 예술 선교사역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이러한 예술 신학적이고 예술교육의 이론적인 측면이 신학교 커리큘럼에 좀 더 반영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처럼 예술신학과 예술선교가 서로 영향을 줌으로써 복음이 들어가는 다양한 문화 속에서 한층 더 방향성 있고 풍성한 방식으로 소통할 수 있게 될 것이다.
        7,700원
        3.
        2012.11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If you want to write a mission history, academic dilemmas hinder you to sustain objective perspectives due to your confessional orientation. We mission historians believe that God has a grand plan of salvation for humankind and we are witnessing His story in the history of mission. Secular historians, however, do not believe in this kind of confession orientation. Rather they despise this kind of approach as the lack of academic objectivity. We mission historian must find the third way for writing mission history which could be shared not only with our fellow Christian scholar but also secular historians who believe in the objectivity as the primal condition for writing history. This paper suggests the method of Jacob Burckhardt(18181897) who proposed a flexible approaches in historiography. He criticizes that history is neither logic nor philosophy which is logical framework is firm and decisive. History writing should, according to Burckhardt, flexible because the interpretation of history should be open. The present author shows that this kind of flexible historiography could be accommodated in a new way of mission historiography. To show an example the author interprets the early Jesuit Missionary Matteo Ricci from the flexible mission historiography: Push factor and Pull factor. The author claims that writing mission history in more flexible historiography could be achieved by comparing push factor of missionary sending and pull factor of missionary receiving. Early Jesuit mission history will be more flexible if we approach the Jesuit mission from politics(of missionary sending from 16thcentury Europe and missionary receiving from the late Ming China's political situation), culture, and religion.
        6,400원
        4.
        2011.0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선교 현지에 도착한 선교사들은 피선교지 주민을 향해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이들은 우리와 무엇이 다른가? 이들은 과연 하나님을 받아들일 만한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이러한 “타자”에 대한 초기의 질문을 제기한 사람들이 바로16세기부터 선교현장으로 파견되었던 예수회 선교사들이다. 이 논문은 이러한 초기 질문을 16세기 후반 페루에서 제기했던 호세 데 아코스타(1572-1586)와 17세기 초반 남 인도에서 제기했던 로베르토 데노빌리(1606-1656)의 저술을 통해, 이들 선교사들이 어떻게 최초로 종교적 타자를 이해하고 분류했는지를 분석하고 있다. 호세 데 아코스타는 1590년에 편찬한HISTORIA란 책을 통해 페루 지역의 원주민들이 콜럼버스 이전부터 유지해 오던 토착 종교를 면밀하게분석했다. 아코스타는 이 책에서 이중적인 접근방식을 취한다. 아코스타에 의하면 페루 원주민들은 후아카스(HUACAS)라는 끔찍한 우상 숭배의 죄악에 빠져있지만, 동시에 하나님을 알수있는 능력을 내재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이중적인 타자에 대한 이해는 그의 관찰의 프레임으로 작용하고 있는 스페인 시골 주민들의 미신에 가까운 가톨릭 신앙과연관이있다. 16세기 스페인 내부의 종교재판 기록과 아코스타의 페루 주민에 대한 비판을 비교해 보면 명백한 유사점이 발견된다. 깊은 종교성과 동시에 미신적인 의식을 선호했던 스페인 시골 주민들의 신앙에 대한 평가와 페루 주민의 종교성에 대한 평가가 흡사한 이유는, 아코스타가 페루 주민에 대한 해석에 사실상 스페인 시골 주민에 대한 이해를 투영시킨 결과이기 때문이다. 결국 아코스타에 있어서 타자에 대한 해석은 자기 정체성에 대한 내부적 이해와 결부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인도에서 활동하며 이른바 상류층 우선 접근 선교방식으로 큰 논쟁을 불러 일으켰던 로베르토 데노빌리의 경우에서도 같은 투영 현상이 나타난다. 데노빌리는 자신을 인도의 최상위 카스트인 브라민과 동일시하면서, 심지어 브라민의 신 이해를 자신의 신 이해와 일치시키는 신학적 대담성을 보이는 글을 발표했다. 이는 인도 사회에서 브라민 카스트가 차지하는 학문적, 사회적 위상을 자신이 포르투갈 출신의 선교사들과 차별되는 귀족 및 학자의 위상을 투영시킨 결과이다. 이 논문은 이러한 투영의 과정을 1613년 어간의 인도 선교 역사와 비교하면서 로베르토 데노빌리의 “타자”에 대한 이해를 분석한다. 결국 아코스타와 데노빌리와 같은 초기 선교사들은 종교적 타자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자기 정체성의 이해 정도를 투영시켜 타자를 규정하게 된다는 것을 선교 역사적 경험과 남겨진 초기 선교사 문헌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9,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