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1696년 안용복이 권력자의 밀명을 띠고 특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도일했다는 ‘안용복 밀사’설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것이다. ‘안용복 밀사’설은 남구만이 안용복을 밀사로 보냈다는 설(①)과 남구만과 윤지완이 공조하여 보냈다는 설(②)로 나뉜다. ①의 주요 논지는 조선 정부가 쓰시마번이 아닌 다른 노선을 통해 외교노선을 새로 개척하기 위해 안용복을 보내 돗토리번에 쓰시마번의 비리를 고발하게 했으나, 쓰시마번 의 방해로 결국 막부에 보고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안용복의 도일 목적이 무엇인지, 그가 어떤 형태로 쓰시마번의 비리를 고발했는지가 명확하지 않다. ②의 주요 논지는 당시 정파 간의 인식 차이가 커서 공식 사행을 파견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정쟁을 피하면서 외교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밀사를 파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정파 간 인식 차이가 무엇인지, 밀사 파견의 배경은 무엇인지, 파견을 계획한 시기는 언제 인지, 안용복이 칭한 관직이 밀사로서 적합한지, 안용복과 그 일행의 신분은 임무 수행에 적합한지, 국왕인 숙종은 어떻게 관련 있는지, 일본 측은 밀사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등에 관한 내용이 불분명하다. 조선은 밀사를 파견하지 않고도 직접 사신을 보내 쓰시마번의 행태를 막부에 알릴 수 있었다. 그런데 왜 굳이 자격이 의심스런 안용복을 보냈어야 하는지 그 당위성이 ‘안용복 밀사’설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안용복 밀사’설은 사료 인용에 있어서도 개인 문집이나 2차 문헌을 이용했고, 구절의 일부를 뽑아 무리하게 밀사설과 엮은 측면이 있다.
본고는 안용복 일행이 1696년에 도일(渡日)한 것의 성격을 재검토한 것이다. 개인 차원이 아니라 정부 당국자가 밀사를 파견한 것이라는 점이 골자다. 밀사 파견의 배후로 지목되는 인물은 남구만(南九萬)과 윤지완(尹趾完)이다. 이들은 1694년에 집권한 소론 (少論) 정권의 핵심 실세로서, 대일외교(對日外交)에서 남인(南人) 정권과는 달리 강경책을 폈다. 공식 사절을 파견하지 못한 것은 울릉도 문제에 대하여 각 정파 간의 인식차가 컸기 때문이다. 안용복 일행이 사신이었다는 점은 조선 측 공식 기록에서는 찾아보기 어렵 지만, 일본 측 사료의 경우 『죽도고(竹島考)』 등에서 밝힌 바 있다. 본고에서는 안용복 일행이 밀사였음을 다음과 같이 다각도로 고증하였다. ① 남⋅윤의 문집 등을 통해 그들이 밀사 파견을 주도하였음을 밝히고, ② 여수 흥국사(興國寺)에 소속된 5명의 의승수군 (義僧水軍: 수군 소속의 승려)이 도일에 동참한 것을 통해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과의 연결고리를 탐색하였다. ③ 안용복 도일 이후 숙종과 남구만⋅윤지완 등이 시종 비밀을 지키는 가운데 정쟁(政爭)을 막고 사건을 원만하게 처리했음을 고찰하였고, ④ 안용복 일행의 도일을 ‘밀사 파견’으로 파악한 문헌을 찾아 그 내용을 제시하였다. 조선의 역사서 에 안용복 사건이 개인의 일탈행위로 기록된 것은, 안용복 일행의 도일이 정부 당국자가 비밀리에 파견한 밀사였기 때문이다. 안용복의 제2차 도일은 ‘밀사 외교’라는 관점에서 이해하면 수많은 의문과 오해가 풀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