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당시 민족대표였던 한용운은 1920년대 국내 항일운동의 지도자로서 활약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 초 신간회의 해체와 일제 의 만주사변으로 인한 국내외의 정세 변화는 한용운이 대외활동을 접은 채 심우장에서 집필활동에 전념하게 되는 외적 영향으로 작용 했다. 이 시기에 한용운은 냉철한 시국인식과 민족적 자각을 바탕으 로 불교개혁을 주장하는 글들을 많이 발표하였다. 이때의 개혁론은 1910년대『조선불교유신론』에서 주장했던 일반적인 불교근대화론과 는 달리 식민지 불교의 모순을 극복하고 조선의 사찰을 통일해야 한 다는 자주성에 기반하고 있다. 그리고 그 요지는 크게‘총본산의 건 설’과‘불교의 대중화’로 정리할 수 있다. 총본산 건설은 분산된 조선 사찰의 통일과 통제기관의 설립을 뜻하 는 것으로, 사찰 주지의 임면권(任免權)을 확보해야 한다는 자주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따라서 그 전제조건은 조선불교의 모든 권리를 철 저히 장악하고 있던 일제의 사찰령을 철폐하는 것이었고, 그 이론으 로서 서구 근대화의 특징인 정교분리의 원칙이 제시되었다. 그리고 정교분리에 따라 사찰령을 철폐하고 총본산을 건설하는 주체로서 불 교청년의 역할이 강조되었다. 불교 대중화는 경전의 한글 번역과 인출, 그리고 불교 잡지의 발행 사업에 의한 문서포교의 실천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일찍이 한글의 중 요성을 자각하고 평소 한글로 된 교리의 전파를 강조했던 한용운은 1930년대 초반 안심사 한글 경판의 인출사업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불교계뿐만 아니라 사회 일반에 큰 관심을 끌기도 하였다. 한용운의 불교 대중화 사업은 그 스스로‘조선운동’이라는 표현을 쓴 적이 있 었던 것처럼 문화운동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불교의 대중 화 주장도 조선적 전통의 인식과 실천운동을 바탕으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한용운의 현실 인식과 대응은 일제의 통제에서 벗어나 한국 불교의 자주성을 회복하는 것에 있었고, 바로 이러한 점이 당시 불교 교단에서 그의 개혁론이 지니는 역사적 의의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