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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문예연구 KCI 등재 Studies on Buddhist art and 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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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호

제3집 (2014년 6월) 9

1.
2014.06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논문은 고려 수월관음도에 관한 기존의 연구들을 근저로 고려 중·후기 불교계의 특징, 수월관음에 관한 문헌적 전거, 거사불교(居 士佛敎)와 수월관음의 접점을 찾았다. 수월관음도가 고려 중·후기 라는 비교적 짧은 시기에 제작된 것에 비해 현대인들에게 미치는 파 급력은 엄청나다. 이 불화가 갖고 있는 대단한 영향력과 달리 그동안 고려 수월관음도 연구는 몇 가지 근원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명 칭의 전거에 관한 문제, 특정 지물에 관한 문제 등이 바로 그것이다. 본 논고에서 이들 중『불설고왕관세음경(佛說高王觀世音經)』의 전거 문제, 대나무의 등장시기에 대한 문제제기 등을 통해 수월관음도의 도상적 이해의 폭을 넓히고자 했다. 특히 수월관음도를 구성하는 개개의 요소들 중 대나무에 관한 도상 학적 해석이 미비한 현 상황에서 간단하게나마 대나무에 관한 새로 운 불교미학적 해석을 시도했다. 대나무는 선승과 거사들이 절개, 은 일, 청정의 의미로 즐겨 사용한 소재이다. 청정(淸淨)은『금강경』에서 분별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말하며 이는『반야심경』에서 말하는 공 (空)사상으로도 연결된다. 대나무는 어떻게 청정, 공(空)의 미학을 상 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수월관음도 속에서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 수월관음과 불교신앙에 관해 관음신앙을 중 심으로 진행된 기존의 연구에서 벗어나 선종과의 연결고리와 새로운 해석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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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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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회화사(韓國繪畵史)에서 가장 위대한 화가로 알려진 김홍도(金弘道, 1745~1806)는 여러 장르의 그림을 남겼는데 그가 성취한 업적은 그가 활동했 던 영조(英祖: 재위 1725~1776)와 정조(正祖: 재위 1777~1800) 년간의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을 바탕으로 꽃피울 수 있었다. 김홍도에 관한 연구는 당대 에 그와 함께 활동했던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을 필두로 현재까지 많은 연구자들에 의해 활발하게 추진되어 왔다. 그 결과 김홍도의 생애(生涯)와 작 품세계(作品世界)에 대한 이해는 상당히 진전되어 그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부 분까지 복원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연구를 바탕으로 최근에는 김홍도의 불교 인물화(佛敎人物畵)에 대한 논문이 발표되어 주목된다. 김홍도는 정조의 명으 로 용주사 불화(龍珠寺佛畵)를 제작한 1790년(46세) 이후 급격하게 불교에 심 취한 듯 여러 점의 훌륭한 감상용 불교회화를 남겼다. 김홍도가 그린 감상용 불교회화는 대략 30점 정도가 남아 있는데 그가 겪은 인생 말년의 불행을 종 교적으로 승화시켜 다른 어떤 작품보다도 깊은 여운과 감동을 전해 준다. 다양한 분야에서 발군의 기량을 발휘한 김홍도는 주옥같은 명작을 많이 남 겼다. 그 중에서도 특히 김홍도는 여러 점의 도석인물화를 제작했는데「군선 도」같은 신선도는 젊은 시기에 치우친 반면 불교회화는 인생의 후반기에 많 이 제작했다. 김홍도는 46세 때 용주사불화의 제작에 참여한 것이 인연이 되 어 진심으로 불교에 귀의하게 되었다. 김홍도가 인생의 황금기 때 제작한「남 해관음」이나「혜능상매」는 그의 예술적인 기량과 종교성이 합치돼 탄생한 수 작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작품에서 느껴지는 감동은 오히려 실의와 병고 속 에서 탄생한「염불서승」과「노승염송」이 훨씬 더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이것 은 작가에게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뿐만 아니라 어렵고 힘든 시련조차도 예술 가를 키울 수 있는 자양분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김홍도의 불교 회화는 종교인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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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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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의 목적은 추사의「세한도」에 나타난 예술세계를 불교적 사 유의 미학 관점에서 파악하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 시지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하는 데 있다. 「세한도」는 추사가 제주 도 유배지에서 외로움과 고독, 절망의 끝에서 창작된 그의 예술세계 의 절정을 보여주는 수묵화이다. 여기에는 이무 것도 그리지 않은 듯 한 그림 저편에 실로 형언할 없는 사건과 얼룩진 트라우마와 당대의 풍경이 존재하고 있다. 즉 제자 이상적의 변함없는 마음을 푸르름을 잃지 않는 송백(松柏)에 비유하여 그린「세한도」에는 사제지간의 석 교(石交)의 깊은 정이 담겨 있다. 「세한도」에 내재된 중요한 코드 중의 하나는 불교적 사유의 미학이 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추사와 이상적과의 깊은 우정을 담아낸 「세한도」는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텅 비어 고요하며 탈속과 성찰, 그 리고 비움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 불가의 선적 사유를 드러내 보인다. 이는 간결, 비움, 과감한 생략 등 선적 인식을 바탕으로 시·서·화 를 융합시켜 선과 각 예술의 이치가 다르지 않다는 점을 말해 준다. 간결하면서도 모든 것이 걸러지고 생략된 비움의 정신이 깃든「세한 도」는 구도에 가까운 염결성과 사제지간의 석교의 아름다움이 내재 되어 있다. 이처럼 추사가 문기의 경계를 넘어 선기가 충만한 선적 그림을 남긴 것은 그가 선의 세계에 깊이 침잠한 삶을 살았기에 가능 한 것이었다. 「세한도」의‘후조(後凋)’의 정신은 추사 한 사람만의 감 회가 아니라 조선의 모든 선비들의 정신이자 오늘날 우리가 본받아 야 할 정신이다.
7,000원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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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근대사는 급변하는 세계정세에 따라 조선왕조가 몰락되고 일본 침략기를 거쳐 대한민국의 건국과 미국 군정을 거쳤다. 올바른 민주주의로 가기 위한 여정에서 예술가인 작가로 살면서 제작한 작 품 속에는 작가가 감수한 시대상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시대 를 초월하여 자신만의 고유한 세계를 작품에 투영함으로써 시공간적 한계를 극복하며 본질적 가치를 추구한다면 작가 혼은 더욱 빛을 발 하게 된다. 종교의 교리가 내포된 작가와 작가의 작품을 연구, 분석한다는 것 은 쉽지가 않다. 그러나 그림에 표현된 작가의 의도는 그림으로, 작 가의 생애나 작가의 기록된 말로써 연구될 수 있다. 장욱진의 경우 부인이 현존해 있고 많은 제자들과 지인들이 있으며, 양질의 도록이 나 그의 말을 기록한 책과 함께 비교적 많은 자료들이 있다. 장욱진의 그림에 나타난 불교관련의 본격적인 연구는 석사학위 논 문 1~2편 정도와 장욱진에 관한 불교관련 평문이 몇 편 정도이다. 그 래서 장욱진의 불교미학에 관해서는 불교와 연관 있는 그림과 함께 이들 평문도 참고하였다. 본 연구가 한국 근대 화단에 이름을 올린 많은 화가들이 그린 그림에 나타난 불교미학 연구에 실낱 같은 도움 이나마 되어주기를 기대하면서 이 논문을 작성하였다. 2010년 장욱진미술문화재단이 주관하여 용인시 구성면 마북리 장 욱진가옥에서 개최된‘부처님 오신날’전시회에 유족의 부탁으로 ‘장욱진 화백의 먹그림에 나타난 선(禪)사상’이라는 글을 전시 안내 장에 넣었다. ‘장욱진의 그림에 나타난 불교적 미학의 세계’를 조명 하는 원고에 많은 부분이 인용되었음을 밝혀둔다.
8,700원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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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후반 불교계의 당면한 과제는‘자주권 확립’과‘민족해 방운동’이었다. 주류적 흐름이었던‘불교계의 자주권 확립’은 전통 불교 생존의 측면은 물론이거니와, 왜색불교에 맞선 우리불교 정체 성의 수호와 함께 불교의 대중화 및 활성화라는 측면, 더 나아가 사 찰령 등에 맞서서 우리나라의 전통 불지(佛旨)를 잇고자 하는 노력이 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불교계 인물과는 달리 만해는‘민족해방운동’ 에 보다 중점을 두었다. 만해는 꺼져가는 불법을 되살리고 그 대중화 및 활성화에 천착했지만, 보다 큰 안목으로 일제로부터의 조선 독립 에 더 큰 의미부여를 하였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자주권 확립’ 의 차원에서 한국불교의 주체적 발전 방향을 끊임없이 모색하였다. 초기의 저작인『조선불교유신론』에서 만해는 불교적 계몽주의자로 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만해는 이 글에서 불교사상에 기반을 두 지만 서구의 사회진화론을 수용하여 봉건적인 불교의 개혁을 주장한 다. 하지만 사상의 원숙기에 이르면서『십현담주해』를 완성하고『유 마경』을 번역한다. 요컨대 여기에서 볼 수 있는 만해 사상의 요체는 실천불교인‘대중불교’이다. 만해는 한편으로는 불교를 통해서 세상을 구하겠다는 강렬한 구세 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불교계의 출세간적인 면모에 대해서 강렬한 비판의식을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의 구 세의식은 깨달은 자의 우월의식이 아니라 저자거리에서의 동참의식 이다. 이런 의미에서 만해의 선은 대중들이 행할 수 있는 선이며, 그 가 표방하는 바의 보살행은 구원(救援)이나 시혜(施惠)이 아니라‘더 불어 삶’이다. 만해는 이러한 입장에 대한 구체적 실천을 위한 안을 제시하는데, 그것이「조선불교의 개혁안」이다. 그는 이 개혁론에서 초기의『조선불교유신론』을 계승하면서도 당시 변화된 불교계의 동 향에 유의하여 개혁의 당위성, 그리고 대상과 방법을 제시하였다. 만해를 근·현대 한국불교계를 대표할 수 있는 가장 뛰어난 선지식 중의 한 분이라고 하는 것은 그에 대한 적당한 표현이 아니다. 오히 려 그는 한국근대사의 중심에서 민족이 가야할 길을 묵묵히 걸어간 지사였다. 만해가 민족운동가, 독립운동가, 선사, 선생 등의 여러 가 지 명칭으로 회자되는 이유는, 그가 항일민족운동에 매진하였을 뿐 아니라 하나의 명사로는 그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문학, 사상, 불교, 지성 등 각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행적을 우리에게 남겼 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만해의 개혁은 불교 개혁을 포함하여 철저하게 대중보 다 한 발 앞서 갔다는 점에서 아주 특별하다. 그뿐만 아니라 수많은 저작과 실천을 통하여 봉건불교의 개혁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 식민 지 상태를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투쟁의 행적을 우리에게 남겨 놓았 다는 점에서도 만해는 우리에게 아주 의미심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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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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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당시 민족대표였던 한용운은 1920년대 국내 항일운동의 지도자로서 활약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 초 신간회의 해체와 일제 의 만주사변으로 인한 국내외의 정세 변화는 한용운이 대외활동을 접은 채 심우장에서 집필활동에 전념하게 되는 외적 영향으로 작용 했다. 이 시기에 한용운은 냉철한 시국인식과 민족적 자각을 바탕으 로 불교개혁을 주장하는 글들을 많이 발표하였다. 이때의 개혁론은 1910년대『조선불교유신론』에서 주장했던 일반적인 불교근대화론과 는 달리 식민지 불교의 모순을 극복하고 조선의 사찰을 통일해야 한 다는 자주성에 기반하고 있다. 그리고 그 요지는 크게‘총본산의 건 설’과‘불교의 대중화’로 정리할 수 있다. 총본산 건설은 분산된 조선 사찰의 통일과 통제기관의 설립을 뜻하 는 것으로, 사찰 주지의 임면권(任免權)을 확보해야 한다는 자주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따라서 그 전제조건은 조선불교의 모든 권리를 철 저히 장악하고 있던 일제의 사찰령을 철폐하는 것이었고, 그 이론으 로서 서구 근대화의 특징인 정교분리의 원칙이 제시되었다. 그리고 정교분리에 따라 사찰령을 철폐하고 총본산을 건설하는 주체로서 불 교청년의 역할이 강조되었다. 불교 대중화는 경전의 한글 번역과 인출, 그리고 불교 잡지의 발행 사업에 의한 문서포교의 실천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일찍이 한글의 중 요성을 자각하고 평소 한글로 된 교리의 전파를 강조했던 한용운은 1930년대 초반 안심사 한글 경판의 인출사업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불교계뿐만 아니라 사회 일반에 큰 관심을 끌기도 하였다. 한용운의 불교 대중화 사업은 그 스스로‘조선운동’이라는 표현을 쓴 적이 있 었던 것처럼 문화운동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불교의 대중 화 주장도 조선적 전통의 인식과 실천운동을 바탕으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한용운의 현실 인식과 대응은 일제의 통제에서 벗어나 한국 불교의 자주성을 회복하는 것에 있었고, 바로 이러한 점이 당시 불교 교단에서 그의 개혁론이 지니는 역사적 의의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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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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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서울이라는 특정한 공간과의 상관관계와 교우관계를 중심으로 한용운의 사회활동과 삶의 의미를 고찰했다. 정치적·사회적 지향이 강했던 한용운에게 서울은 사회적 실천의 무대이자 핵심적 공간이었다. 한용운의 서 울에서의 활동은 심우장 시기를 전후로 두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북촌시 대 한용운은『유심』이나『불교』발간을 통해 여러 방면의 저명인사와 교류하 면서 3·1운동 참여, 불교청년운동, 신간회 참여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이 기간 동안 한용운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사회활동에 매진했고, 그 결과 몸 과 마음이 극도로 쇠약해졌다. 1933년 한용운은 결혼을 계기로 성북동 심우장이라는 곳에 난생 처음으로 자신의 명의로 삶의 공간을 소유하게 되었다. 심우장에 거처를 마련하면서 한용운은 처음으로 주거공간과 사회활동(업무) 공간을 분리시킬 수 있었다. 불교도로서 초심을 잃지 않고 끊임없이 참된 구도를 통해 사회적 실천을 이 어가겠다는 의지의 표명이 심우장 이사의 중요한 동기였다. 성북동 심우장은 한용운의 주활동 무대였던 북촌지역과 도보로 왕래가 가능할 정도로 서울 도 심과 가까우면서도 참선 수행이 가능한 조용하고 인적이 드문 곳이라서 한용 운은 지론인 생활선의 실천공간으로 안성마춤이었다. 심우장시대는 한용운의 자유로운 영혼을 더 이상 허락하지 않았다. 일제의 협박과 회유로 많은 민족지도자들이 변절하고 전향했으나 한용운은 일제의 어떠한 유혹이나 협박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지조를 지켰다. 한용운은 변절자들과 공개적으로 절교를 선언하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한 김동삼의 유해를 모셔와 장례를 지내는 등 소극적인 저항을 계속했다. 그런가 하면 일 제의 온갖 회유와 협박에도 민족의 지조를 지킨 소수의 지사들과 마음을 열 어놓고 교류하면서 엄혹한 시기 민족의 앞길에 희망을 던져주었다. 그런 의 미에서 심우장은‘전시총동원체제기’라고 불리는 일제의 마지막 수탈과 발 악의 시기에 민족지조의 상징적 공간으로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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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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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역자들은 당대의 대번역가인 현장(602-664) 의 보살계갈마문과 정매(생몰연대 미상)의 보살계갈마(문)서를 최초로 영역하였다. 비록 현장이 장안의 대자은사에서 649년 본 갈마문을 원전에서 직접 한역 하였다고 하지만, 본인이 한역한 유가사지론을 요약 정리하여 본 갈 마문과 더불어 계본을 본인이 직접 작성하였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현 장은 629년(또는 627년)에서 645년까지 중앙아시아와 인도로 구법 행각을 한 후, 유식 관련 텍스트들을 중심으로 다양한 불교경전들을 한역하였다. 동아시아 불교도들은 두 종류의 보살계본을 받아들이고 있다. 하나는 중국 위작인 범망경의 보살계본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인 도불교에서 유래한 유식 보살계본이다. 유식 보살계본으로는 담무참 (385-433)의 계본과 현장의 계본이 널리 알려져 있다. 담무참은 동일 한 텍스트에 보살계 갈마문과 목록을 모두 포함하고 있지만, 현장은 보살계 갈마문과 보살계 목록을 각각 다른 텍스트에 포함하고 있다. 비록 범망경의 영역은 몇 가지 존재하지만, 현장의 보살계 갈마문 과 보살계 목록의 영역은 전무하다. 담무참과 현장의 유식 보살계본 은 모두 유가사지론 본지분 보살지 제15 계품에 근거하고 있고, 담무 참의 계본은 몇 차례 영역되었지만 현장의 계본은 한 번도 영역되지 않았다. 현장의 갈마문은 동일한 텍스트의 전반부에 나오고 계본은 동일한 텍스트의 후반부에 나올 개연성이 많다. 그렇지만 언제, 그리 고 왜 갈마문과 계본이 분리되어 각각 다른 텍스트로 대정장에 수록 되었는지 추가적인 학문적 검토가 필요하다. 그리고 서문이 갈마문 이전에 수록되는 것이 논리적으로 타당하지만, 대정장에는 서문이 갈마문 뒤에 수록되어 있다. 그런 맥락에서 본 역자들은 갈마문과 서 문의 순서를 바꿔 영역하였다. 대정장에서 서문이 갈마문 뒤에 언제, 그리고 왜 수록되었는지 추가적인 학문적 연구가 역시 필요하다.
6,300원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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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의 목적은 함허선사(1376~1433)의 사상을 살펴봄과 동시 에 수행과 깨달음에서 오는‘비움과 충만’의 시적 미학을 모색하는 데 있다. 함허는『현정론』을 통해 유자들의 불교비판의 부당성을 주 장하고‘유불융합’의 회통과 조화로운 관계 모색을 통해 불교의 정체 성을 지켜내려 했다. 그의 이러한 사유와 실천은 앞서간 선사들을 통 한 자기 확인, 점수(漸修)의 과정을 담은 관조의 시, 산사에서 느끼는 한가함과 탈속무애한 정서가 내재된 시편들을 통해 잘 드러난다. 함허의 이러한 시적 세계는 직관을 통한 교화사상과 자연과 조화를 이룬 시심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자연과 조화를 이룬 무 심의 세계는 그의 선적 직관과 시적 상상력이 조화를 이루어 빚어낸 물아일여의 깨달음의 세계이다. 여기에는 내려놓기와 걸림이 없고 무심한 삶의 관조의 세계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함허의 수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 역시‘선다일여(禪茶一如)’의 수행이다. 그래서 함허는 깨달음을 얻어가는 수행 과정에서 차로 마 음을 맑히고 진여를 찾는다. 한 잔의 차를 마심으로써 집중과 통찰을 높이고 마음을 비우고 자신을 관조하며 깨달음에 이르렀던 것이다. 일체의 집착을 놓아버리고 무심의 상태에서 사물을 관조하는 무심합 도에서 배태된 함허의 맑고 투명한 언어의 시편들은 내려놓기와 비 움의 지혜를 준다. 또한 그의 이러한 시편들은 텅 빈 충만의 세계를 보듬게 함으로써 번다함과 집착으로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지친 심신 을 치유하는 한 줄기 바람으로 작용할 수 있는 메시지를 전해준다.
7,8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