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천태가 제정한 참법 중의 하나인 『법화삼매참의』의 구성과 내용, 그리고 문화사적인 의의가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이해를 위해 이 책의 구성과 내용을 살펴보고, 문화사적 의의에 대해서는 역사와 수행으로 구분해 살펴보고 있다. 천태는 다양한 참법을 제정했지만 그것을 수행론과 결부해서 체계화시키고 있다. 일상의 의례와 수행을 별개의 것으로 간주하지 않고, 수행과 의례가 언제나 병용되어야 한다는 점을 의식한 것으로 분석된다. 천태의 참법은 단순한 계율에 머물러 있었던 참회를 의례 속에 수용하여 수행의 차원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점이다. 이런 점은 참회가 세속화되는 것을 방지하면서도 의례를 통해 종교적 감흥과 체험을 지향하고자 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천태의 수행법은 당대에 그치지 않고, 중국 의례문화의 역사에 일대 전환기를 만들게 된다. 이전의 단순한 참회, 내지 계율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던 참회를 의례 속에 포용하여 일상의례로 전환시켰기 때문이다. 이러한 작업의 결과는 당송대를 거쳐 발전하는 동북아시아 의례의 전개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특히 한국과 일본 등의 의례 문화가 발전하고 정착하는데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법화삼매참의』는 천태의 定慧幷修나 理事無礙의 사상적 토대 위에 제정된 것으로 분석할 수 있으며, 다양한 대중을 포용하기 위해 事懺과 理懺의 원리를 동시에 운용하고 있다.
영산재의 구조와 설행 및 사상과 인식을 알아보기 위해 영산재를 성립 기와 변용기로 분류하여 논의를 전개하였다. 첫째, ‘영산재’ 성립기의 의문에는, 순수한 법석 의문인 「작법절차」(14 96)와 제반문의 <공양문>과 <영산작법>의 두 종류로 나눠진다. 전자는 도량엄정 이후 5종의 거불이 등장하며 이후 당해 경전을 염송하고 축원 을 하며, 후자는 17세기 중엽부터 등장하는 <영산작법>으로 법석 가운데 법화법석의 거불만이 남아 있고, 명칭도 작법절차에서 <영산작법>으로 칭해지고 있다. 둘째, 변용기의 영산재는, 『작법귀감』(1826)에서 볼 수 있듯이 법석보다 공양의식에 초점이 주어져 있는데, <영산작법>에 시왕각배가 더해진 의식에 ‘영산재’라는 명칭이 부여되고 있다. 의문대로 영산재가 설행되지 못하고 있는데, 그것은 국가무형문화재로서의 성격상 문화적인 요소 위주로 설행되어지게 되면서 일어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영산재에는 중유사상, 공덕사상, 윤회 전생사상, 조선숭배사상, 법화경 경중왕사상 등 법화경 사상이 지배하고 있다. 도량이나 시련에 대 한 이해가 다르고, 영산재가 법석의 경전염송이 중심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경우도 잘 찾아지지 않으며, 영산재가 사십구재 의식이라는 사실조차 역사 속에서나 증언되고 있다고 보인다.
동물은 물론 살아있는 사람까지 제물로 바쳤던 고대의 종교음악은 세속적 쾌락이나 원시적 본능과 종교음악의 영역이 구분되지 않았다. 고등 종교가 발현되면서 계율과 윤리관이 형성되듯이 음악에도 정신적 ․ 감성적 규제가 이루어졌다. 신(神)이라는 막연한 대상을 찬양하던 고대 종교와 달리 그 종교를 창시한 성현의 말씀을 암송하는 율조가 고등종교음악의 시초가 되었다. 성현의 말씀에 의한 율조는 이전의 종교와는 비할 수 없는 강한 결속력으로 사회적 기반을 형성하였고 말씀이 지닌 음악적 성격은 공동체를 하나로 응집시키는 윤활유가 되었다. 기독교 신학자들의 음악 철학에 의한 그레고리오성가와 중국 성현들의 사상이 반영된 문묘제례악과 범패가 한국에 유입되었다. 이들 음악은 각기 선율적 양상은 달랐지만 이전의 원시 종교와 달리 절제되고 승화된 음악을 추구한 점에서 일치하였다. 그러나 조선조 억불숭유 시기를 지나며 유교음악의 법도는 유지되었지만 범패는 본래의 법도를 유지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오늘날 한국의 범패는 중국 전통에 의한 어단성장(語短 聲長)의 선율에 티베트와 일본의 밀교적 성격과 한국적 토착화로 인한 민속적 성격이 혼재되어 있다. 일부 승려들에 의해 전승된 범패는 개인의 예술적 기량이 더하여져 고도의 예술적 경지에 이르렀다. 이는 음악적ㆍ 민속적ㆍ문화적 관점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범패의 종교적 목적에서 는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대만의 성운대사는 “범패는 본래 대중들에게 들려주는 것이지 불타가 듣는 것이 아니다. 만약 대중이 알아듣지 못하면 어떻게 법음선류(法音宣 流)라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알아 듣지 못하는 한문 의례에 시대적 감성과 먼데다 고도로 예술화된 오늘날 한국 범패에 대하여 생각하 게 하는 대목이다. “범패란 무엇인가?”에 대한 궁극적 질문으로부터 범패 본연의 역할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법화경』을 중심으로 한 신앙은 조선시대에도 그 명맥을 계승하였다. 조선시대는 출가가 제한되고 사원경제가 크게 위축되는 상황이었지만, 왕실과 지배층의 추모 의례에서는 『법화경』독송과 같은 신앙 행위는 빼놓을 수 없었다. 국가이념으로 표방했던 성리학은 현세 중심의 사상이어서 망자를 위로하고 산 자의 공덕을 비는 내세주의에는 불교를 능가할 수 없었다. 불교를 이단으로 규정하여 그 사상과 신앙을 초토화시키고자 했지만, 성리학의 허약성만을 드러낼 뿐이었다. 법화신앙은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는 그 종교적 기능이 더욱 강화 되었다. 근본적으로 청허 휴정을 비롯한 그 제자들이 주도했던 승가의 수행과 교육체계가 새롭게 확립되면서 그 가치가 부활하였다. 그러나 왜란과 호란의 과정에서 발생한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다양한 고통을 위로하는 재의(齋儀)는 법화신앙이 실제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법화경』 연찬은 조선후기 불교계의 교학 계보를 형성할 정도로 가치있었고, 선 수행에도 중요한 지남이었다. 『법화경』은 뿐만 아니라 당대 불 교계에서 망자 추선(追善)과 사찰의 낙성식(落成式)을 비롯한 다양한 의식에서 영산회상이었고 극락이었다.
고대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재원은 조세로 거둔 곡물이며 이를 보관하기 위한 창고는 주로 산성 등에서 확인되고 있다. 당시 금석문과 산성에서 출토된 목간 내용으로 볼 때, 사찰 안에 창고가 존재했고, 산성 내 창고에는 보리와 같은 곡물을 60섬(石) 단위로 일정하게 관리했음을 알 수 있다. 이번에 경주 성건동 500-18번지 유적에서 조사된 다 수의 대호를 매납한 대형 건물지는 삼랑사 안에 마련된 창고로 장류와 같은 액상식품과 쌀 등을 보관하던 창고로 추정된다. 성건동 창고유적에서 확인된 대형 창고는 <매호식 건물>로 구분되며 건물 안에 대호를 안전하게 관리하기 위해서 일정한 높이로 흙을 성토한 부분이 존재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이 성토부에서는 대호를 절반 정도 묻어둔 모습과 파손된 대호를 수시로 교체한 모습이 확인되며, 대호 위에 토제 뚜껑을 사용한 점은 저장물에 대한 보관관리가 상시적으로 이루어 졌음을 알려준다. 창고 유적에서 출토된 국자는 청동제와 목제 또는 조개껍질로 만들어 사용했는데, 보관중인 저장품이 변질되지 않도록 관리하기 위해서 필요에 따라서 다른 재질의 국자를 사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대호 안에서 출토된 숯으로 보아 삼국시대부터 장류를 담글 때 백탄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는 당시 식생활 모습을 살펴보는데 있어서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당시 창고유적과 비교한 결과 경주 성건동 500-18번지 유적의 창고건 물은 삼랑사와 관련된 저장시설로 생각되며, 당시 황룡사, 실상사 등 당대 사찰 내 위치한 창고 모습을 알려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리고 이러한 창고가 운영되기 위해서는 국가나 관청의 관리가 존재했음을 알려주므로, 향후 조사가 확대된다면 창고의 구조에 따른 차이가 확인될 것으로 판단된다.
본 연구는 불교수행자를 대상으로 불교상담에 대한 인식을 심층적으로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를 위한 연구문제는 첫째, 불교상담의 필요성은 무엇인가?, 둘째, 불교상담의 구성요소는 무엇인가?, 셋째, 불교상담자의 자질은 무엇인가?, 넷째, 불교상담자가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할 조건은 무엇인가?이다. 연구대상은 경기도 K시 소재 대학에서 불교상 담을 수강하는 학인스님 28명이며, 2019년 3월부터 5월까지 서면으로 된 질문지를 사용하여 이메일로 데이터를 수집하였다. 수집된 결과는 수정된 합의적 질적연구방법(CQR-M; Consensual Qualitative Research-Modi fied)으로 분석하였다. 연구결과, 불교상담의 필요성, 불교상담의 구성요 소, 불교상담자의 자질, 불교상담자가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할 조건 등 4 개 영역에서 5개 범주와 25개의 하위범주가 도출되었다. 첫째, 불교상담의 필요성 영역에서는 불교상담의 필요성 1개 범주에서 ‘부처님 법으로 내담자의 문제해결, 부처님 법에 다다를 수 있도록 도움, 포교를 위해, 또 다른 수행이 될 수 있으므로, 신도들의 상담을 위해’의 하위범주가 도 출되었다. 둘째, 불교상담의 구성요소 영역에서는 불교상담의 목표 범주에서 ‘해탈과 열반, 탈집착’의 하위범주가 도출되었으며, 불교상담의 자 세·태도·관점 범주에서 ‘자타불이, 무아적 관점, 자비심’의 하위범주가 도출되었다. 셋째, 불교상담자의 자질 영역에서는 전문가적 자질 범주에서 ‘상담이론 및 기술, 불교 공부, 분석능력’의 하위범주가 도출되었으며, 인간적인 자질 범주에서 ‘자비심, 존중, 공감능력, 경청, 자기이해’의 하위 범주가 도출되었다. 넷째, 불교상담자가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할 조건 영역에서는 ‘전문가적 자질에서 상담이론 및 실제에 대한 이해, 불교교리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 수행이 기본’의 하위범주가 도출되었으며, 인간적 자질 범주에서는 ‘수용·존중, 공감능력, 자비심, 자기이해’의 하위범주가 도출되었다. 이상의 결과에 대해서 논의하였으며, 본 연구의 결과는 불교 상담자의 상담을 위한 기초자료 제공에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본 연구는 기존 학자들의 문헌적 연구 성과를 토대로 인도 전통의 차크라 개념을 정의하고 오늘 날 가장 일반적으로 알려진 6, 내지는 6+1의 차크라 체계가 어떻게 성립되었는지를 고찰한다. 차크라는 아직 정확히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만달라, 얀트라와 같이 신들이나 신을 상징하는 만트라들의 원이나 기하학적인 문양을 말하는 것 이다. 그 중 만달라는 보다 큰 규모의 것을 말하고 얀트라나 차크라는 그 속의 일부분인 것이다. 특히 얀트라는 일종의 부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내구성 있는 것에 만들어진 것이고, 차크라는 특히 원 모양의 신들의 결합을 주로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만달라를 제사 의례에 사용되는 원 모양의 큰 대(臺)라고 하면 차크라는 그 일부의 요소를 구성하는 것이 다. 그런데 이런 외부적 의례 형태가 신체로 내면화 되었을 때 만달라는 신체이고, 하타요가적 신체의 중심으로서의 차크라는 신체 만달라의 중요 요소를 구성하는 급소라고 할 수 있다. 인도 전통의 하타요가적 신체의 차크라는 원래 초기 탄트라의 외적 의 례가 신체로 내면화 되면서 관상을 위한 하나의 장치로서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 내면화 과정은 탄트라에 속한 각 신앙의 교설들에 따른 관념 적이고 상징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탄트라에 속한 각 교설의 차이에 따라 다양한 차크라 체계가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6, 혹은 6+1 체계가 인도 에서 보편적으로 퍼졌고, 이 체계가 19세기 말에 서구에 전해졌다. 오늘 날 서구의 차크라 체계는 인도 전통의 6, 혹은 6+1 체계에 서구의 오컬 티즘이 결합되어 인도 전통의 차크라 체계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가지 게 되었고, 이 체계 외에도 다양한 차크라 체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6, 혹은 6+1 차크라 체계만이 유일한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
진화생물학적 ‘유전자 결정론’은 인간의 존재에 대한 회의를 표하고 있다. 이와 유사하게 불교에도 무아사상(無我思想)을 말하며 존재에 대한 부정을 말하고 있는데, 이러한 두 이론의 사고(思考)는 회의주의 또는 허무주의적 사고로 빠질 수 있는 이론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러한 회의주의적 시선을 잠재우기 위해 불교에선 불성(佛性)을, 그리 고 진화생물학을 대두시킨 도킨스는 밈(Meme)을 내세운다. 불교에서 말 하는 불성의 상징은 무명(無明)을 벗은 ‘깨달은 자’이다. 이러한 각자(覺 者)는 세상 만물이 항상 함이 없고[無常] 서로 연기(緣起)되어 있음을 알 아 아상(我相)에 대한 분별심이 없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아상을 부정하 고 진아를 깨달음으로써 이고득라(離苦得樂)을 삶의 방향성을 제시한다. 도킨스가 주장하는 ‘밈(Meme)’, 즉 문화적 유전이 우리를 진보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도킨스의 진화생물학의 환원주의적 시선은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인다. 일단 진화생물학은 시종일관 인간을 다른 자연 만물과 동일한 위치에서 해석하다 다소 급하게 ‘밈’이라는 개념을 도입하 면서 인간의 주체와 자율성을 회복하고자 하고 있는데, 이는 사실 역설에 가깝다. 이러한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결국 진화생물학적으로 본질적 인간 존재는 DNA의 운반체이고, 우리의 모든 욕구와 의지가 DNA의 맹목적 생존과 결부되어 있다면 인간의 주체성과 자율성은 확보될 수 없는 것으 로 보이며, 이에 회의주의 또는 허무주의의 대안으로는 한계가 있는 이론 이라 하겠다. 위와 같은 비교연구는, 불교의 입장에선 다소 초월적으로 여겨졌던 무아사 상을 진화생물학적 근거를 빌려 방편적으로 설명 가능하다는 점, 그리고 진화 생물학적으로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이론적 함정, 즉 주체성과 자율성의 확보문제를 불교적 교리가 그 대안이 된다는 점에서 불교와 진화생물학의 상호보완적 관계에 대한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풀은 인류의 역사 이전에서부터 존재하였던 생명체였다. 인간의 역사보다도 풀의 역사가 훨씬 오래되었다. 풀은 먹을 수 있는 식용의 채소와 인위적이 아닌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나는 잡초로 크게 나누어진다. 사찰음 식을 위한 재료를 준비하는 단계에서 풀은 식용의 채소이든지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나는 잡초이든지 사찰음식의 제작과 완성의 과정, 시작과 끝 지점에 위치해 있는 중요한 반야행의 대상이다. 풀에 대한 불교와 선학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시각은 역사적으로 시간대별로 변화해 왔다. 불교학이 발생한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불교학적으로 풀을 논의하고 철학적으로 풀에 대한 논의를 한다는 것은 과거의 역사 속에서 불타의 생존 시에 수행자와 불타가 바라본 풀에 대한 시각과 관점을 재해석하는 것이며, 또한 당조 시대를 중심으로 한 선종의 조사들이 풀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점에 대해 논의하는 것을 궁극적으로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글 에서 불교의 역사 속에서 풀에 대한 시각적인 변화의 과정을 철학적으로 접근하여 학문적으로 해석하며 평가하여 그 의의를 논의하고자 한다. 이 연구가 지니는 의미는 사찰음식의 본질적인 의미에 대한 자연회귀와 선의 시각의 철학적인 해석과 맞물려있는 것이다. 그 원인은 풀에 대한 시 각의 변화를 초래한 궁극적인 불교음식문화가 사찰음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풀은 지구상에서 어느 곳에서나 존재하는 가장 흔하게 볼 수 있으 면서 값진 지구의 가장 큰 환경의 재산이기 때문이다. 이 환경의 재산에 대한 시각의 차이점을 철학적으로 논의한 연구는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 글에서 풀에 대한 철학적인 논의로 접근하여 제시하여 보고자 하는 것이다. 풀은 인류와 지구의 환경의 파수꾼임을 인식하는 것은 인간 의 환경에 대한 이해와 풀에 대한 철학적인 가치를 음미하는 중요한 논의인 것이다.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1879~1944)은 승려이자 독립운동가였으며 문학가로 치열한 인생을 보냈다. 그의 이러한 삶은 각종 언론보도를 통해 다양하게 드러나고 해석됐다. 대중은 언론을 통해 만해의 이미지를 받아 들였다. TV, 신문, 잡지, 라디오, 영화, 인터넷 등 미디어는 정보를 전송 한다. 근대화 초기에는 신문과 잡지가 주류를 이뤘다. 정보 전달은 물론 시대의 정신과 대중의 인식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도구이다. 이런 점 에서 언론에 등장한 한용운의 기사를 연구하여 분석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한용운은 독립운동에 참여해 민족의 고통을 극복하려고 했고, 승려로서 한국불교의 혁신을 꿈꾸었다. 깨달음을 구하는 승려의 본분도 발견할 수 있다. 한용운의 또 다른 삶은 문학인(文學人)이었다. 시대를 넘어 꾸준히 사랑받는 작품을 발표하면서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식민통치가 막을 내린 뒤에는 한용운의 이미지는 보다 구체화되고 확장되었다. 면모가 더욱 세밀하게 드러나고 매체를 통해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특히 일제의 박해와 기만에도 뜻을 굽히지 않고 끝까지 지조와 절개를 지켰다는 이미지가 대중에게 각인됐다. 불의와 비굴을 용납하지 않는 학덕이 높은 선승이며 타협이 없는 독립지사였다. 미디어에 나타난 한용운의 이미지를 보다 광범위하게 살피는 것은 앞으로의 연구화제이다.
서울 옥수동 미타사의 주불전인 극락전에는 조성 연도와 양식이 서로 다른 아미타불상·관세음보살상·대세지보살상으로 구성된 아미타삼존불좌 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 글은 아미타삼존불좌상의 복장 유물과 불상의 특징을 분석한 것으로, 필자가 2020년 8월에 실시한 복장 조사를 통해 수습한 자료를 중심으로 작성한 것이다. 아미타삼존불좌상 가운데 목조아미타불상의 복장에서는 조성발원문 (1707년) 1점과 중수발원문 2점(1744년·1917년)이 발견되었다. 건칠관세 음보살상의 복장에서는 조성발원문(1769) 1점이 수습되었다. 복장 기록을 분석한 결과 목조아미타불상은 1707년에 조성되어 1744년·1768년·1917 년 등 세 차례에 걸쳐 개금·중수되었고, 건칠관세음보살상은 1769년에 조성되어 1917년과 1970년에 개금·중수되었으며, 목조대세지보살상은 1744년과 1917년에 개금·중수된 사실이 확인되었다. 미타사 아미타삼존상에서 발견된 복장 기록은 조선 후기 왕실 발원 불상의 조성 및 개금·중수 과정을 이해하는데도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필 자가 주목한 미타사 아미타삼존상의 후령통 내부 물목에 관한 연구는 조선시대 불복장 의식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조상경(造像經)』의 내용을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된다. 미타사 목조대세지보살상의 16세기 후령통, 목조아미타불상의 1707년 후령통, 건칠관세음보살상의 1769년과 1970년 후령통은 불복장 납입법의 변천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서의 가치가 있다.
저자 미상의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은 중국에서 찬술된 위경(僞經)으로 알려져 있으며, 돈황본과 중국, 한국, 일본에 수많 은 이본(異本)들이 존재한다. 이 경이 처음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은 통일 신라 때로 추정되며 고려와 조선시대에 활발히 유통되었다. 수많은 이본 중 정조대에 용주사에서 간행된 판본이 가장 완성도가 높으며 언문으로 주석이 되어 있어 불교의 효사상과 불교 전파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 경전은 부모에 대한 효(孝)를 강조함으로써 유가(儒家)로부터 불교는 사회윤리와 도덕을 무너뜨리는 종교라는 비난에 대처하고 사대부와 서민들로부터 많은 호응을 얻었던 경전이다. 이 경에 나타난 효사상은 연기(緣起)와 윤회(輪廻) 및 인과응보(因果應 報)를 바탕으로 한다. 부모의 한없는 자애(自愛)와 자식의 자발적 보은(報 恩)을 강조하며 부모 자식 간의 호혜적 평등과 보은의 무한성을 특징으로 하는 불교의 효사상은 유교의 남성 중심적이고 수직적이며 당위성을 강조하는 효사상과 대비된다. 불교에서는 불교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 곧 효행으로 이를 통해 부 모를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진정한 효이다. 불교의 효는 현생의 부모뿐만 아니라 과거·현재·미래의 삼세(三世)의 모든 부모와 널리 일체중생을 제도하는 대효로써 한층 승화된 효의 차원을 제시하고 있다.
이 글은 근현대의 유・불 효의례 가운데 제사·재의 간소화와 대중화 방안을 살펴보고 효의례 문화를 개선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유교의 제사는 문중의 예법과 가문의 법도를 중요시하며, 불교의 재는 정형화한 법공과 재공으로 이루어져 간단하게 축소・통합하기 어렵다. 게다가 제사의 비용도 그 정성과 무관하지 않아서 제사·재의 합리적 절차나 간소화에 방안은 선뜻 제안하기 어렵다. 따라서 제사·재는 본래 정성스러운 마음가짐이 중요하다는 인식의 개선을 위해 온라인 등의 근접매체를 활용하여 바르게 알리는 방법이 있을 수 있겠다. 유・불 효의례의 대중화에 관한 두드러진 문제는 대중이 함께 공감하며 동참하는 제사·재 문화의 부재이다. 유교의 제사는 한자사용의 보수적 성향으로 제사의 의미를 전달해 주 지 못한다. 불교의 재도 집전자가 어려운 한문의 일방적인 법식을 베풀며, 그 시간도 오래 소요되어 개선책을 요구한다. 그 가운데 유・불 제 사·재에 관한 불평등과 불균형은 더 심각한데, 유교는 제사준비의 여성 부담감으로 부부간의 갈등과 이혼율이 매년 증가하고 있다. 획기적인 변화가 어렵다면 여성들의 어려움을 함께 나누거나 따뜻한 말 한마디가 갈 등을 예방할 수 있다. 불교의 재도 대부분은 ‘청하는 의식’으로서 대중이 이해할 때까지만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함께 공감하며 동참하도록 그 구조를 과감히 개선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