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마음챙김 명상이 심리치료에 어떻게 도입되었고, 어떻게 심리치료와 상담에 접목되어 왔는지 그리고 명상을 심리치료와 상담에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수행하였다. 이를 위해 심리학 문헌과 심리학 관련 주요저널 사이트(KISS, PsycARTICLES)를 이용하여, ‘심리치료, 상담, 마음챙김, 명상’에 관한 연구들을 검색하였다. 자료는 종교적인 관점의 연구를 제외하고, 정신건강 관련 연구들을 선택하였다. 연구결과, 첫째, 마음챙김 명상은 임상장면에서 스트레스 관리 기법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나타났다. 둘째 마음챙김, 마음챙김 명상 그리고 자기자비, 자비명상이 정신·신체건강에 유익한 효과가 나타난다고 보고됨에 따라, 이에 대한 최신의 연구들을 제시하였다. 셋째 마음챙김 기반 심리치료가 일반인 집단뿐만 아니라 우울장애, 불안 장애와 같은 임상집단에서도 치료효과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선행 연구들을 검토한 결과, 심리치료와 마음챙김 명상은 각각 정신건강영역과 종교적인 영역에서 출발하여 목적점이 다르지만, 모두 고통을 이해 하고 해결하는 방법을 제시하며 심리적 안녕감을 지향하는데 접점이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를 토대로 심리치료 및 상담에서 명상 활용의 방안과 제한점을 제시하고, 미래 연구방향성에 대해 논의하였다.
본 연구에서는 최근 심리학계에서 진행되고 있는 불교의 애착여읨(이욕; virāga; non-attachment)과 심리학의 애착이론과의 통합적 연구에 대하여 고찰해 보았다. 이로써 애착이론과 이욕에 대한 통합적 연구가 어떻게 발전되고 있는지 볼 수 있었고, 또한 이욕에 대한 불교학자들의 다각적인 해석을 살펴봄으로써 표면적으로 보기에 연관성이 약한 불교의 이욕과 애착에 관한 개념과 심리학적 애착이론이 긍정적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하였다. 불교에서는 대상에 대한 애착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욕; virāga)이 불교 수행의 목적인 해탈과 가까워지는 것인데 반해, 심리학에서는 애착 이론을 기반으로 하여 안정된 애착이 클수록 성숙한 인격체가 됨을 주장한다. 불교와 심리학의 애착에 대한 이러한 개념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불교의 이욕은 세계를 초월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진정한 자비를 품는 길이라는 것, 그리고 심리학자들의 주장과 마찬가지로 건강한 성인에게 이욕의 심적 구성요소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봄으로써 불교와 심리학의 융합을 연구하는 심리학자들의 시도가 생산적인 연구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려고 한다. 불교의 이욕과 심리학의 건강한 애착을 연결하려는 시도에서 그러한 연결을 가능하게 해주는 매개적 역할을 하는 개념으로 ‘마음챙김(mindfulness)’과 ‘자비(compassion)’가 있다.
최근 치유를 위한 명상이 보급되면서 밀교의 명상 수행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불교의 다양한 교리체계 가운데 특히 밀교는 궁극적으로 무아(無我)에서 대아(大我)를, 무욕(無欲)에서 대욕(大欲)을, 내세 보다는 현세를 주체로 하여 설하고 있고, 그리고 정(靜)과 동(動), 미소 와 분노의 다종다양한 사실과 상황들이 약동하는 만다라 세계의 여러 존격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밀교에서 치유하기 위한 준비단계의 명상을 티베트불교에서는 가행이라 하는데, 여기에는 일반적인 가행[共加行]과 특별한[不共] 가행이 있다. 공가행은 「인신난득(人身難得)」, 「세간무상(世間無常)」, 「업과 인과 (業及因果)」, 「윤회시고(輪回是苦)」의 네 가지가 있다. 이 네 가지 공가 행은 붓다의 근본 교설을 바르게 이해하고 명상하는 것이고, 이러한 공 가행은 존재의 본질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머리로 접근하는 명상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비해서 귀의발보리심을 통한 「귀의대예배(歸依大禮拜)」, 장애를 닦는 「금강살타 수행」, 자량을 쌓기 위한 「만다라공양」, 깨달음의 지혜를 얻기 위한 「구루요가」의 네 가지 불공(不共)가행은 가슴으로 온몸으로 접근하는 명상이라 할 수 있는데, 티베트불교 모든 종파에 공통적인 예비수행으로 말하는 불공가행이다. 이러한 가행의 명상법들은 밀교의 본격적인 명상 수행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단계의 명상법이다. 현대인들의 심리적인 문제를 제거하고 마음의 질병을 일시적인 느낌 이나 위안만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온전히 치유하는 방편이 수행인데, 근본적인 수행을 하기 위한 자량을 쌓는 것이 공가행과 불공가행의 명상법임을 살펴보았다.
‘현대인’들의 라이프 사이클에 적합한 법회 의례는 어떠해야 하는가를 살펴보았는데,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헌공(獻供)과 설법으로 이원화되어 있는 법회는 공양 의식의 보궐진언 이전에 청법게로 법사를 청하고 법문이 끝난 다음 하당(下堂)할 때 정근(精勤)을 하는 형식으로 일원화되어야 한다. 둘째, 법회에 범음(梵音)을 활용하여 현대법회에 전통의 범음으로 아름답게 장엄돼야 하고, 또 전후(前後) 의식의 맥락이 일치돼야 한다. 셋째, 공양을 올리는 재자(齋者)들이 직접 공양의 간절함을 전할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다. 대신 아뢰는 것을 듣기만 하는 종교가 아니라, 부처님께 자신의 정성을 직접 고백하는 경건하고 숭고한 순간을 향유해야 한다. 넷째, 시제(時制)가 없는 한문을 주로 사용하는 과정에 간략히 행할 때의 의식과 광대하게 행해야 하는 의식이 서로 중복되기도 하는데, 지문(地文)에서 아뢰는 대로 그 행위가 갖춰져야 한다. 이렇게 현대 법회 의례가 구성되면 법회 의례는 숭고미와 지성미, 우아미 등이 갖춰져 참여자 누구나 이를 느낄 수 있게 되며, 일원화된 법회, 전통이 이어지고 대중이 참여하는 법회, 지문(地文)과 행위가 일치 된 법회가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
본고는 현대 한국의 현장에서 실천되며 관찰되고 있는 의례 가운데 조상을 중심대상으로 재(齋)하고 제사(祭祀)하고 기도하는 문화에 주목한 연구다. 조상은 불교, 유교 및 20세기에 확산된 다양한 신종교들의 의례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신격이다. 초기 천주교나 개신교 등 소위 서양에서 유입된 종교가 이 조상문제를 쟁점 삼았던 역사에 비추어보면 현대 이들 종교 신앙인들이 조상을 포괄적으로 안고 가는 흐름은 분명히 ‘한국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본고는 20세기의 의례와 조상을 결합하였을 때 보이는 현대 한국인들의 조상의례문화의 개성을 포착하려고 하였다. 이 때 방법론적으로 인류학·민속학에서 주로 활용하는 현장연구를 기초로 자료를 구성하였고, 여기에는 몇몇 현장 제보자들의 목소리를 담기도 했다. 또한 연구의 시각은 가급적 각 종교의 맥락과 기능을 감안하되, 현대 조상의례문화의 공통점과 비교의 지점을 ‘예속(禮俗)’의 변용이라는 측면에 초점을 두었다. 이러한 연구의 제측면을 포함하여 본문에서는 조상의례를 대상 신격인 조상 및 그 실천 주체, 장소성, 그리고 시간 및 세시 등으로 나누어 논의를 진행하였다. 그 결과 조상의례 가운데 유교 가례와 그 현대적 변용에서 쟁점이 되는 부분이 불교나 신종교의 현장에서 특별히 강조되고 있지는 않아 보였다. 가령 모시는 조상을 보면, 불교 합동차례에서는 고/비(考/妣)와 고인이 된 형제자매가 절대다수였고, 주인의 조고/조비 혹은 그 이상의 대수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이에 비해 무교는 상대적으로 모시는 조상의 대수가 올라가기도 했다. 그런 만큼 조상을 모시는 대수의 문제는 비록 현대에도 각 종교에서 중요하게 고려할 필요는 있어보였다. 한편 재와 제를 행하는 시간과 장소의 예속 변화도 쉽게 감지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한 각 종교의 철학적․사상적 차이를 감안 하더라도, 현대 우리사회의 조상론적 쟁점에 대한 종교계의 실천적 논의가 미진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최근에 불교와 관련된 의례가 불자와 국민들 앞에 많이 등장하고 있다. 수륙재, 영산재, 연등회, 예수재 등의 의례가 여러 대중들 앞에서 시연되고 그 의미와 영향력이 확장되고 있다. 불교의례가 대중에게 소 개되고 시연되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과정이긴 하지만 동참의식과 수행 인식이 결여된 보여주기 식의 행사에 그쳐서는 불교본래의 목적을 잃기 십상이다. 불교의 목적은 수행을 통한 해탈이다. 그래서 의례행위 또한 집중된 수행의례로서 인식되어져야 하고 의례 행위를 설행하는 주체나 보고 있는 참관자 모두에게 수행의 형태로서 접근되어져야 수행으로서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초기불교시대의 의례는 수행의례가 대부분 이었다고 한다. 수행을 돕기 위한 의식이 의례가 된 것이다. 그러한 인식하에서 의례는 곧 수행을 위한 것이고 의례를 통해 일어나는 행위는 수행의례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전제하에서 의례를 설행하 는 행위자는 수행정신과 수행인식을 먼저 갖추어야 한다. 의례 설행 시 의례행위가 어떠한 접근로를 통해서 수행인식의 요체라 할 수 있는 진여법신과 접속하고 진여 가운데 안착할 수 있는지[새기고 세움]를 살펴 보고 확보된 수행인식을 어떻게 의례행위에 다시 실어서 펼쳐나갈지[실어서 펼침]를 철학적, 수행적으로 접근해 보고자 하는 것이 이번 논문의 핵심이다. 수행은 외부의 경계를 끊고 내안에만 머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리이타, 하화중생하기 위한 것임이 항상 요구된다. 이러한 인식을 확보하고 몸의 관찰을 통해 온 몸의 몸짓으로 의례를 펼치게 되면 의례가 곧 수행이 되고, 수행의례로서 자리 잡히게 되는 것이다. 본 논문은 의례를 집행하는 자와 참관하는 자 모두가 의례를 바라보는 입장을 수행의 과정으로 인식하여 보여주기 식의 의례를 뛰어넘어 수행에 동참하는 의례로 바꿔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각종 의례의 설행을 통해서 동참자 모두가 번뇌 망상의 오염으로부터 벗어나 상락아정의 열반의 경지에 함께 도달할 수 길을 열어 제치는 것이다.
최근 한국사회에는 웰빙과 힐링이 본격적인 문화코드로 자리 잡았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요가와 명상에 관심을 보였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초심자들이 몸의 고통을 경험한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이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 이 논문에서는 소마라는 개념에 근거한 소마사무 량심예술명상을 소개하고, 이를 움직임이라는 요소를 중심으로 요가와 비교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현재 한국사회에서 유행하고 있는 요가는 본연의 목적에서 벗어나 몸에 치우쳐 있다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또한 요가의 움직임은 정형화 된 자세를 만들어내는 것을 강조하기 때문에 마음에 의해 몸이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충분히 실현하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도 갖고 있다. 반면, ‘소마사무량심예술명상’은 동작의례(MR)의 즉흥 움직임과 동작의례(MR)를 하는 동안 내적인 경험으로 떠오른 이미지를 시각화하는 작업으로 마무리한다는 점에서 정형화된 요가의 움직임과 차이가 있음을 확인하였다. 또한 ‘소마사무량심예술명상’은 움직임에 사무량심이라는 마음현상의 이미지와 상상, 기억 등을 다른 예술매체로 변형하여 다채 롭게 표현하는 더 적극적인 명상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마음의 변화를 즉흥적인 움직임으로 표현하고, 그 움직임을 따라가며 마음의 다양한 변화 및 움직임을 알아차리는 소마사무량심예 술명상은 심신의 통합적 수련에 있어서 보다 적합한 대안으로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본 논문은 「영규사실기」의 내용에 의거하여 그의 생애사와 의병활동 을 확인해보고, 왜 그런 기록이 등장했는지, 불교와 유교측 간에 영규에 대한 시각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등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였다. 전체적으로 보면 「영규사실기」는 임진왜란을 전후로 하는 시점에서 영규가 전란을 준비하는 과정, 그리고 의병장들의 전투 기록의 두 부분으로 나뉜다. 「영규사실기」에서는 영규가 전란이 일어날 것을 미리 예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가 나무를 쪼개 무예훈련을 했다던가, 단단한 나무를 발견하면 따로 숨겨두었다는 것은 스스로 미래의 전란을 대비하는 과정이었던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또한 조헌과 고경명 등 호남지역의 의병장을 하게 되는 이들이 갑사로 찾아오는 장면은 이른 시기에 의병모집을 했던 배경을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영규사실기」에서처럼 사실(史實)이 확인되지 않는 내용으로 영규를 미화하거나, 유교적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인물로 묘사하는 것 등은 유교 지식인들이 쓴 영규 관련 자료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된다. 불교 측이 영규를 선양하는 것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반면에, 유교 측에서는 적극적으로 영규의 의병활동에 따른 계율논쟁을 변증하고, 그의 충절을 부각시켜왔다. 이는 영규의 의병부대가 전란 초기에 전과를 올림으로써 조선정부의 위기상황을 전환시키는데 기여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19세기에 「영규사실기」와 같은 문헌이 등장하고, 계룡산에 사우를 세우는 등 영규에 대한 추숭작업이 이루어졌던 것은 이러한 불교와 유교 간의 누적된 시각적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한 유교 지식인들의 노력일 가능성이 크다. 이는 결국 불교 승려로서가 아니라, 왕조를 위해 절명한 의병장으로서의 영규를 추숭하려 했던 그들의 의지가 배경으로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이 논문은 1877경 편찬된 『觀世音菩薩妙應示現濟衆甘露』에 나타난 생명존중사상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 책은 동대문 밖에서 일군의 재가자들이 모여 만든 妙蓮社라는 불교적 신앙결사체의 산물이라 평가할 수 있다. 유교적 가치가 지배한 조선시대 말기에, 불교적 가치에 입각한 수행과 사회적 실천을 강조하는 내용의 책이 편집되었다는 것은 매우 유의미한 사건으로 평가할 수 있다. 조선말기의 불교계는 암흑기였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이 책은 동북아 불교사상의 핵심인 화엄사상과 선사상의 바탕 위에서, 법화사상과 관음신앙을 독자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물론 그 밑바탕에 윤회론과 연기론이 내재되어 있지만, 불성론에 의거해 만물의 존귀함과 일체 존재의 평등을 강조하는 것은 매우 주목할 가치가 있다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살생이나 육식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으며, 편견과 무지를 버릴 때 만물을 사랑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생명에 대한 존귀함과 평등을 강조하는 내용은 『능가경』이나 『사분율』, 『범망경』등과 상통한다. 이러한 경전들은 전통적으로 동북아불교권에서 중요시했던 경전들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화엄과 선사상의 논리적 토대 위에서 법화사상이나 관음신앙을 융합해 이해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그리고 불살생의 사상적 연원은 『숫타니파타』의 아힘사나 박애사상에까지 소급될 수 있다는 점에서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법화사상에 의거해 일체 존재를 보살의 화신이라 간주 하고 대소사를 여래의 일로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하는데, 그 논리적 바탕은 불성론에 의거한다. 그리고 불성론에 의거해 많은 사람들에게 수기를 주고 있다. 수기를 준다는 것은 구원의 보편성을 의미하는 것이며, 법화사상의 특징을 독자적으로 이해한 결과라 볼 수 있다. 수기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바로 불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 보는 것이다.
염불을 통해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염불환향곡」과 『법화경』 「신해품」 의 ‘장자궁자유(長者窮子喩)’는 ‘무명(無明)으로 길을 잃은’ 중생이 마침내 고향에 돌아간다는 내용과 ‘장자궁자유’의 ‘궁자’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되는 과정이 유사하다. 염불환향곡의 ‘본원자심’과 장자궁자유 에서는 아버지의 집은 깨달음의 세계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이것이 곧 ‘고향’이다. 이는 곧 중생에게 존재하는 ‘불성’이며, 심리학적 관점에서의 ‘참자아’와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본질을 통찰하지 못하여 본원자심을 잃어버린 중생의 상태는 마치 신체적 성장과 정신적 성장 사이의 불균형으로 인하여 많은 심리적 갈등을 빚게 되는 사춘기 청소년의 모습과 같다. 사춘기에 접어든 청소년들이 자신이 존재에 대 해 고민하기 시작하는 것이 바로 자신의 무의식을 인식하는 것으로 볼 수 있듯이 장자궁자유와 염불환향곡의 실향한 사람이 발심하는 계기가 곧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게 되는 청소년기에 비견할 수 있다.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한다면 먼 데서 찾을 것이 아니라 바로 눈앞에 펼쳐지는 ‘나’의 진면목, 즉 근본 자리로서의 ‘마음[心地]’을 살펴보아야 한다. 이는 깨달음이란 지극히 일상적인 것이어서 ‘깨침의 세계는 우리들 현실을 떠나 존재할 수 없다’는 효봉스님의 말씀과 일맥상통함을 알게 한다. 무명으로 길을 잃은 사람과 궁자는 진정한 자아를 모르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으며, ‘고향’으로 상징되는 불성, 곧 참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 고향은 곧 본원자심이자 청정심이며, 현대인들의 진정한 자아이며 인간 본연의 모습임을 알 수 있다.
본 논문은 『능엄경』의 이근원통(耳根圓通)과 염불원통(念佛圓通)이 갖는 특수성에 기인하여 두 원통법에 대한 경문 내용을 분석하고, 『능엄경』의 내용에 담긴 수행체계와 사상적 논리구조를 통해서 두 원통법의 의미와 적합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관세음보살의 이근원통은 이근(耳根)을 통하여 문성(聞性)을 관조(觀 照)함으로써 망심(妄心)을 유발하는 모든 경계를 해제하는 반문자성(反 聞自性)의 방법이다. 대세지보살의 염불원통은 육근(六根)을 모두 포섭(包攝)하여 오로지 아미타불에 대한 정념(淨念)을 통한 견불(見佛)을 지향한다. 양자는 둘 다 적극적인 대승의지를 선양하고 선정에 들기 위해 각자 가장 수승한 공덕을 지닌 근(根)을 선택하였다는 점에서 공통 점을 갖는다. 『능엄경』에서 최종적으로 선택되는 원통은 이근원통이다. 관세음보살의 이근원통이 수승한 이유는 처음부터 문성(聞性)을 관(觀)하여 생멸심(生滅心)에 의지하지 않으며, 육결(六結)의 단계를 거쳐 생사와 번뇌의 근본을 풀어가는 등의 수행의 내용이 『능엄경에서 제시 하는 수행차제를 가장 충실히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대세지보살의 염불원통은 인지(因地)에서 아미타불에 대한 일념(一念) 을 들고 있고, 아미타불에 대한 절대적 믿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능엄경』의 기준으로는 문수보살이 지적했듯이 여래에 대한 일념조차 망상이고 생멸심에 의지 한 것이다. 『능엄경』에서 요구하는 수행의 원칙은 수행의 시작과 목적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두 가지 결정의(決定義) 즉 인지(因地)와 과지(果地)를 일치시키되 문제의 근본에서 해탈의 열쇠를 찾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