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천태의 『마하지관』에 나오는 십승경 중의 하나인 業相을 분석 심리학과 비교하여 분석하고자 하는 작업이다. 업상이란 수행의 과정 중에 나타나는 심리적 현상이며, 개개인의 행업의 결과가 잠재의식상태로 저장되 어 있다가 수행으로 인해 드러나는 현상이다. 선악 등은 모두 심리적 착각이고, 인공적으로 의식화된 대립의 규정이라 정의한 것은 융의 입장이다. 윌리엄 제임스는 “대상관념은 반복되고 경험되 어 다듬어진 결과의 하나”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업상을 보는 천태의 시각과 상통한다. 업상의 논리전개에서 習因과 習果, 報因과 報果 사이에 이어지는 시간적 지속은, 동일자의 차이 내지 현존과 부재의 교대, 그리고 관찰자의 개입으로 이해가 가능하다. 융이 말하는 심리적 원형이란 개념도 불교의 ‘共業에 의해 발생하는 共相惑’에 가까운 집단무의식이다. 또한 융이 “심리적 원형은 그 자체 표상이 불가능하지만 ‘원형적 이미지’를 통해 원형의 종류를 분석”하는 방식은 업상에서 선악업의 발생 모습을 분류하는 방식과 유사성을 보인다. 천태지의는 십승관법이란 수행방법을 통해 수행의 과정에 드러나는 업상 을 해결하고자 하며, 특히 識陰의 관찰을 중시한다. 그런데 이러한 방식은 ‘페르소나’라는 심리학적 개념을 연상시킨다. 식음의 관찰을 중시한 것은 심 리학에서 페르소나의 본질을 파악하여 가면적인 자신에 매몰되지 않도록 유 도하는 것과 방법론적으로 유사하다는 점이다.
본 연구는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을 중심으로 관세음보살의 자비 심과 그 심리치유적 요인에 관하여 고찰한 것이다. ‘관세음(觀世音)’은 세상 의 소리, 곧 중생의 소리를 관(觀)한다는 의미로서 ‘관한다’는 것은 단지 보는 것이 아니라 ‘보살핌’의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관세음보살은 중생이 호소하 는 고통을 보고 듣고 보살피는 구원자로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본 연구자는 중생의 다양한 재난을 상징하는 ‘칠난(七難)’을 실제적인 재 난이 아닌 심리적인 괴로움으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심리적인 재난 상황에 처한 중생들이 관세음보살을 칭념하고 의지하면 관세음보살과 감응하게 되 고, 보살의 자비로운 원력의 작용으로 심리적인 안정을 얻게 된다고 보았다. 천태지의는 관세음의 관(觀)을 ‘관조(觀照)’의 의미로 이해하여, 관세음보 살이 단순히 중생들의 소리를 듣고 그 소리에 따라 감응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인 내가, 대상인 무엇을 관조하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천태지의의 해석에 따라 관세음보살은 외재적 초월자가 아니라 내면을 관조 하는 수행자 자신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끝으로 자비의 개념을 심리치유에 적용하여 심리치료 프로그램으로 활용 되는 ‘자비명상’의 방법과 효과를 살펴봄으로써 관세음보살의 자비가 심리치 료에 실천적 방법으로 활용될 수 있음을 이야기하였다.
본 논문은 『묘법연화경』의 「관세음보살보문품」에 드러난 보살 사상 및 그 전개가 칼 융의 분석 심리학에 나타난 ‘자기’(the Self) 의 부분이자 상징이라 고 할 수 있는 개성화를 이룬 인간 및 개성화의 과정과 유사성을 가지고 있는가 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분석 심리학에서 인간은 자아에서 시작하 여 자기로의 여정을 거치는데, 이 자기(Self) 및 개성화를 이룬 인간의 특성을 살펴보면 이 특성은 대승 불교 경전의 여러 곳에서 등장하는 보살의 특징 및 행법과 일맥상통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본 고는 그 중 「관세음보살보문품」에 나타난 관세음보살은 ‘자기(Self)’의 외현적 상징으로, 사바 세계를 노닐며 중 생을 돕는 과정은 자아의 개성화 과정과 유사하다는 관점에서 둘을 비교 고찰 하려 한다. 분석 심리학에서 개성화를 이룬 인물은 몇 가지 특징을 갖는데, 그 림자를 이해하고, 정신적 영역의 여성성과 남성성인 아니마 아니무스가 잘 분 화되어 통합을 이루고 있으며 집단 무의식에 열려있어 사람의 행동을 잘 이해 하고 깊은 연민을 느끼며 성격의 어느 한 측면이나 태도, 원형 등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상황에 따라 페르조나를 잘 사용하지만 이는 사회적 편의 때문이 지 자신의 본성(Self)과 헷갈리지 않는다. 「관세음보살보문품」의 관음은 그 경 전의 이름과 같이 모든 중생의 소리를 듣고(觀音) 지혜로서 그곳에 나투며 (普 門) 그들을 도우나 도운 것에 집착하지 않는다. 근기 마다 그 근기에 맞게 나투 지만 그것은 방편일 뿐 본성에는 물듦이 없다. 열반 해탈과 중생의 경계선에 있어 중생을 향하여 돌아보나 돌아가지는 않는다. 이렇듯 관세음보살의 행법 은 분석심리학의 개성화된 인간이 가지는 특징과 깊은 유사성을 보이며, 분석 심리학자들은 관세음보살을 불성(佛聖)이라고 하는 ‘자기(Self)’ 의 외현 이며 높은 수준의 아니마로 바라보기도 한다. 더하여 본 논문은 「관세음보살보문품」에 나타난 개성화의 상징들을 고찰 하고자 한다. 보문품의 큰 흐름이 원형과 그림자의 만남, 페르조나의 상실, 아 니마 아니무스의 만남, 페르조나의 사용 및 자기(Self)로의 회귀와 다르지 않다 는 관점에서 둘을 비교하려 한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하여 관세음보살을 신앙 적 가치를 넘어선 심리학적 가치를 가진 정신적 도착지로서 그 개념을 확장하 는 것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본 연구의 목적은 크리스토 거머 (Christopher K. Germer )와 크리스틴 네프 (KristinD.Nef)가 공동으로 개발한 현대명상프로그램,MSC(MindfulSelf-Compassion) 을 통해 초기불교의 자비 사상이 활용되고 있는지 살펴보는데 있다. 이를 위하여 프로그 램의 핵심적인 기법을 분석하고 초기불교의 사무량심 수행과 비교해 보고자 한 다. 먼저 초기불교의 자비와 사무량심 수행을 살펴보고, MSC 프로그램의 구 체적인 실행과 실천 기법을 탐색하면서 사무량심 수행법과 MSC 프로그램의 주요 기법들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드러내었다. MSC의 핵심가치인 마음챙김, 자기연민, 보편적 인간경험의 의미를 살펴 보면, 사무량심의 자애 자비가 근간이 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MSC 프로그 램이 지향하는 자애연민, 자비가 초기불교의 자비, 특히 사무량심과 상통점 이 있고, MSC 프로그램에서는 사무량심 수행실천의 핵심적인 특색인 자애, 자비의 실천이 접목되어 보인다. 비교한 결과, 두 수행방법은 인간의 괴로움에 대한 감소를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 괴로움을 해결하는 사무량심 수행과 MSC의 프로그램을 프 로그램 실천 밖에서도 융합 수용하여 구체적 치유 심리프로그램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본다 두 수행방법을 불교 상담에 활용하면 이상적인 심리상담의 실천수행이 가 능하다고 본다. 차후에 구체적 심리치유 방법은 경험을 통하여 수용 가능한 적절한 불교 상담 명상프로그램으로 계발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 글은 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통하여 불교적 마음치유의 가능성을 탐 색한 것이다. <나의 아저씨>가 불교적 마음치유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점 은 이 드라마가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나의 아저씨>에는 악행을 저지 를 수밖에 없는 상황만 있을 뿐 본성적으로 악한 인간이 등장하지 않는다. 다른 이에게 불편한 말을 하는 인물도 사실은 인간관계가 서툰 것이지 나쁜 마음으로 그렇게 하지 않는다. 또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갈등을 맞는 것은 현실을 ‘직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의 아저씨>는 끊 임없이 현실을 회피하지 말고 바로 보라고 설법한다. 특히 <나의 아저씨>는 주인공 동훈과 지안의 관계를 통해 본래 선한 성품 의 인간이 그 본래의 선한 성품을 발현하여 ‘자리’가 바로 ‘이타’임을 가르쳐 주며 ‘자리이타원만’이라는 불교의 가치를 드러낸다. 뿐만 아니라 그런 ‘자리 이타원만’의 가치를 “너를 위해서 내가 행복하겠다”는 일반적인 어휘를 사용 하여 강조하면서 ‘편안함’과 ‘행복’이라는 가치로 확장하여 드러내고 있다. 이상을 통해 <나의 아저씨>는 21세기형 불교 텍스트의 한 예로 보아도 무 방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인물형과 불교 주제 구현을 사용한 <나의 아 저씨>의 분석을 통해 종교의 시선이 아니어도 마음의 위안을 얻어 치유를 얻는 구조를 발견하고, 다시 이것을 활용하여 향후 콘텐츠를 제작하는 데 필 요한 불교 구성의 방향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본 연구의 목적은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위기 청소년의 긍정심리자 본, 그릿, 마음챙김 간의 상관성을 분석하고, 그 연구 결과를 토대로 위기 청소년의 마음챙김 향상에 필요한 기초자료를 제시하는 것이다. 본 연구의 가설은 다음과 같다. 첫째, 긍정심리자본이 마음챙김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둘째, 긍정심리자본이 그릿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셋째, 그릿이 마음 챙김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넷째, 긍정심리자본과 마음 챙김에서 그릿의 매개 효과 가 보일 것이다. 연구대상자는 경상남도 U광역시에 소재한 청소년 보호기관의 심리상담센 터를 임의 표본집단으로 하여, 위기 청소년 125명을 설문조사하였다. 연구결 과, 첫째 긍정심리자본의 낙관주의와 회복 탄력성이 마음챙김의 현재 지각과 비판단적 수용 및 탈중심주의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긍정심리자본의 낙 관주의나 희망이 마음챙김의 주의집중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확 인되었다. 둘째, 긍정심리자본의 낙관주의는 그릿의 모든 하위요인에 긍정적 인 영향을 미쳤고, 회복 탄력성은 그릿의 흥미 유지에만 긍정적인 영향을 미 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셋째, 그릿이 마음챙김의 모든 하위요인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끝으로 긍정심리자본이 마음 챙김에 미치는 영향과 관련하 여 그릿은 부분적으로 매개 효과를 보였다.
본 논문은 조선시대 오대산에 설치된 왕실원당을 중심으로 조선 왕실의 오 대산 신앙을 고찰한 연구이다. 조선시대 오대산에는 태종대부터 고종까지 총 9차례에 걸쳐 왕실의 원당과 원불이 조성되었다. 태종대 태상왕 이성계의 사자암 중수, 세종대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의 월정사 중창, 세조대 세조의 상원사 중창, 의숙공주의 원불 조성, 상의조씨의 영감암 중창, 선조대 영감사의 실록수호사찰 지정, 인조대 소현세 자를 위한 제석천상 중수, 고종대 국태민안을 발원하는 불상의 이운 등이 이어 졌다. 오대산에 설치된 왕실원당의 성격은 세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오대산에 대한 조선 왕실의 깊은 신앙심이 원당 설치의 기저에 깔려 있다는 점이다. 명산에 기도처를 세우고 국가의 안녕을 발원하던 오랜 전통은 불교의 유입 이후 보살상주 신앙으로 변화하였고, 이 전통을 이어받은 조선 왕실은 국가와 왕실의 안녕을 발원 하는 기도처를 오대산에 지속적으로 설치하였다. 둘째, 천재지변을 극복하기 위한 기도처가 계속 이어졌다는 점이다. 고대부터 국가에 천재지변이 발생하거나 왕실에 환란이 있을 때마다 산천단묘에서 제사를 지내던 전통은 불교의 유입 이후 대부분 사찰로 흡수되었다. 특히 오대산과 금강산, 태백산과 같은 명산들은 국가 주도의 소재법석이 벌어지는 대표적인 명소였다. 셋째, 요절하거나 병든 왕실구성원을 위로하기 위한 원당과 원불이 계속 조 성되었다는 점이다. 조선중기 이후 대부분의 왕실의례가 유교식으로 전환된 이후에도 조선 왕실에서는 왕실 차원의 추천불사를 계속 이어나갔다. 특히 젊 은 나이에 요절하거나 안타까운 사연으로 사망한 왕실구성원을 위한 원당은 조선말까지 계속 이어졌다. 오대산은 신라시대에는 문수보살의 상주처로, 고려시대에는 국가의 비보사 찰로 숭앙되었고, 조선시대에는 왕실의 대표적인 기도처로 유지되었다. 조선 왕실은 고대부터 이어진 오대산 신앙을 계승하여 왕조가 지속되는 내내 국가 와 왕실의 안녕을 발원하는 기도처를 운영하였다.
오대산 상원사 문수전에는 국보 동자문수보살상과 보물 문수보살상 사이 에 3존의 목조 동자입상 3존 배치되어 있다. 중앙에 배치된 동자상이 상원사 목선재동자입상(이하 상원사상)이다. 상원사상은 선재동자이며, 동자문수보 살상의 협시로 추정된다. 상원사상은 고려・조선 초의 수월관음도 및 관음보살상과 결합된 선재동 자상의 도상을 따르고 있고, 1466년에 제작된 동자문수보살좌상과 동일한 양식이다. 선재동자상은 『화엄경』 「입법계품」의 배경으로, 8-9세기 당대 오 대산 기사문수・기상보현보살상의 협시로 등장한다. 선재동자상은 선재동자 구법도의 유행과 더불어 요와 북송대에 수월관음상의 협시로 등장하고, 오대 산 문수신앙의 발전으로 문수보살의 협시로 정착하였다. 중국과 일본에은 문 수보살상의 협시상으로 여러 사례가 전해지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알려진 바 가 없다. 상원사상은 동자문수보살좌상의 우협시에 배치되고, 2존의 동자상 은 목문수보살좌상의 좌우협시일 가능성이 높다. 2존의 동자상는 문수보살 상의 발원문에 등장하는 남순동자와 선재동자로 추정된다. 상원사상은 문수보살상의 협시로 조합을 이룬 첫사례이자 최고의 작품이 며, 왕실에서 발원하여 당대 최고의 작가에 의해 제작된 예술성이 뛰어난 작 품으로 조성 연대가 추론되는 기년작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선재동자상 은 오대산 신앙에서 등장했을 가능성이 높다.
본 논문은 오대산 상원사 문수전과 영산전에 봉안된 제석천상 도상의 기원을 고찰한 것으로, 특히 조선시대 제석천이 나한전에 봉안된 기원을 간다라 ‘제석 굴 설법’ 불전 도상에서 찾고자 하였다. 제석천이 우리나라 불교미술에 등장한 것은 통일신라시대로 석굴암 주실(主 室),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 태안사 적인선사 승탑 등에 범천과 쌍으로 표현되 었다. 고려시대에는 제석천 단독으로 등장하며 왕의 모습과 보살 도상이 융합 된 형태로 조각 및 회화로 조성되었다. 고려시대에 유행한 제석천 도상은 조선 시대에도 계승되었다. 조선시대 제석천은 상원사 문수전 제석천상처럼 왕의 모습으로 표현되는데, 단독으로 제석전(帝釋殿)에 봉안되었거나 석가삼존 및 16나한과 함께 영산전 [나한전]에 모셔졌다. 이 공간은 석가여래께서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하는 장 면을 나타낸 것이다. 조선전기에는 주로 독존으로 안치되다가 후기에는 좌우 2위로 봉안되었다. ‘제석굴 설법’의 장소인 제석굴은 석가여래께서 법화경을 설 한 영축산 근처에 있고, 간다라의 모하메드 나리(Mohamed Nari)에서 출토된 대표적인 대승설법 장면에도 제석굴 설법으로 해석되는 도상이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예를 통해 본 논문에서는 조선시대 영산전[나한전]에 제석천이 봉안된 것은, 제석천이 석가여래께 법을 청한 ‘제석굴 설법’ 불전 도상의 영향으로 추론 하였다. 오대산 상원사 문수전 목조제석천상은 1466년에 조성되었고, 영산전 소조제 석천상은 15세기 말~16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16나한상과 함께 봉안되어 있 다. 문수전 목조제석천상은 상원사 창건과 관련된 보천과 깊게 관련되어 있다. 보천이 신성굴에서 수행한 에피소드 또한 석가여래가 제석천에게 설법한 장소 인 제석굴과 상통한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상원사 문수전과 영산전에 봉안 된 제석천상은 간다라 ‘제석굴 설법’ 불전 도상에서 기원한 것으로 해석하였다.
현 상원사 영산전에 봉안되어 있는 석가삼존과 16나한상은 재질이 소조와 목조로 나뉜다. 소조상은 1711년 이전에 제작된 상으로, 조선전기로 올라가 는 양식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소조상들은 조성시에는 흙으로 성형한 후에 그 위에 채색하여 제작하였으 며, 보존처리를 통해 본래의 모습이 회복되면 조성연대를 확실하게 알 수 있 을 것이다. 소조상은 상체가 길고 무릎이 낮은 신체비례로 영주 흑석사 아미타불상 (1452년)이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천주사 아미타불상(1482년) 등 조선전기 불상과 유사하며, 갸름한 얼굴과 긴 코, 작은 입의 표현에서 조선전기 불상 양식을 공유하고 있다. 소조상의 착의법은 여래상과 비슷한 착의법을 하였다. 가슴이 크게 벌어 지게 표현된 점, 오른쪽 어깨에 반달형으로 걸치면서 왼쪽 어깨로 넘긴 자락 이 유려하게 흐르는 듯한 옷주름을 만든 것과, 무릎 아래에서 발목으로 모아 지는 옷주름, 특히 제석천상에서 보이는 영락 장식 등이 조선전기 불상 양식 과 상통하므로, 착의법을 통해서도 이 소조상이 조선전기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오대산(五臺山)은 신라시대 자장스님에 의해 중국 오대산으로터 문수신앙 이 도입되어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문수신앙의 성지가 되어 왔다. 그 중심에 상원사가 있다. 상원사에는 1466년 조선왕실이 발원한 동자 문수 보살상과 1661년에 의천스님이 발원, 조성한 문수보살상이 나란히 안치되어 있다. 1661년 조성된 문수보살상은 진여원의 세 번째 중창된 만들어진 상원 사의 본존불이다. 이 불상이 조성되기 전 이미 상원사에는 동자 문수보살상 과 노(老) 문수보살이 전하고 있었다. 동자 문수보살은 왕실에서 조성한 것이 기 때문에 지금과 달리 특별히 마련된 원당에 봉안되어 있었을 것이고 노 문수보살상은 상원사의 원래 본존으로 봉안되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 문수보살상이 1599년에서 1661년 사이 인근 보현사로 이안되면서, 새로운 문수보살상이 의천스님에 의해 계획된 것으로 보이며, 지금의 문수보살상이 바로 그 문수보살로 추정된다. 보살상의 제작에는 임진왜란 이후 팔도도총섭 체제로 개편되는 불교의 시스템과 관련이 깊다. 팔도도총섭은 전란으로 피해 를 입은 사찰을 복구하기 위해 체계적으로 승려장인들을 육성하였고, 이 보 살상을 제작한 승려 역시 도총섭 체제하에서 육성된 승려장인들로 구성된 것으로 보인다. 1661년에 제작된 문수보살상은 如意를 지물로 취하고 있다. 조선시대 이 전 如意는 주로 보현보살의 지물로 등장하지만, 차츰 문수보살상의 지물로도 사용되다 17세기 이후에는 완전히 문수보살의 지물로 채택되고 있다. 따라 서 상원사 문수보살상의 여의는 조선 후기 조각승들이 인식했던 문수보살의 도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보살상을 제작한 사람은 신겸과 회감인데, 신겸은 이 시기 대표적인 불화승이고 회감은 조각승이다. 불화승과 조각승의 공조로 불사가 진행되고 있어 당시 불사의 특징을 이해하 는 데 유익한 정보를 담고 있다.
강원도 오대산 상원사의 문수전에는 문수동자상과 문수보살상이 모셔 져 있다. 문수동자상은 1466년에 조성된 불상이며 1984년에 복장유물이 발 견되었는데 그 가운데 조선 초기의 저고리인 명주 적삼과 무문사 적삼이 포 함되어 있다. 복장유물들은 일괄 보물 제793호로 지정되었는데 저고리의 문 화재명칭은 ‘명주 적삼’과 ‘생명주 적삼’이었다. 그러나 생명주 적삼의 소재 는 무문사이므로 명칭 변경이 필요하다. 1973년 문수보살상을 개금하는 과정에서 회장저고리 한 점이 발견되었 으며, 이 저고리는 1987년에 ‘세조대의 회장저고리’라는 문화재 명칭으로 중 요민속자료 제219호로 지정되었다. 문수보살상은 1661년에 조성되었는데 불상안에서 발견된 회장저고리는 조선 초기의 특성을 나타내고 있어 저고리 의 원복장 불상은 문수보살상이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문수동자상의 의숙공 주 발원문에 의하면 1466년에 8구의 불보살상(佛菩薩像)과 나한상 등을 조 성하여 문수사에 봉안했다는 내용이 있어 당시 조성되었던 다른 불상의 복장 물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리고 회장저고리가 조선 초기의 저고 리이기는 하나 세조와의 관계가 확실한 것은 아니므로 ‘세조대의 회장저고 리’보다는 ‘회장저고리’로 변경하는 것이 합당하며 출처에 대한 보충 설명 또한 필요하다고 본다.
본고는 불교의 전통전인 二諦와 천태종의 三諦가 논리상 서로 相違하는 가를 검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것은 동시에 인도불교와 중국불교가 설로 상위하는가 하는 매우 오래되고 모호하고 흥미롭고 또 새로운 문제의식 에 대한 답변 중 일부가 될 것이다. 천태종의 중국 최초의 중국 불교 종파라 할 수 있으며, 三諦는 천태종의 핵심교리일 뿐 아니라 二諦와 三諦는 언뜻 보기에 서로 양립하기 어려울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본고에서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二諦說과 三諦說을 간략하게 살펴보았 고, 다시 三諦說이 『中論』의 二諦說과 상위하는지 그리고 阿含의 사상과 위 배되는지 등을 검토하였다. 검토 결과, 二諦와 三諦는 모두 방편교설로서의 표현은 다르지만 對境은 동일하다. 즉 三諦는 二諦와 相違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얻었다.
본 연구에서는 삼마제 수행의 근간이 되는 이결정의(二決定義)와 수행 의 방편으로써 제시되는 육근수행을 통해 번뇌의 원인이자 원통의 통로로서 의 육근의 공덕과 작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아울러 번뇌의 해결과정인 육해 일망에 대해 논의하고자 하였다. 초발심의 두 가지 결정의는 삼마제 수행의 필수 근간이 되는 지침의 역할을 한다. 세존이 설하신 두 가지 결정의는 다음 과 같다. 첫째, 인지(因地)의 발심이 과지(果地)의 깨달음[覺]과 같아야 한다. 인지가 과지와 일치하려면 환망한 생멸심을 버려야 하므로 오탁이 설명되어 야 한다. 둘째, 번뇌의 근본과 그 발업윤생(發業輪生)의 원인을 깨달아야 한 다. 번뇌의 근본과 그 발업윤생함이 육식과 육근에 기인함을 깨닫고 바로 그 육근을 통해 번뇌를 풀어야 함을 말한다. 능엄경에서 이러한 삼마제의 방 편으로서 원통근을 통한 수행을 제시한 이유는 육근이 바로 번뇌의 원인이자 깨달음의 통로[解結同體]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세존의 삼마제 법문 가운데 가장 먼저 설법한 초발심의 두 가지 결정의의 내용으로 본다면 오탁에 의한 생멸심이 중생의 번뇌를 필연적으로 야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중생의 번뇌는 육근과 육진의 전도로 인하여 발생함을 깨닫고 번뇌의 원인인 육근을 통해 번뇌를 벗어나야만 불성으로서의 여래장 묘진여성에 이를 수 있게 된 다.
본고는 초의가 집필한 『동다송』을 사상적 관점에서 이해하기 위한 논문이 다. 우리나라에는 차에 관한 서적이 차문화 역사에 비해 그 분량이 적다. 그 중에서도 중요한 서적이 조선시대 초의가 저술한 다서(茶書) 『동다송』은 아 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리나라 차문화는 승려들이 주도 세력이었으며, 차문화의 형성과 발달에도 이들의 역할이 큰 영향을 미쳤다. 승려들은 마음 을 고요히 지니게 하여 正見을 갖게 되는 데 도움이 되는 차의 효능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이러한 효능을 가지고 있는 차는 선승들의 좌선 시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음료가 되었다. 차와 수행, 다도를 한차원 높게 끌어 올리고 정립한 인물이 초의다. 초 의는 시, 서, 화에 능할 뿐만 아니라 차에 대해서는 ‘전다박사’, 그리고 선사 로서 선교융합(禪敎融合)을 중시하고 선의 생활화라는 새롭고 적극적인 선 풍을 드러냈다. 초의의 선교관은 휴정의 선교일치를 따르는 한편, 조사선과 여래선으로 연결 지으면서 거기에는 우열이 없다는 견해를 보였다. 『동다 송』은 우리나라 다서로서 중요한 저술이다. 초의 나이 52세에 차에 대해 물 어 온 해거 홍현주(1793~1865)의 부탁을 받고 저술하였다. 『동다송』을 이해 하는데 있어서는 선과 교의 융화적 시각, 내전과 외전의 융화 그리고 수많은 관계 속에서도 기울지 않는 초의의 입장을 알아야 한다. 제자 소치 허유가 기록하고 있는 내용을 통해 초의의 다선관을 알 수 있다. 초의는 차를 마시다가 흥얼흥얼 시를 읊조리기도 하고 때로는 깊은 선 정(禪定)에 들기도 했다. 선사의 청고하고 담적한 차 생활은 참으로 쉽고 편 안하다고 표현 할 수 있다. 초의는 차를 통해 자연과 하나되는 물아일체(物我 一體)가 되었으며, ‘차를 반쯤 마시다 문득 일어나 뜰을 거닐면서’에서는 다 선삼매(茶禪三昧)의 선열(禪悅)을 느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 출가한 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목탁을 들고 소리 내어 염불 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출가한 스님들에게 있어 염불은 자의든 타의든 당연 히 거쳐야 하는 수행의 과정으로 받아들여져 누구나 배우고 익히는 추세다. 현재의 염불 교육은 스승의 소리를 듣고 따라하기를 반복하며 익히는 것에 중심을 두고 성별을 떠나 같은 음높이에 같은 음색을 내도록 유도하는 게 핵심이다. 하지만 스승의 소리를 무작정 따라하기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스승의 소리와 음높이가 차이 나거나 성별이 다를 경우, 이를 극복하는 과정 이 쉽지 않다. 어느덧 염불을 배우고자 했던 초심은 사라지고 중도에 포기하 려는 마음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100명이 입문해 1~2명이 성취한다는 염불 은 그 자체가 어렵게만 느껴진다. 그러나 염불을 배우고자 했던 신심 어린 입문자는 불교 염불을 전승하는 소중한 인재가 분명하다. 그들이 중도에 포 기하는 건 본인의 의지에 따른 게 맞지만, 전승 과정의 교육체계에도 보완할 점이 분명히 있다고 여긴다. 스스로 만족할만한 성과를 이루지 못해 포기하 는 경우가 대다수임을 고려할 때 초심을 유지하며 더 쉽게 염불을 익힐 수 있도록 하는 방편을 제시할 시점에 이르렀다. 이에 본 연구에선 염불에 입문 한 자에게 있어 꼭 기억해야 할 호흡과 발성을 30여 년 경험치를 담아 전하고 자 한다.
수륙재의문과 청규에 나타난 만두와 국수에 대한 인식변화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처음에는 만두와 국수가 수륙재를 통해서 식료에서 만들어 지는 중요한 음식이었다. 시간이 흐르며, 중국불교와 달리 한국불교에서 만 두는 세시의례음식으로 변화되었다. 반면, 국수는 불교의례음식으로 남았지 만, 세면(洗麵)에서 세면(細麪)으로 바뀌었다. 처음에는 습면의 형태를 취했 다고 생각되나 가는 국수로 바뀌었다. 육색장은 중국과 다른 한국불교 음식문화의 특징이다. 처음에는 6가지 음 식의 특징을 살려서 설치되었으나 점점 경계가 허물어진다. 결국 조선 말에 이르러서는 색장방이란 이름 만 남는다. 그리고 음식 전체를 아우르는 일반 적인 명사로 쓰이게 된다. 음식의 조리법과 종류에 따라 소임이 늘어나는 경 향을 보인다. 결국 만두는 민가의 세시의례음식으로 변화되고, 국수는 불교의례 속에 남아 있게 된다. 현재 시식(施食)에서 제일 먼저 국수를 올리는 의식(儀式)을 가리킨다. 이것이 한국 불교문헌에 보이는 만두(饅頭)와 국수[洗麵]에 대한 의식(意識)변화라고 생각한다.
본고는 한국 만두문화의 기원이 되는 고려시기 만두문화의 전체상을 조망 하기 위한 고찰이다. 선행연구들은 고려말 충렬왕 시기 『쌍화점』의 ‘쌍화’를 한국 만두의 기원으로 간주해오고 있다. 그러나 고려사회는 ‘불교사찰의 채 식만두문화’와 ‘왕실과 민간사회의 육식만두문화’가 『쌍화점』의 ‘쌍화’ 이전 시기부터 고려사회에 정착하여 지속되어 오고 있었음을 밝힌다. 고려 불교채식만두는 13세기 초 수선사 2세인 진각국사 혜심의 『조계진각 국사어록』에 등장하는 불교채식만두인 ‘산함(餕餡)’과 이규보의 『동국이상국 집』에 언급된, 이규보가 평소 교류가 있었던 기선사(其禪師)로부터 받은 만 두류 음식인 ‘혼돈(餛飩)’을 통해 확인된다. 이 시기에 고려불교사찰은 아침 메뉴로 전통적인 죽과 더불어 만두류 음식인 혼돈을 식용하였을 것으로 생각 된다. 고려시대 육식만두의 전통은 국가행사인 연등회와 팔관회의 의례 속에 등 장하는 ‘쌍하(雙下)만두’와 고려가요 속에 언급된 『쌍화점』의 ‘쌍화만두’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쌍하’는 당시 동아시아 왕실과 사신접대에 등장하는 만두류 음식으로 낙타의 육봉을 속재료로 한 왕실연향에서 사용되는 ‘쌍하타 봉각자(雙下駝峰角子)’와 사신접대 등에 사용되는 타봉을 사용하지 않은 ‘쌍 화관장만두(雙下灌漿饅頭)’나 ‘쌍하각자(雙下角子)’등으로 구분된다. 『쌍화점』의 ‘쌍화만두’는 고려사회에 정착한 외국인인 회회인(回回人) 상 인이 팔던 만두로 양고기와 밀착된 그들의 음식문화와 고려사회에서 도축업 에 종사한 사실 등을 토대로 ‘양고기만두’였을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위의 고찰로 미루어 볼 때 고려시대 한국 만두의 기원은 『쌍화점』의 ‘쌍 화’에서 시작되었다기보다는 아마도 북송과 맞물리는 시기에 불교사찰의 채 식만두문화와 왕실과 민간의 육식만두문화가 이미 존재하였을 것으로 생각 된다.
중국 주류 종교는 중국 전통사상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고 중국 전통 문화 중의 일부분이기도 한다. 그 중에서 중국 가장 영향력이 큰 주류 종교 불교, 특히 중국 불교 중의 남종선(南宗禪)은 중국 전통사상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남종선은 6조혜능(六祖惠能) 이후 중국 선문 종 파의 총칭이자 선문의 정종(正宗)이다. 선종이 중국에 전해진 후부터 유가사 상과 도가현학 등 중국 본토의 전통사상을 흡수하고 중국 전통 사상문화에 대한 포용성이 강하므로 선종의 생명력이 매우 질기다. 수행 방식과 교의에 서 말하자면 남종선은 '명심견성(明心見性,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여 자기 의 본성을 발견하다)'이라는 돈오(頓悟) 수행 방식을 고취하면서 본성으로 자 족하(本性自足)고 사람마다 불성이 있는 것을 강조한다. 남종선은 중국 사회 민중의 종교적 신앙 요구에 더욱 적합하여 중국 민중들의 마음속에 대신할 수 없는 불교 대표적인 종파가 됐다. 오랜 역사 발전과 변천 속에서 남종선은 중국 전통문화, 사상과 함께 중국 민중의 '이화위귀(以和為貴, 화목을 으뜸으 로 생각하다)'의 성격 특징을 형성시키고, 또한 중국인 마음속의 '수성초연 (隨性超然, 편한대로 하는 초연)'한 독립적인 자아를 불러일으키고 중국 전통 사상 중의 단점을 보완시키며 중국 민중의 사상과 심미에 영향을 주고 중국 사회의 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남종선은 어느 정도 대중적 기반 을 가지고 있었지만, 현재 중국 사회에서 남종선은 그다지 중시되지 않았고 그 사상적 특징도 잘 발휘되지 못한다는 것은 중국 전통사상과 문화에 매우 불리하다는 것을 뜻한다. 중국 사회의 급속한 발전은 강력한 정신 신앙의 뒷 받침을 떠나서 살아날 수 없고 남종선은 그중에서 불가결한 정신력 중 하나 이다. 본 논문은 창의적으로 남종선을 중국 전통사상에 놓고 고찰하고 중국 사회 전통사상에서 남종선의 전파와 영향에 입각하여 남종선이 중국 전통사 상에서 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해석하고자 한다. 따라서 본 논문은 선행문 헌 연구 방식을 통해 남종선의 이념 특색에 힘입어 중국 전통사상의 함의를 높이고, 남종선이 중국 신시대에서 급속히 발전할 경로를 모색하여 중국인의 정신문화생활에 더 잘 봉사할 수 있도록 연구할 것이다.
천태종은 진씨 수나라 시기에 발원 되었고 법화종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는 데 중국의 최초의 본토화 된 불교 종파로서 중국 불교사 최초로 창설된 종파 이기도 하다. 천태종의 창설은 이미 1400여년의 시간이 흘렀는데 그 유구한 발전역사와 세밀하고 완정하게 갖추어진 종파체계로 인해 중국 불교학의 중 시를 받고 있다. 이는 중국 불교의 발전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도 한 자리 할 수 있는데 더우기 한국, 일본 등 동남 아시아 여러 나라에 널리 영향 주고 있다. 천태종은 사십여 대를 전해 내려 오면서 그 사상은 이미 사회의 전통문화와 융합되어 있고 사회의 여러 방면 에 심원한 영향과 실용가치를 제공해 주고 있다. 본 연구는 현대사회의 시각 으로 천대종의 사상과 현대사회와의 상관성 및 그 영향과 작용을 살펴 보며 선행연구에 대한 연구의 방식으로 천태종의 발전역사와 그 사상체계에 대해 연구 및 논술을 진행하며 정성분석법을 응용하여 천태종의 사상이 현대사회 에 미치는 영향과 그 가치 작용을 요약 및 귀납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