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경』을 중심으로 한 신앙은 조선시대에도 그 명맥을 계승하였다. 조선시대는 출가가 제한되고 사원경제가 크게 위축되는 상황이었지만, 왕실과 지배층의 추모 의례에서는 『법화경』독송과 같은 신앙 행위는 빼놓을 수 없었다. 국가이념으로 표방했던 성리학은 현세 중심의 사상이어서 망자를 위로하고 산 자의 공덕을 비는 내세주의에는 불교를 능가할 수 없었다. 불교를 이단으로 규정하여 그 사상과 신앙을 초토화시키고자 했지만, 성리학의 허약성만을 드러낼 뿐이었다. 법화신앙은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는 그 종교적 기능이 더욱 강화 되었다. 근본적으로 청허 휴정을 비롯한 그 제자들이 주도했던 승가의 수행과 교육체계가 새롭게 확립되면서 그 가치가 부활하였다. 그러나 왜란과 호란의 과정에서 발생한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다양한 고통을 위로하는 재의(齋儀)는 법화신앙이 실제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법화경』 연찬은 조선후기 불교계의 교학 계보를 형성할 정도로 가치있었고, 선 수행에도 중요한 지남이었다. 『법화경』은 뿐만 아니라 당대 불 교계에서 망자 추선(追善)과 사찰의 낙성식(落成式)을 비롯한 다양한 의식에서 영산회상이었고 극락이었다.
생전예수재는 조선시대 수륙재와 함께 활발하게 설행되었던 불교의식 이다. 수륙재가 죽은 자의 안락을 위한 의식이었다면, 생전예수재는 산 자가 살아있는 동안 자신의 삶을 경계하고 죽은 후의 영원한 안락을 누 리기 위한 의식이자 신앙이었다. 때문에 생전예수재는 낮에 설행되었고, 수륙재는 밤에 설행되었다. 조선시대 생전예수재의 직접적인 명칭은 나 암 보우가 찬술한 글에서 처음 발견된다. 예수재는 왕과 왕실, 조상, 그리고 스승과 자신의 평안을 위해 설행되었다.
조선시대 불교가 탄압받고 소외받은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불교의식과 신앙은 단절되지 않고 그 전통을 계승하고 있었다. 특히 조선후기는 두 차례의 전쟁과 자연재해로 전염병과 굶주 림이 일어났다. 결국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그들을 추모하고 안락을 기원하는 불교의식이 설행되었다. 조선의 불교전통이 단절되지 않고 계승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조선시대 불교에 대한 이해와 연구는 불교탄압과 유교진흥이라는 편견과 선입견이 여전히 지배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인식은 조선후기 승려들의 각종 부역동원의 사실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른바 승려 들의 산성방어와 각종 토산물의 생산과 상납이 불교계에 대한 수탈 과 착취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평가와 인식은 조선후기 사회경제적 상황에서 살펴보면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은 인구감소, 자연 재해, 대규모 기근, 농토의 황폐화 등으로 암울한 상황이 지속되었 다. 급기야 조선정부는 백성들의 전세(田稅)·공물(貢物)·역(役)의 부담을 완화시켜 주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대동법이나 균역법의 시행은 백성들에게 일시적인 위안책이었다. 대동법 시행으로 백성들 의 부담을 떠안은 승려들의 곤궁함이 더해지기도 했지만, 백성들의 삶은 여전히 향상되지 못했다. 균역법의 시행 이후 승려들의 부역동 원도 점차 금지되었고 완화되었다. 요컨대 조선후기 경제상황과 수취체제의 시행은 승려들이 맹목적 인 수탈과 착취의 대상은 아니었으며, 불교탄압의 사례로 볼 수 없는 구조적인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