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조식은 자신에 대해서는 실천적 행실을 무엇보다 강조하였고, 대물에 대 한 관점은 실용적 측면을 중시하였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그의 문학에 대한 태 도에 있어서도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난다고 할 수 있는데, 그는 문학을 대하여 서도 실용성을 매우 강조하였다. 그는 젊었을 적에 한 때 문학으로 이름을 드러내기도 하였으나, 성인의 학문 을 자신이 공부할 목표로 정한 뒤로부터는 문학을 멀리하였다. 그는 스스로 시 는 완물상지하기 쉬우므로 배워서는 안 된다고 하였고, 그의 제자 정인홍에 따 르면 그는 항상 시황계를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남명이 이처럼 시를 배격하였다면 그의 문집에 시가 있을 수가 없을 것이지 만, 그의 문집에는 많은 수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한편으로는 시 벽이 있어 시를 짓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다고 하였다. 남명은 결국 시를 멀리 하면서도 시를 짓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물론 시흥이 나서 어쩔 수 없이 지은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바로 실용적인 목적으로 시를 지었던 것이 다. 특히 문장의 경우에는 이른바 문예문에 속하는 글도 전혀 없지는 않으나, 많은 작품들이 실용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처럼 실용성에 근거하는 남명의 문학관은 작품 속에서 대략 세 가지 정도로 드러나 있음을 볼 수 있다. 첫째는 본성이나 바탕과 같은 근본을 중시하는 것이다. 그는 「원천부」에서 온 갖 이치가 모두 본성에 갖추어져 있다고 하였는데, 작품을 지음에 있어서도 이 러한 생각은 그대로 드러나 있음을 볼 수 있다. 둘째는 현실과 일상과 같은 현재를 중시하는 것이다. 그가 「을묘사직소」와 「무 진봉사」에서 드러낸 것과 같이 작품 속에서 현실과 일상을 중시하는 생각은 다른 산문에서 뿐만 아니라, 몇몇 시 속에서도 이러한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셋째는 사실을 중시하고 허명을 싫어하는 것이다. 그가 사실을 중시하였던 점 은 그의 작품 속에서 그가 스스로 여러 차례 말한 바 있다. 특히 묘문을 지으면 서 그는 고인에게 아첨하지 않겠다고 하였으며, 훌륭한 학자라는 빈 이름으로 세상을 속인다는 생각을 여러 작품 속에서 밝힌 바 있다. 이상에서 살핀 바와 같이 남명의 문학작품 속에는 그가 문학을 멀리하면서도 왜 작품을 짓지 안 되었는가 하는 사실과 문학작품을 지음에 있어서 무엇을 강 조하였는가, 그리고 문학작품 속에 드러난 것을 통해서 그가 무엇을 중시하였 는가를 살필 수 있었는데, 이러한 것이 결론적으로 그의 실용주의적 생각과 맞 닿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