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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11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고려후기의 불교계는 귀족 중심의 불교에서 벗어나 일반 대중 중심의 불교운동 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교단의 변화 분위기에 따라 불교에 귀의하여 信行 했던 승려들의 출신성분도 다양해져 이전까지 주를 이루었던 귀족 출신 승려보다 는 오히려 민간 출신의 승려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이때 등장하여 불교계를 이 끌어 갔던 승려들은 대부분 당시에 불교계를 풍미하던 禪宗에 속해 있으면서 불 교를 문학으로 형상화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이러한 승려들로써는 慧諶 (1178-1234), 天因(1205-1248), 一然(1206-1289), 冲止(1226-1293), 景閑 (1299-1374), 普愚(1301-1382), 惠勤(1320-1376) 등을 예거할 수 있는데, 이들 은 대부분 일반 사대부가문 출신으로 그중에는 儒業에 관심을 가져 儒經을 공부 한 뒤에 과거에 합격했던 경력의 소유자가 있기도 하다. 冲止는 19세에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관직생활을 하다가 29세에 祝髮入山하여 승려의 길로 들어선 인물 이다. 그가 일찍이 유학을 공부하고 문학수업을 받았기 때문에 승려가 된 뒤에도 속세 문인들의 문학적 聲價에 못지않은 작품들을 남기고 있어 고려후기 불교문 학을 훨씬 풍부하게 만들어 갔다. 그가 승려로서 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부단하게 세상에 관심을 가진 것은 바로 불교가 단순히 내세를 기원하는 비현실적인 종교 가 아니라 부당한 현실의 질곡에서 신음하는 대중들의 고통을 위로하기 위해 그 들과 함께 하는 현실적 종교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불교관을 가지고 있던 충지는 세속을 초탈하여 물욕을 버리고 마음을 문학에 의탁하여 詩 와 더불어 노닌다는 禪的詩觀을 보일 수 있었다고 하겠다. 충지는 운문과 산문에 걸쳐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지만 그의 시를 통하여 그의 문학세계는 물론이고, 아 울러 고려후기 불교문학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 충지가 남긴 한시를 분석해 보 면 승려로서 불교의 교리를 읊은 것보다는 세태인심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표방 하거나, 자연의 아름다움과 질서를 노래한 것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특히 그의 시 에서 나타나는 현실에 대한 관심과 대중들에 대한 애정은 고려후기 불교문학이 일반 대중들을 교화하고 절망에 빠진 그들을 구제하는 데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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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1.10 구독 인증기관·개인회원 무료
        한문학과 한문교육의 연계문제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일반적이고 근원적인 문제라서 우리가 굳이 이 문제에 대하여 천착하지 않더라도 자연적으로 두 분야의 개념 이해나 상호연관성에 대해서 自得할 수 있다고 생각되겠지만 본격적으로 그 성격과 지향점을 따져서 깊이 있게 논하기 시작한다면 생각만큼 그렇게 쉬게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지금까지 이 문제를 주제로 하여 구체적이고도 적극적으로 논한 연구 성과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 것을 보더라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한문학과 한문교육은 태생적으로 친연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무척 가까운 관계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양자가 각각 하나의 독립된 영역의 학문으로 자립하게 됨으로써 둘 사이의 개념적 정의는 다르게 나타나게 되고 지향점에 있어서도 상당한 차별성을 보이고 있다. 일반적으로 한문학이 포괄하는 영역을 말할 때 일반적으로 한자로 표기된 모든 한문자료를 해석하고 연구하는 분야의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한국만이 아닌 동양의 文·史·哲에 관련된 한문고전을 총체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러한 개념규정은 한문을 표기수단으로 삼아 문자 활동을 했던 전통적인 지식인들이 남긴 文集과 오랜 기간에 걸쳐 인문문화의 정화로 존중돼 온 漢文古典에 개인의 정서를 나타낸 문학작품만이 아니라 역사에 대한 褒貶과 經世經國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을 나타낸 글을 담고 있기 때문에 한문학이 포괄하는 범위가 심대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한문학이 포괄하는 범위를 단순히 한문문학으로만 한정할 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한문학의 특수성으로 인하여 한문학 연구자들에게는 인문 문화의 전반을 통섭하고 조감할 수 있는 지적 능력과 시대를 관통하는 예리한 통찰력이 요구되기 마련이다. 한문학 연구에 평생을 바쳐도 한문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조차도 어렵다는 얘기는 바로 한 개인이 이같이 광범위한 한문문헌을 올바로 해석해 내거나 수천 년에 걸쳐 이루어진 인문지식의 集積을 온전히 了解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한문학 연구의 내용과 방법이 인간의 삶에 대해 종합적이고도 거시적으로 성찰하는 데에 일관하고 있기 때문에 한문학이 인문학에 속하는 여러 학문 가운데서도 중심 되는 학문으로 자리매김하게 될 수밖에 없다고 하겠다. 특히 요즈음 학문 경향이 점점 專門化 되고 細分化 되고 局地化 됨으로써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살피기에 역부족한 것은 물론이고, 시대를 嚮導할 새로운 理念과 潮流를 창출하지도 못하는 현실에 비추어볼 때에 한문학 연구자들에게 주어진 시대적 사명이 가볍지만은 않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은 한문학 연구자들이 역사와 시대에 대한 투철한 철학을 가지고 인간의 심성을 다스리는 처방을 찾는 능력에서부터 문명의 실체를 올바로 살필 수 있는 통찰력까지 갖추어야 만이 제대로 된 연구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보면 한문학 연구가 용이한 일은 아니지만 그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취한 연구결과가 대중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심상치 않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한문학의 연구 성과는 일선 학교에서 실시되고 있는 한문교육의 철학을 확립하고 한문교육의 범위를 확정하고 방향을 설정하는 데 좋은 指標가 될 수 있다.
        3.
        2009.11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고려시대는 정치적으로 실용적인 유교에 깊이 연대되어 있었지만 나라의 근간 과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는 불교에 의지하였다. 이는 당대를 주도하고 대변하던 계층이 불교를 所依處로 삼았다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이 시대 지식인의 사유와 행동에 불교가 끼친 영향이 적지 않았음을 짐작하게 된다. 고려후기에는 고려전기와 마찬가지로 불교가 크게 성행했고, 특히 무인난으로 인하여 많은 문인 지식인들이 현실을 떠나 山野로 도피하였으므로 자연스럽게 불교와의 인연을 가 지게 된 경우가 많았다. 또한 고려후기에 불교계를 주도하던 高僧․大德들 가운 데 鄕吏層․讀書人層출신들이 주류를 이루었기 때문에 이들과 교유하던 문인지 식인들이 불교에 대하여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들 고승들은 일찍부터 儒․佛에 관심을 가지고 精進하여 科試에도 합격할 정도로 文人的素養을 충분 히 갖추고 있었으므로 同時代의 문인들과 잦은 문학적 교류를 가졌다. 따라서 당 시의 문인들도 불안하고 경직된 시대를 만나 불교에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졌고, 詩文에 능한 승려들을 통하여 불교의 높은 정신적 경개에 이르고자 하였다. 당시 의 문인지식인인 이들 사대부들은 유교를 공부하여 현실 정치에 참여했지만 危難 의 시대에 정신적으로 기댈 곳은 불교의 탈속적 세계 밖에 없었다. 이러한 문학적 교류는 승려들의 작품 형식으로 정착된 山人體를 서로 답습하게 되므로써 더욱 견고성을 가지게 되었다. 승려들과 문학적 교류를 통하여 불교사상을 문학적 이데 올로기로 삼은 사대부들이 많았지만 이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李奎報와 李穡 이다. 따라서 이 두 사람의 詩文에 나타난 불교 취향은 고려후기 문학 사상의 중 요한 부분이 되기 마련이었다. 이들의 불교관련 시문에서는 불교의 이상향인 淨土 를 추구하면서 탈속적인 세계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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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7.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고려 전기 문학의 형성에는 신라문학의 영향이 至大했다. 특히 신라출신으로 당나라에 건너가 유학했던 지식인들이 신라말엽에 귀국하여 당시 문학 활동을 主導했기 때문에 고려 전기 문학은 이들에게서부터 그 端初가 열렸다고 볼 수 있다. 신라의 문학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던 고려 전기의 한문학은 중국문학과의 交涉을 통하여 보다 진전된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고려 전기 문물을 정비하고 새로운 문학세계를 여는데 중국에서 投化한 사람들의 기여가 컸다. 雙冀나 王融에 의해 도입ㆍ정착된 科擧制度는 고려 전기의 한문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발전하는데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또한 고려의 외교 사절들이 중국을 왕래하면서 중국 文士들과 문학적 교류를 不斷하게 가짐으로써 고려 전기 문인들의 창작역량과 작품수준을 더욱 향상시켰다고 볼 수 있다. 중국의 문사들이 고려 사람들의 문학적 역량을 높이 평가하여 간행했던 小華集에서 고려 문인의 작품수준이 심상하지 않았음을 짐작케 한다. 더욱이 고려의 詩文風이 발전적으로 변화된 것은 東坡의 詩文風 도입에 있다고 하겠다. 지나치게 형식적이고 수사에 치우쳤던 場屋風의 詩文風을 反省하고 문학의 본질문제에 대해서 고민하게 한 것이 바로 동파의 詩文風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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